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진짜다. 증거도 있다. 나의 노트북에는 ‘이창’에 쓸 만한 주제를 적어 두는 ‘이창 아이템’이라는 파일이 있는데, 거기에는 서너달 전부터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것’이라는 제목이 들어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 이번주엔 ‘팬이 된다는 것’을 써볼까 하면서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지난주 ‘이창’에 어떤 글이 실렸는지 확인은 해야지, 하면서 회사에 놓인 <씨네21>을 가지러 갔다. 믿어주면 고맙고, 돌아와 ‘편집장이 독자에게’를 펴자 ‘팬이 된다는 것’이라는 제목이 보였다. 아니, 그토록 찾던 솔메이트가 혹시 남동철 편집장!? 정신을 되찾고 다짐했다. 그냥, 쓰자.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어딨니?
대신에 주제를 조금은 바꾸자. ‘무시하던 존재의 팬이 된다는 것’으로 주제를 살짝 바꾸자. 그리하여 시작이다. 지난 할로윈 데이에 이태원 클럽에서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오는 길에 그의 목소리도 들었다. “오늘을 기다렸어~. (짝짝) 이런 밤이 오기를~ (짝짝).” 정말로 오늘을 위한 노래군, 하면서 슬며시 웃음도 지었다. 두 시간을 기다리자 그가 나타났다. “오늘을 기다렸어~. 이런 밤이 오기를~.” 믿거나 말거나, 정말로 <초대>를 부르면서. 그를 보자 나도 모르게 몸을 무기로 무대를 향해서 압박을 가했다. 누군가 외쳤다. “엄정화! 엄정화!” 우리의 정화 언니가 말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클럽”이라고, “여러분께 제일 먼저 들려드리고 싶었다”고. 그리고 <come 2 me> <friday night> 9집 앨범의 신곡이 이어졌다.
설마 처음부터 엄정화의 팬이었을 리가. 신윤동욱 소년은 나름대로 취향이 있었다. 1980년대 소년답게 헤비메탈 그룹의 앨범을 들었고, 한국 언더그라운드 음악이라면 일가견이 있었다. 소년이 10대에 한 최고의 ‘팬질’은 록그룹 ‘H2O’의 콘서트가 끝나자 그들의 분장실로 잠입해 강기영(지금은 달파란)과 김준원을 놀라게 한 일이었다. 조숙한 10대에 김현식의 공연을 보았다는 사실은 아직도 신윤동욱 아저씨의 은근한 자부심이다. 그랬던 아저씨가 어느새 ‘댄스가수’ 엄정화의 팬이 됐다. 사연은 이렇다. 어언 칠팔년 전, 신윤동욱 청년이 외로운 주말 밤이면 밤마다 노닐던 클럽에서 날마다 엄정화의 노래가 나왔다. 시계소리 째깍거리기 시작하면 클럽의 청년들은 “아~악” 소리를 지르고, 군무(群舞)를 추었다. 수십명이 <배반의 장미> 율동을 단체로 재현하는 장관이었다. 솔직히 그들이 귀여웠지만 한심했다. 친구들이 엄정화 타령을 하면 ‘취향도 독특하셔’ 비웃었다. 청년은 음악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음악보다 중요한 친구들 때문에 다른 클럽에 가지도 못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자, 글쎄나 엄정화 노래는 추억이 되었다. 어느새 엄정화의 콧소리를 ‘느끼게’ 되었다. 처음에는 인정하기 어려웠다. 남들에게 차마 고백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좋아했다. 하지만 엄정화의 주옥같은 8집이 얼음 같은 반응밖에 얻지 못하자 마침내 커밍아웃을 했다. 팬으로서 묵과하기 힘든 사태였다.
일찌기 마돈나 언니도 있었다. 어언 10여년 전,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다. 마돈나 얘기가 나오자 그들은 광분했다. <보그>가 어떻고 하면서 서로들 좋아했다.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아니, 어떻게 쪽팔린 줄도 모르고 마돈나의 팬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단 말인가. 진심으로 사과한다. 그때는 마 여사를 몰랐다. 그저 그런 댄스가수로 무시했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이제는 9월에 마 여사의 일본 공연을 놓친 것을 진심으로 후회한다. 이렇게 전향서도 쓰지 않고서 문화적 전향을 일삼았다. ‘룰라’도 그랬다. 브라질 대통령 룰라 말고, 한국의 댄스그룹 룰라 말이다. 90년대 내내 그들을 무시하다 그들이 해체할 무렵, 심지어 애틋해졌다. 그들이 “여~기 숨쉬는 이 시간은~ 나를 어데로 데려갈까~ 많은~ 기쁨과 한숨들이 뒤섞인 이~ 곳에서~ 스리! 포!”라고 노래할 때는 정말로 코끝이 찡했다. 돌아보니, 그들의 전성기는 나의 20대와 겹쳐졌고, 그들이 해체할 무렵 나의 20대도 저물고 있었다. <3!4!>는 그들의 마지막 노래였다. 그렇게 <3!4!>는 뜻밖의 ‘청춘송가’가 되었다. 뒤늦게 회개한 아저씨는 일찍이 깨달은 팬들에게 심심한 통석의 념을 전한다.
얼마 전 버스에서 돌아보니, 나는 누군가의, 무언가의 진정한 팬이 아니었다. 그래서 인생이 무료한 것일까. 엄정화를 좋아하지만, 옆에서 열심히 “엄정화!”를 외쳐도 차마 나의 입은 떨어지지 않는다. 외치고 싶은데 외쳐지지 않는다. 그렇게 순수한 몰입의 순간이 찾아오지 않는다. 어차피 인생이란 누군가에게, 무언가에 열정을 바치는 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어머니는 예수님의 신실한 팬으로 살아가고, 나의 친구는 부처님의 왕팬이 되면서 성격도 좋아졌다. 때때로 내게는 데모질도 팬질과 어쩌면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딘가에 바쳐야 할 열정이 있었고, 잘생긴 오빠도 좋지만 아름다운 세상도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열정이 식었어도 그렇게 순수했던 데모질을, 팬질을 후회하지 않는다. 정말로 즐거웠다, 뒤늦은 인사를 전하고 싶을 뿐이다. 팬질이든, 데모질이든 열심히 인생을 즐기는 당신이 챔피언~.
한마디 덧붙이자. 옆에서 선배가 말한다. “너한테는 방콕이라도 있잖아. 나는 그것도 없어.” 저 아저씨들을 어찌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