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6월30일, 수도경찰청은 비상이 걸렸다. 오전부터 소집 명령을 받은 산하 경찰서 서장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도대체 일 처리를 그 따위로 하느냔 말이야!” 갑작스레 열린 비상회의에 영문도 모르고 불려나온 서장들은 빈속에 상관의 호통부터 얻어먹어야 했다. 괜스레 나섰다가 봉변당하기 영락없는 정황. 관하 서장들로선 입 닫고 고개 숙이기 바빴다. 딘 미 군정장관에게 한소리 들었는지 이날 경찰청장의 질책은 호됐는데, 서장들은 시내 요정이나 카페 주인 중 누군가가 “경찰이 영화 <밤의 태양> 우대권을 강매한다”는 내용의 볼멘 투서를 한 모양이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영화이기에 치안 업무는 뒷전으로 물리치고 극장영업에 앞장선 것일까. 1948년 7월1일, 서울 국도, 중앙, 성남, 동도극장 등에서 개봉한 <밤의 태양>은 기록에 따르면, “캬바레를 아지트로 하여 암약하는 대규모 밀수단을 민완 형사들이 일망타진 한다”는 줄거리의 영화다. 제작사는 다름 아닌 수도경찰청 경우회. 소방국이 미 육군성에서 만든 <불과 화학>을 상영하고, 향린원(고아원)에서 아동영화 상설관 설립에 나서고, 조선체조경기연맹이 <미와 력>을 제작하는 등 당시 정부 부처와 기관들은 계몽을 위한 영화 제작 및 상영에 앞장섰는데, 경찰청이라고 구경만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중절모와 감청색 양복, 야자수 남방”을 걸친 마카오 신사들과 파마머리를 한 여성들이 카바레를 들락거리고, 아편밀수가 횡행하던(1948년 한해 동안 마약밀매 건수가 서울에서 무려 1천건에 달했다고 당시 신문은 적고 있다) 어지러운 시절을 경찰들이 곤봉 대신 영화로 바로잡겠다고 나선 것까진 좋았는데, 문제는 제작비 마련이었다. <밤의 태양>의 제작비는 당시 1500만원이었다고 알려지는데, 여타 기록물 문화영화와 달리 35mm필름을 사용했고 최은희, 김동원, 한은진, 김승호 등 정식 배우를 캐스팅한 이른바 초대형 영화였다.
“박봉인 경찰들의 봉급에서 제한 기금”으로 어렵사리 완성된 영화였으니 부담이 오죽했으랴. 공권력을 이용(?), 전례없는 4개관 동시 개봉이라는 와이드 릴리즈 전략까지 택했으나(필름 한벌로 시간차 ‘가케모치’를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흥행 수익을 일선 경찰들의 생계와 복지에 쓰겠다는 애초의 호언을 지킬 자신은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 각 경찰서는 개봉을 앞두고 시내 요정, 음식점 등에 “장당 200원짜리” 초대권을 강매하기에 이른다. 널뛰듯 오르는 극장요금(1인당 120원) 때문에 관객 수가 이전보다 50% 이상 급감한 상황이었으니, 경찰로선 주머니 두둑한 관객을 미리 확보해야만 했을 것이다.
갈 길은 먼데 산 넘어 산이라고. 개봉을 앞두고 불거진 표 강매건은 수도경찰청이 자체 조사위원을 정해 철저한 사태 규명을 약속하면서 일단락 되는 듯했으나,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수도경찰청 기자단이 영화에 등장하는 신문기자에 대한 부정적 묘사를 문제삼아 해당 장면의 삭제를 요구해달라고 공보부장 등에 항의서를 보내는 등 난관에 부딪친다. 결국 1948년 8월1일 미 군정청장은 <밤의 태양>을 비롯해 제1관구 경찰청이 제작한 <수우>, 제7관구 경찰청이 만든 <여명> 등 범죄예방과 생활고 타계라는 경찰의 일거양득 유료 이벤트를 금한다.
유료상영 금지조치 직후 <서울신문>은 “상당한 제작비를 들여 만든 영화인 만큼 그 손해는 누가 볼 것인지 주목된다”고 썼는데, 그렇다고 해서 경찰청이 쪽박을 찬 것 같진 않다. 1948년 7월10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개봉 뒤 1주일 동안 <밤의 태양>은 4개 극장에서 모두 5만9천여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첫주 수입 1100만원 중에 초대권 판매액이 포함됐다고 하더라도 유료상영 금지까지 한달 가까이 상영을 했으니 빈털터리 신세는 분명 면한 듯하다. 예기치 못했던 사회적 논란에 휩싸이면서 의도하지 않았던 마케팅 효과 또한 덩달아 극대화된 것 아닐까. 어쨌거나 <밤의 태양>이 요란한 블록버스터의 면모를 고루 갖춘 영화였던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