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은 때때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캄보디아의 비포장도로 위에서 예닐곱 시간을 시달리다 타이의 포장도로로 넘어오면서 생각했다.
길가의 집들은 여전히 오두막 같았고, 길 위의 아이들도 여전히 구걸을 하고 있었지만, 열대의 태양이 저물어 더위가 한풀 꺾인 만큼 가난도 기세가 꺾인 듯 보였다. 캄보디아의 시엠립에서 타이 국경까지 예닐곱 시간을 달리면서 내내 궁금했다. 과연 국가는 국민의 삶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까. 캄보디아에서 타이로 넘어가면 풍경이 얼마나 다를까. 끝없던 가난의 풍경이 국경을 넘어서면서 조금은 바뀌었다. 여전히 오두막이었지만 그래도 집들은 튼튼해 보였고, 도로는 포장돼 있었다. 갈증에 시달리다 국경을 넘어서 편의점으로 달려가 생수를 사고, 우유를 사면서 생각했다. 역시나 개발은 선인가. 캄보디아의 국경마을에서 타이의 국경마을까지 거리가 캄보디아의 국경마을에서 시엠립까지 거리보다 가깝지는 않은데, 국경은 그렇게 풍경을 바꾸고 있었다. 국경에서 목격하는 차별의 풍경은 아메리카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캄보디아에서 타이로 일하러 넘어오는 캄보디아인들은 입국심사대에서 일일이 지문을 찍었다. 옆줄에 늘어서 있던 어떤 외국인도, 어떤 타이인도 입국을 위해 지문을 찍지는 않았다.
“강이 있느냐, 바다가 있느냐?” 캄보디아 시엠립의 바에서 일하는 청년은 물었다. 남한과 북한 사이에 어떤 자연적 장애물이 있느냐고 청년은 물었다. 강도, 바다도, 산맥도 없다고 답했다. 남과 북이 어떻게 나뉘어졌는지 짧은 영어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해방 뒤에 남쪽은 미국이, 북쪽은 소련이 점령하면서 분단이 됐다고 답했다. 청년은 또다시 물었다. “정말로 다행 아니냐?” “코뮤니즘” 코리아에서 태어나지 않고, “리퍼블릭” 코리아에서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고, 청년은 말했다. 어쨌든 ‘사회주의’를 내세운 정권하에서 인구의 10%가 죽어나간 나라의 인민에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위한 변명은 사치로 느껴졌다. 북한의 빈곤에 절반의 책임은 미국에 있다고, 감히 말하지 못했다.
청년은 코리안 드림도 꾸었다. 친구가 한국에서 일했는데, 자기도 언젠가 한국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프놈펜에서 태어났지만, 일자리를 찾아서 시엠립까지 왔다는 청년에게(앙코르 유적의 배후도시인 시엠립은 외국인 관광객 때문에 그나마 일자리가 있단다)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이 어떤 차별을 겪는지, 남한의 물질적 풍요가 왜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지, 감히 말하지 못했다. 다만 능력이 부족해 남한에 이주해 일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못하는 자신이 송구할 따름이었다.
방콕에서도 “남이냐, 북이냐” 질문을 받았다. 한적한 수영장 주변에서 친구들과 노닐고 있었다. 지나던 백인이 물었다. “너희는 남한에서 왔니, 북한에서 왔니?” 북에서 왔다고 농쳤다. 그는 “말투를 들으니 아닌데” 하더니 북에 대해 ‘험담’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북한이 핵실험을 하겠다고 선언한 다음날이었다. 그가 서양 언론이 재연하는 북한의 악마적 이미지를 입으로 되뇌자 생각지도 못한 짜증이 치밀었다. 김정일 정권이 싫지만, 김정일 정권을 욕하는 백인을 만나니 “이건 아니잖아” 피가 거꾸로 솟았다. 고작 나의 질문은, “너, 미국 출신이냐?” 그는 “남아공에서 태어났다”고 답했다. 미국인도 아니면서 왜 이러셔, 잠시 째려 보았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김정일 정권을 미워하면서 동포의 고통에 가슴 찢어지는 슬픔을 전하지 못하고 가슴만 끓였다. 그것은 그에게 이해받기 힘든 슬픔이었다.
어쩌다 외국을 다니게 되면서, 생각을 조금은 바꾸게 되었다. 옌볜에서 화장실의 불편함을 참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에어컨이 없으면 동남아의 더위를 견디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깨달았다. 평생 생태주의자가 되기는 글렀군. 자발적 가난이 아름다울 수는 있으나, 강요된 가난은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고, 혼자서 되뇌었다. 그리고 농담 삼아 슬로건도 만들었다. ‘소비로 제3세계 인민을 도운다!’ 저토록 거대한 불평등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것밖에 더 있느냐고, 동남아에 가면 쇼핑을 일삼고 몇푼의 팁을 건넸다. 물론 이것은 무기력의 표현이다. 그러니 제발 남이냐, 북이냐 묻지를 말아라. 가슴만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