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인터뷰
신임 한국영상자료원장 조선희
문석 사진 오계옥 2006-11-01

이 일도 <씨네21>의 연장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잡지계, 그리고 영화판이라는 정글에서 하이에나처럼 으르렁거리며 살던 그는 어느 날 홀연히 고요한 호숫가로 떠났다. <연합뉴스>와 <한겨레> 기자를 거쳐 <씨네21>의 창간 편집장을 지냈던 조선희씨는 2000년 소설가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했고, 이후 에세이 <정글에선 가끔 하이에나가 된다>, 장편소설 <열정과 불안>, 소설집 <햇빛 찬란한 나날>을 잇따라 발표했다. ‘<씨네21> 전 편집장 조선희’보다 ‘소설가 조선희’라는 칭호가 익숙해지면서 그는 계속 문학의 산수(山水) 속에서 우아한 학처럼 살아갈 것만 같았다. 그러던 그가 6년 만에 영화계로, 정글로 돌아왔다. 9월25일 그가 원장으로 부임한 한국영상자료원은 이 정글 속에선 호젓한 암자 같은 곳이지만, 추진하고 지속시키고 마무리지어야 할 일이 너무 많기에 그는 다시 3년 동안 하이에나로 살아야 할지 모른다. 국정감사라는 “큰 시험”을 나흘 앞둔 10월23일, “예행연습 차원에서 인터뷰에 응했다”는 조선희 신임 한국영상자료원장을 만났다.

-이제 취임한 지 1개월 가까이 됐다. 업무 파악은 끝났나. =아직 업무 파악까지는 아니고 분위기 파악 정도는 했다. 여러 명으로부터 업무 보고를 받느라고 정말 힘들었다.

-영상자료원장은 유진룡 전 문화부 차관이 “청와대의 청탁이 있었다”고 주장했던 자리인데, 부담은 안 되나. =전혀. 그거야 1차 공모 때의 일이다. 그리고 내가 임명되는 과정에서 무슨 비리가 있던 것도 아닌데다가 여기는 권력을 남용하거나 돈을 많이 지출하는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말하자면 권력적인 조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정감사를 대비하면서 예상질문도 뽑았을 텐데, 가장 어려운 질문은 뭔가. =영상자료원의 일이란 게 절반은 인문학쪽이고 절반 정도는 이공계쪽이다. 그런데 필름 보존이나 복원 분야는 오리지널 필름, 네거티브 필름, 마스터, 듀플리케이션 네거티브, 이런 공정이나 거기에 필요한 장비 등 기술적인 문제가 끝도 없이 나온다. 그런 메커니즘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어도 기본은 알아야 하니 공부를 해야 한다. 문제는 내가 수십년간 인문사회과학적인 사고방식에 젖어서 그런지 그쪽 정보에 대해서는 뇌가 반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과정으로 영상자료원장에 선임됐는지 궁금하다. =간단히 말하면 재공모에 응모를 한 것이다. 하지만 과정을 설명하자면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 우리가 그렇게 럭셔리한 집은 아닌데, 이번 여름에는 온 가족이 그동안 별렀던 유럽여행을 했다. 가기 전부터 장편소설을 쓸 구상을 해왔기 때문에 원주 토지문학관에 사용 신청까지 해놓고 떠났다. 여행하는 동안에도 장편소설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뜨끈해져서 돌아왔다. 그게 8월2일이었는데, 바로 그날 한 영화계 인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영상자료원장으로 추천하겠다며 재공모에 신청해달라는 것이었다. 영상자료원장 1차 공모가 무산되면서 나를 추천하기로 얘기가 됐던 것 같다.

-굉장히 황당했을 것 같다. 그래도 원장에 응모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때는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그래서 안 된다고 한마디로 딱 잘랐다. 그 다음날에도 아는 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분은 영상자료원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역설했고, 결국 응모하기로 결심하게 됐다. 거기엔 나의 정서 또는 심리적인 차원의 문제도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직장생활을 20년 정도 한 뒤 소설 쓴다고 나왔는데, 글쓰는 일이 내 인생에서 가장 재밌었던 일 중 하나였던 건 틀림없지만 너무 심심했다. 이를테면 초기에는 점심을 혼자서 먹는 것에 익숙지 않아서 심적인 고통을 상당히 받기도 했다. 혼자 지내다 보니 나를 둘러싼 유기적인 관계가 없었고 그 때문에 상실감도 많이 느꼈다. 그러니까 내가 영상자료원장에 응모한 것은 그저 직장생활을 택한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사람들과 3년쯤 어울려 지내고 나면 원기회복해서 즐겁게 소설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아, 그런 점도 있다. 내가 <열정과 불안>이라는 장편소설을 냈잖나. 그런데 사람들이 그 제목을 <냉정과 열정 사이>나 <열정의 습관>과 자꾸 헷갈리는 거다. 그렇지만 않아도 죽 소설을 썼을 텐데, 그렇게 상처를 받으니…. (웃음)

-막상 맡아보니까 의욕이 나나. =조직에 들어와 사람들과 약간의 친밀감이 생기는 순간, ‘이곳이 잘돼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고, ‘내가 뭘 할 것인가’ 하고 자연스레 고민하게 되는 것 같다. 사실, 내가 무슨 필름 보존의 역사적 사명감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아니잖나. (웃음) 사람들과 조금 정이 들면 그 조직에 대해서 무한책임 같은 게 느껴지는데, 그런 게 동력이 되는 거다.

-직장생활이라 해도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공직생활 아닌가. =너무 다르다. 음담패설도 조심한다니까. (웃음) 그동안 나는 기자에 소설가에, 너무나 자유분방하게 살아왔다. 그러다가 여기 딱 들어와 보니 여러 가지를 조심하게 된다. 그래도 이곳 일이 재밌는 측면이 뭐냐면, 손톱만큼일지라도 국가적 기능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게 사람을 흥분시키고 긴장시킨다. 필름 보존이나 복원문제, 시네마테크나 박물관 문제, 모두 여기 와서야 관심을 갖게 된 일들인데, 다 중요한 일이고 여기가 아니면 어디서도 하지 않는 공적 기능이다. 그런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때 흥분되고 긴장된다. 전임 이효인 원장이 해외를 다니면서 한국 고전영화를 수집, 발굴했는데 그 필름들이 막 들어오고 있다. 그것들을 국내에서 어떻게 공개할 것인지를 생각할 때 이게 참 중요한 공적 기능이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리고 예산이 너무 적다 보니 복원작업의 속도가 예전 필름이 훼손되는 속도를 못 따라잡는다. 예산도 따고 장비도 들여와서 빨리 그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런 게 나를 긴장시키는 측면이다.

-원장으로서 가장 시급한 업무는 무엇인가. =우선 필름의 보존이나 복원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끌어내는 일이 시급하다. 영화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정점에 이르렀지만 이런 인프라에 대한 관심으로 유도하지 못한 것은 영상자료원이 조금 안이했다고 본다. 또 하나는 법제도적인 정비다. 영상자료원은 정부산하기관인 탓에 정부 예산에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예산은 모두 법제도적인 정비가 돼야 따라온다. 올해 4월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영비법)이 공포됐고 10월28일 시행되는데, 그 법령 안에 영상자료원에 관한 조항은 설립 목적과 기능, 그리고 필름 납본에 관한 내용 등 단 두개뿐이다. 필름 보존과 복원에 대한 기준은 물론이고 원장 임명에 관한 조항도 없다. 법 제정 과정에서 영상자료원이 침묵했기 때문이다.

-결국 국회와 정부를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오랜 기자생활이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기자들은 대체로 누군가에게 뭔가 부탁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데. =기자 출신의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기자들은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국정감사 이런 건 좀 두렵지만, 기본적으로 사람 만나서 설득하고 물어보고 하는 것은 익숙하다. 실제로 다른 분야에는 그런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많다.

-그래도 국회의원들에게 부탁하고 하다보면 자존심도 많이 상할 텐데. =원장 맡은 지 3일째 되는 날 법 정비와 관련한 협조를 구하려고 국회 의원회관을 방문했다. 문화관광위원회 의원들에게 인사를 할 참이었다. 가기 전에 국회의원 친구에게 연락했더니 그러더라. 자존심 상할 거라고. 의원회관 방 30개 정도를 돌았는데 사전 약속하고 간 의원 네명 정도만 만났고, 나머지는 자리에 없어 그냥 명함만 놓고 왔다. 그런데 자존심은 하나도 안 상했다. 만약 내 이익을 위해 구걸하거나 내 비리를 은폐하기 위해 청탁하려 했다면 자존심이 상했겠지만, 공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상암 DMC 단지에 짓고 있는 새 청사는 어느 정도 완성됐나. =공정률 70% 정도다. 이곳 예술의전당에 있는 사무실이 총 1300평 정도인데 그중 필름 수장고가 650평 정도다. 상암에선 지상 4층, 지하 1층 건물을 단독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연면적이 2998평이고, 수장고는 323평이다. 수장고는 이원화 원칙에 따라 이쪽에 일부를 남기게 된다. 내년 4월에 입주하게 되는데 박물관이나 영상열람실 등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것은 9월부터일 것 같다.

-새로운 시설이 많이 들어서나. =기본적으로 4층에는 수장고, 3층에는 사무실, 2층에는 영상열람실, 1층에 박물관을 두고 지하에는 극장 2개관과 다목적 공간을 만들게 된다. 영상열람실은 디지털 아카이브 시스템을 구축해서 DVD를 일일이 플레이하지 않아도 서버에서 파일을 가져와 볼 수 있게 된다.

-박물관에서는 무엇을 전시할 계획인가. =현재 공간분할과 수집 대상에 관해 외부에 용역을 맡겨놓은 상태다. 전체 공간은 250평이지만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건 200평 조금 넘는 정도라 그리 넓은 편은 아니다. 결국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내 생각에 너무 고색창연한 분위기는 아니라고 본다. 박물관을 찾는 가장 큰 비중이 학생과 가족이라는 점을 고려해 영화제작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은 필수적이고, 최근의 한국영화 붐과 요즘의 트렌드를 따라갈 수 있는 공간도 있어야 한다. 영상자료원은 영화 전문가와 애호가를 위한 공간이지만, 박물관은 대중과 접점을 이루는 곳이어야 한다고 본다.

-극장은 어떻게 운영할 생각인가. =310석짜리와 150석짜리 상영관이 있고, 80석가량 되는 복합공간이 있다. 얼마 전 공사 중인 건물에 가서 310석짜리 극장을 보는데 한숨이 나오더라. 객석을 어떻게 다 메우지, 하면서. 기존의 프로그램도 계속하고 여러 가지 기획전도 야심차게 하겠지만 310석은 고전영화만 상영하기에는 너무 크다. 그래서 생각해보니 소규모 영화제를 열기에 아주 좋은 공간인 것 같다. 환경영화제나 여성영화제에 관련해봤지만 항상 극장 잡는 게 골칫거리였다. 여기는 그런 행사에 딱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번듯한 공간이 생겼으니 국제필름아카이브연맹(FIAF)의 회원국들과 본격적인 교류전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간 개관 행사는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영상자료원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일은 발굴과 복원인 것 같다. =발굴은 전임 이효인 원장이 정말 열심히 한 분야다. 잘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복원이 문제다. 복원에 쓸 수 있는 1년 예산이 1억2천만원인데 흑백영화 한편을 대충 복원하는 데만 700만원이 든다. 우리가 갖고 있는 필름이 3600편인데 모두 복원하려면 200년 정도 걸린다는 얘기다. 내년에 디지털아카이브 시스템이 구축되면 인화, 세척, 검수 등 장비를 갖추게 돼 복원 속도는 약간 빨라지겠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사실 영상자료원의 연구 작업은 활발한 편인데 눈에는 잘 안 띈다. =유럽여행 때 박물관을 많이 찾았는데 기념품점에 들를 때마다 지적 욕구가 충만해져서인지 뭔가를 사게 되더라. 우리는 뭘 놓고 팔 것인가, 했을 때 가벼운 포켓북 형태의 책자가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 영화사의 개념도를 그릴 수 있는 쉽고 대중적인 형식의 시리즈 도서를 고민 중이다.

-EBS 영화 프로그램 <세계의 명화>를 진행한 경험도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냥 소설만 썼으면 영화쪽에 대한 관심이 오랫동안 벌어졌을 텐데 1년 반 동안 진행한 덕에 영화도 보고 자료도 보면서 관심이 연결된 측면은 있다. 그보다 나는 이 일이 <씨네21>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라는 콘텐츠를 이용해 대중과의 접점을 찾아내기 위한 뭔가를 기획한다는 점이 말이다.

-글쓰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마음만 먹으면 병행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마디로 말해 글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도 여기에 전력투구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그리고 이 일이 밤에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헐렁하지 않다.

-구상 중이던 장편소설은 무엇인가. =역사적인 소재를 다룬다는 정도만 말하겠다. 사실, 이미 자료가 되는 책을 6개월 동안 30권 정도 읽었다. 3년 뒤에 모두 다시 읽어야 한다는 점이 가장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원장 취임 인사말에서 유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이 밝힌 이유는 무엇인가. =후배 중 이영미라고 음악평론가가 있는데, 그 친구도 그 얘기를 하더라. 그건 내 결벽증이다. 나로서는 소설 쓰다가 공직에 나온 게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칠까 신경이 쓰인다. 누군가는 내가 이제부터 권력 주변을 전전할 것이라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계속해서 소설을 쓰겠다고 사람들에게 분명히 말하고 싶었다. 하고 싶은 공부도 있다. 장편소설을 먼저 쓰고 대학원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 계획이 3년 밀린 것이다. 공직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