흔히 작가 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영상은 어둑한 골방의 이미지다. 독방에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 채 안으로, 안으로 침잠하는 고독한 예술가. 2005년 서울국제문학포럼에서 전세계 작가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보니, 그들이 모여 발산하는 이미지의 덩어리는 오히려 ‘고독한 전사’에 가까웠다. 특히 감동적인 강연을 들려주었던 오에 겐자부로, 응구기 와 시옹오, 조은 등은 더더욱 그랬다. 오에 겐자부로는 조국의 헌법에 새겨진 참혹한 역사의 문신과 싸우고 있었고, 응구기 와 시옹오는 영어를 중심으로 구축된 언어제국주의와, 조은은 가족의 삶에 뿌리박은 기억의 흔적과 투쟁하고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절실한 싸움의 기억으로 스스로의 몸을 자발적으로 결박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렇게 스스로를 싸움의 필연으로 칭칭 휘감아야만 오히려 한껏 자유로울 수 있는 이들.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 역시 그러한 문학의 정치성을 작품 깊이 끌어안는 작가 중 한 사람이었다.
이스탄불이 집이고, 세계고, 우주다
파묵의 젊은 시절을 압축하는 세 가지 키워드는 미술, 건축, 저널리즘이다. 그는 1952년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부유한 대가족의 품 안에서 넉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화가와 동시에 건축가를 지망하여 이스탄불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다. 이후 저널리즘으로 전공을 바꾸었지만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적은 없다. 젊은 시절의 방황 속에서 그는 이미지와 공간의 창조에 대한 열정을 글쓰기의 열정으로 전환하게 되고, 23살에 전업작가의 길로 접어든다. 그는 1982년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로 데뷔했고, 처녀작으로 곧바로 터키의 대표적 문학상인 오르한 케말 소설상을 수상한다. 이후 <고요한 집> <하얀성> <새로운 인생> 등이 잇따라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으며 세계적인 작가의 명성을 쌓게 된다. 그의 대표작 <내 이름은 빨강>은 40여개국어로 번역되었으며, 그는 마다랄르 소설상, 프랑스 최우수 외국문학상, 더블린 문학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파묵은 터키 정부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아르메니아인과 쿠르드인 대학살을 폭로하는 발언으로 국가 모욕죄로 기소되었고 6년형을 받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곧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국내외 언론의 핫이슈가 되었고 그를 구명하고자 전세계 문인들이 터키 정부에 항의서한을 보냈다. 오르한 파묵의 유명세 덕분에 터키의 열악한 인권과 표현의 자유가 전세계에 알려졌다. 터키는 역사적으로 예술가들에게 가장 위험한 나라로 악명 높았다. 예술가뿐 아니라 언론인, 출판인들은 걸핏하면 기소와 협박, 테러와 암살에 시달려왔다. 오르한 파묵은 복잡한 정치·외교적 갈등의 한복판에서 터키 정부의 압력과 전세계 문인들의 지지를 동시에 받았다. 터키 정부는 ‘유럽연합 가입의 욕망’과 ‘터키적 정체성’ 사이의 갈림길에서 갈등했다. 오르한 파묵으로 인해 터키는 일약 세계 인권지수의 바로미터가 된 셈이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그의 작품 세계의 토양은 이스탄불, 그리고 터키 그 자체였다. 터키 사람들은 ‘터키는 유럽인가 아시아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유레시안(Eurasian)’이라고 답하곤 한다. 이곳에도 저곳에도 완전히 편입될 수 없는 유동성, 동양과 서양, 근대와 반근대, 이 모든 것들이 격렬한 비동시성의 동시성으로 충돌하는 곳이 바로 터키였다. 파묵의 <하얀성>에서는 서구에 대한 터키인들의 양가감정이 느껴진다. 터키인에게도 동아시아인들이 겪었던 혼돈, 즉 외발적 근대나 모방적 근대에 대한 매혹과 공포가 동시에 느껴진다. 너무도 두려운 그러나 닮고 싶은 타자, 즉 ‘서양’에 대한 매혹과 공포의 양가감정. “어쩌면 몰락이란 다른 사람들의 우월성을 보고, 그들을 닮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167쪽) “그곳에서는 모두들 그렇게 행복하게 살아?”라고 묻는 터키인의 질문은 옥시덴탈리즘의 핵심을 포착하고 있다. 지금-여기(동양)는 불만족스럽고 저곳(서양)은 샹그릴라일 것이라는 달콤한 환상. 사상적으로 서구를 지향하지만 터키의 예술적 전통에 무한한 애정을 보이는 오르한 파묵의 작품세계 또한 이 문화적 카오스 속에서 태어났다. 그는 방문교수로 3년 동안 뉴욕에 체류한 것을 제외하고는 쭉 이스탄불에서만 살았다고 한다. 칸트가 평생 자신의 좁은 동네 속에서 우주를 보았던 것처럼, 파묵에게는 이스탄불 자체가 집이자 세계이고 우주였던 듯하다. 파묵은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의 중첩성, 유레시안이라는 특수성의 프리즘을 통해 세계 전체를 투시한다.
<하얀성>에서 서구를 지향하는 지식인 호자는 “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은 새로운 태양인가 아니면 간밤에 진 태양이 뒷길을 돌아 아침에 다른 쪽에서 다시 머리를 내미는 것인가”라는 식의 코믹한 테마를 논의하는 터키인들을 한껏 비웃는다. 그러나 이러한 ‘전근대적’ 질문들이 오히려 원시성에 대한 향수를 충동질한다. 비밀과 상징과 은유로 가득한 세계, 문명화된 인류가 잃어버린 동화적 상상력. 오르한 파묵이 그토록 사랑하는 이스탄불의 전통회화는 어쩌면 잃어버린 인간의 상상력의 DMZ, 순수의 DMZ일지도 모른다. <하얀성>은 서양인과 동양인의 자리를 맞바꿈으로써 정체성 개념을 교란시킨다. 기독교인의 에고이즘과 나르시시즘이 폭로되는 것만큼, 터키인들의 보수성과 종족주의 또한 섬뜩하게 폭로된다.
수많은 경계의 해체 속에서, 새로운 길을 열다
<하얀성>에서 ‘나’(노예)와 ‘그’(주인)의 관계는 동양과 서양의 관계를 닮았다. 그들은 서로를 통해서만 자기 자신일 수 있다는 점에서, 양쪽 다 정신적 노예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이 두 사람이 ‘오즉여 여즉오’의 경지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과정이 <하얀성>의 내러티브다. <내 이름은 빨강>은 파묵의 회화적·건축적 감수성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그는 회화를 문자처럼 읽어내며 문자를 회화처럼 그려내는 재능을 발휘한다. 시체, 살인자, 용의자는 물론 늙은 개, 금화, 나무에까지도 기꺼이 ‘이야기꾼’의 마이크를 넘겨주는 입체적 시점은 그의 건축학적 감수성을 구현한다. 그는 시각적 이미지를 문자로 실현함으로써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고, 입체적 시점을 이용하여 신의 시선으로 인간을 내려다보는 전지적 시점의 한계를 돌파한다.
파묵의 작품 세계는 결국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다채로운 화답의 콜라주로 압축될 수 있다. 푸코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듯 난데없이 짜증을 부린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등으로 나에게 질문하지 말아 주십시오. 언제나 똑같은 채로 있으라는 식으로 질문하지 말아달란 말입니다.” 파묵 역시 이렇게 호소한다. “부디 내게 서양인이 돼라, 동양인이 돼라 주문하지 말라”고. 그것은 ‘나는,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아’와 ‘적’을 가르지 말라는 질문이기도 하며, ‘Who are you?’라는 질문 자체에 녹아 있는 정치적인 폭력성을 겨냥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얀성>의 주인공 ‘나’는 나를 나이게 하는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를 꿈꾼다. 나를 평생 ‘나답게’만 살아달라 주문하는 정체성의 그물이야말로 폭력이며, 모두이면서도 그 누구도 아닐 수 있는 자유야말로 작가의 생명일 것이다.
파묵의 30년 작품 활동의 에너지는 이야기꾼의 운명 자체에 대한 사랑인 듯하다. 먼 데서 온 낯선 자의 낮은 목소리, 이야기꾼의 따스한 재담에 귀를 기울일 때, 생의 암흑은 수천 가지 빛깔로 물들곤 한다. 파묵의 의뭉스런 이야기꾼의 재능은 그가 ‘시간’을 부리는 감각에서 날카롭게 드러난다. 아무런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5년, 30년이 훌쩍 지나가는 듯한 그의 붓놀림은 시간의 울퉁불퉁한 이음새를 스리슬쩍 땜질하는 마술적 내공을 보여준다. <하얀성>에서 주인공은 ‘살기 위해서 이야기를 꾸며내다’ 보니,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이야기를 쓰기 위해 살아남았음’을 깨닫는다.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의 기록은 형벌이기도 하지만, 그는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터키인에게 들려줌으로써 노예의 시간을 견딘다. 마침내 그 이야기의 기록을 통해 나를 나이게 하는 정체성의 그물들, 타인에게서 영원히 잊혀질 것만 같은 망각의 공포에서 벗어난다. ‘그’(터키인)가 ‘나’(서양인)가 되어버려 내 모든 것을 앗아가자, ‘나’는 그 극한의 상실감으로부터 오히려 무한한 자유를 누린다. 가장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집착을 묵묵히 놓아줌으로써 그는 노예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행복한 ‘스토리토피아’를 꿈꾼다
이야기에 대한 파묵의 무구한 사랑을 엿보다보면, 스스로는 어떤 구원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구원시키려는 자, 그가 바로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파묵의 소설은, 이야기 한편을 통해 타인의 인생 전체를 다 살아낸 듯한, 장쾌하면서도 처연한 랑데부를 선물해준다. 그는 이야기가 주는 무구한 기쁨 앞에 매번 무장해제되는 인간의 본성을 남김없이 이용할 줄 안다. <하얀성>에서 터키함대의 포로로 잡힌 ‘나’를 수십년 동안 끈질기게 버티게 만든 것, 그리고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는 만만치 않은 제왕 파디샤의 마음을 열게 한 것도 그의 ‘이야기’의 힘이었다. 이야기가 품고 있는 해방의 에너지. 그것은 포획하고 축적하는 힘이 아니라, 모든 것을 세상 밖으로 놓아줌으로써 존재의 사슬을 푸는, ‘버림’의 에너지다.
<하얀성>의 주인공이 파디샤에게 바치는 마지막 책은, “자신들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이 누구라는 것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행복한 영양과 참새에 대해 언급하는”(228쪽) 책이었다. 거울을 볼 필요가 없는 세상, 내가 누구인가를 묻지 않아도 되는 삶. ‘나=그’의 방황의 종착역은 오직 이야기를 창조하고 향유하고 소통하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행복한 ‘스토리토피아’다. 그는 동서양 할 것 없이 세헤라자데의 달콤한 요설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장해제당하는 인간의 욕망, 이야기의 DMZ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하얀성>의 주인공은 이야기의 ‘의미’가 아니라 이야기 자체를 즐기는 삶을 누리며 행복한 말년을 보낸다. 어쩌면 파묵이 복화술로 보내고 있는 메시지는 이런 것일 지도 모른다. 전세계의 작가들이여! 이야기의 힘 앞에서, 전세계의 민족주의를, 자본주의를, 벌벌 떨게 하라! 파묵은 오늘도 이야기‘로써’ 다른 무엇을 획득하고자 하는 삶이 아니라, 이야기 자체를 살아내며, 이야기에 취해 이야기 속으로 저물어가는 삶을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