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해 2만명이 넘는 초·중·고 학생이 해외유학을 갔다. 2004년까지 63곳이던 논술 학원은 2006년 6월 현재 465곳으로 폭증했다. 고교 교사의 71.5%가 학교에서 논술 지도를 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논술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의 70.3%는 사교육을 통해 배운다. 이중 절반은 초등학생이다. 그리고 지난 한해 115명의 초·중·고등학생이 자살했다.
최근 국정감사에서 나온 교육 관련 자료 중 몇몇 사실을 몽타주해봤다. 이 우연의 파편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한다면 거기에 무슨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논술과 계급’이란 제목을 붙여 보니 모두 3개의 작은 이야기가 나온다. 첫 번째 스토리는 매우 낯익은 집단적 백일몽이다. 요즘에도 간혹 이 꿈 이야기는 ‘내 새끼 하바드 보내는 법’이란 타이틀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기도 한다. 과거 전 국민이 다 함께 못살던 시절 교육은 ‘팔자를 고치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 명문대에 입학하기 위한 경쟁의 조건은 비교적 평등했다. 고급과외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수혜자의 수가 대세가 아니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안 됐다. 그래서 종종 “포장마차 편모 아들 서울대 수석” 같은 기사가 나가면 온 국민이 감동먹었다. 그건 내 자식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꿈을 공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요즘도 교육은 빈자들에겐 무구한 꿈이다. 하지만 이 꿈은 좀체 성공담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요즘은 ‘팔자 고치기’ 백일몽을 ‘팔자 지키기’ 성공담이 대체했다. 명문대로 들어가는 길은 진입장벽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명문대 가려면 특목고 가야 하고, 그러려면 초등학교 때 과외를 시작해야 한다는 소리도 있다. 물려받은 지능지수나 성실성도 중요하지만 부모의 지원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논술의 비중이 높아졌다. 이건 무얼 의미하는가? 내가 봐왔던 논술문제는 평균적인 고교 교사가 지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런 문제도 있었다. 장 보드리야르를 비롯한 4명의 인문학자의 글을 지문으로 주고, 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주제를 한국사회와 연결시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라는 것. 지문을 이해하지 못하면 접근조차 안 되는 문제였고, 지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인문학적 소양이 있어야 되는 문제였다.
논술을 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다면 사교육이 떠맡게 된다. 그렇다면 사교육은 특별난 비결이 있는가? 내 생각에 논술 교육은 인문 사회과학적 소양이 뛰어난 선생에게 장기적으로 받지 않으면 별 효과가 없다. 교육의 속성 자체가 귀족적이다.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논술 학원의 강사들이 이 조건을 충족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부모들은 답답해서 논술 학원을 찾게 된다. 논술 교육의 효과는 당장 검증이 안 되는데, 그게 이들에게는 오히려 약이 된다. 결국 소수의 좋은 선생을 오래 독점할 수 있는 일부 능력있는 부모들이 자식들의 논술 교육에서 승자가 되는 시장이다. 나머지는 저마다 ‘전문가’를 외치는 논술시장의 구라꾼들에게 자신의 불안에 대한 마취제를 맞는 대가로 꼬박꼬박 할부금을 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런 질문이 하고 싶다. 과연 현행의 논술이 종합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배양하는 데 도움이 될까? 대학은 왜 논술문제를 어렵게 내려고 안달하는 것일까? 행여 인문 사회과학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면 종합적인 사유가 가능하다는 지식 물신주의에 함몰돼 있는 것은 아닐까? 성적이 높으면 의대부터 가고 교수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외치는 현실(그건 자본의 논리가 첨예해지면서 교육이 생존 경쟁의 장으로 변질됐다는 것을 의미한다)에서 논술은 다만 대학진학 과정에서 승자를 결정하는 기준을 능력있는 자들에게 좀더 유리하게 해주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건 명품 물신주의가 교육을 잠식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의 논거로 절대 배제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대책없이 추락하는 아이들의 체험수기이다. ‘논술과 계급’의 세 번째 에피소드가 될 이 체험수기의 제목은 ‘저 혼자 힘으론 불가능했어요’가 될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가장 절실한 논술문제는 별다른 인문학적 소양 없이도 답할 수 있는 질문이다. 논술을 논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