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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부산의 기억
최하나 2006-11-10

첫 데일리였다. 올해 부산영화제 데일리 취재팀 막내로 합류하게 되면서, 선배들의 엄포성 멘트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너무 힘들어서 사무실 공기가 싸늘할 것이다”라는 말부터 “정말 지옥 같다”는 말까지. 솔직히 시작도 하기 전부터 겁이 났다. 물론 올해 전주영화제 데일리를 만들었던 경험이 있지만, 그때는 어디까지나 편집을 담당한 것이었으니까. 첫 데일리 취재, 그것도 부산영화제라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부산 내려가기 전날 심하게 잠을 설쳤다. 줄잡아 2시간 정도 잠을 잤을까. 가는 열차 안에서 눈을 붙여야지, 하는 마음으로 KTX에 올랐다. 일찌감치 잠을 잘 태세를 취하고 있는데, 옆자리에 한 외국인 남자가 자리를 잡았다. 눈이 부시다며 블라인드를 내려달라고 부탁하던 그는 내가 영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때부터 나에게 말을 붙이기 시작했고,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3시간 동안 끊임없이 이어졌다. 부산역에 도착하는 순간, 모든 사물이 흐릿해 보였다. 마음은 조급하고, 머리는 돌아가지 않았다. 내 첫 데일리 취재는 그렇게 가수면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불길한 예감은 계속해서 실현되는 것만 같았다. 자명종 역할을 했던 것은 어쩌면 알람이 아닌 불확실한 인터뷰 일정이었을 게다. 한번은 인터뷰가 잡히지 않아 잠시 잊고 있던 송요스 수그마카난 감독의 인터뷰가 당일 아침에 바로 잡혔다는 벼락같은 연락을 받았다. 세수도 하지 않고 후다닥 뛰어나가 황급히 질문지를 작성하고 호텔로 향했다. 그런데 문이 열리더니 갑자기 예닐곱명 되는 사람들이 우르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이분들은 원래 함께 다닌다”는 모호한 해명과 함께. 타이어 통역이 사실상 불가능한 통역사는 첫 번째 질문부터 전달하지 못했고, 결국 인터뷰는 영어와 타이어와 한국어가 뒤섞인 정체불명의 것이 되어버렸다. 감독과 동행한 2명의 아역배우들은 지루해서 참을 수 없다는 듯 시종일관 몸을 배배 꼬아댔고, 그 아수라장 속에서 타이 매체에서 찾아온 기자들은 열심히 동영상과 사진을 찍고 있었다. 웃으면서 인터뷰를 마쳤지만, 식은땀이 흘렀다.

수많은 돌발상황들. 마감의 압박. 종종 얼어붙곤 했던 사무실의 공기. 모든 것들이 선배들의 예언대로 맞아떨어졌지만, 그 숨막히는 릴레이 마감 속에는 분명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이 존재했다. 그것은 어쩌면 굉장히 사소할지도 모르는 작은 순간들이다. 키보드를 두드리다 문득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았을 때, 11분짜리 단편영화를 보기 위해 자정에 부산 거리를 전력질주하며 땀을 쏟아냈을 때, 무척이나 긴장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인터뷰 때 “와, 당신 이름과 내 영화 제목이 같네요”라며 그가 살짝 미소지었을 때, 그리고 수면부족으로 먹먹한 머리를 감싸쥐고 걷던 중 데일리를 하나씩 들고 총총히 지나가는 이들을 보았을 때. 축제를 즐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영화제를 찾은 관객의 몫이라 생각했다. 나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지만 축제는 분명 그곳에 있었다. 대량의 커피와 돌 같은 침대 속에도, 축제는 가장 의외의 모습으로 존재했다. 정말이지, 부산의 공기는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