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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엔 ‘배우고시’도 있었다
이영진 2006-11-01

진짜 목적은 ‘빨간 배우’들을 잡아내기 위한 정부의 단속

어럽쇼. 놀람도 잠시다. 곳곳에서 한숨이 터져나온다. 1950년 2월6일. 서울 시내 을지로 국도극장. 600여명의 수험생들이 예상외의 시험문제를 받아들고 고전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한 현 국제정세에 대해 논하시오.” 10여분쯤 버텼을까. 강남춘씨는 감독관의 눈을 피해 슬쩍 옆눈질을 해보는데 저편도 끙끙거리는 건 마찬가지다. 짐짓 태연한 얼굴로 연필을 깎아도 보지만 막막함이 가시진 않는다. 목구멍이 걸린 시험인데 배짱 좋게 백지를 낼 순 없는 일. 지린내가 진동하는 극장에서 시험 종료까지 엉덩이 붙이고 버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혹시 아나. 하늘이 도울지.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 치러졌던 한 자격시험장 풍경이다. 도대체 무슨 시험이기에 응시자들이 저토록 당황했던 것일까. 국제정세에 대한 거창한 질문만 놓고 보면 필시 법관 아니면 외교관, 그것도 아니라면 교사 자격시험 정도였을 것이다. 아니, 그런데 저 수험생들의 수군거림은 뭐란 말인가. 이른바 국가고시였다면 답안을 써내려가기 바빴을 텐데 말이다. 이쯤에서 털어놓자. 국제정세에 대한 논술은 바로 배우 자격시험 문제였다. 믿기는가. ‘딴따라’가 되기 위해 시험을 봐야 했던 시절이. 이 시험을 정부가 주관했다는 건 더더욱 놀랍다.

‘가슴조리는 배우, 어제 자격심사를 개시-우리나라 처음의 배우시험’이라는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서울에서 활동하는 현역 예술인들을 중심으로 무대예술원 산하 모두 889명의 배우가 응시했다. 이중 무시험 합격자 246명을 제외한 600여명이 1차 시험을 봤다. 배우들을 뜨악하게 만든 시험문제를 좀더 보자면, “선전계몽에 대한 연극인으로서의 각오”를 쓰라는 논술형과 “유엔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4대절”, “우리나라의 국호”, “일민주의(一民主義)” 등을 묻는 단답형이 있었다. 이중 공보처와 시청이 출제한 문제는 그렇다 치자. 무대예술원이 낸 문제 또한 ‘민주주의’였다.

“무대 위에서는 관객을 울리고 웃기기에 제법 활개치던 친구들도 시험만은 딱 질색인 양 엉거주춤 불안스러운 표정이 약간 우습기도 하다”, “여배우에 있어 초등학교도 못 나온 사람이 있어… 결과가 주목된다”. 선망과 질시는 본디 한몸인가보다. 언론은 대중을 위해(?) 저잣거리의 부러움을 사던 배우들의 고난을 줄기차게 써댔다. “상식없는 배우들 동문서답의 필기시험-거의 대부분이 낙제점수”라는 며칠 뒤 기사는 “최고 득점자 2, 3명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중략)… 60점 이하라는 놀라운 낙제 점수를 보여 채점 관계자로 하여금 한숨을 쉬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한숨 섞인 답안이니 한숨 섞인 채점일 수밖에.

최초의 배우 시험이라고 불렸지만, 이러한 유형의 콘테스트가 처음은 아니다. 1946년 11월22일에도 고려영화협회에서는 신인배우를 모집하고자 최인규 감독 등 4인의 심사위원이 참석한 선발대회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도 유사한 사회상식 문제가 출제됐다. ‘UN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기독교여자세계대회’라는 답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것은 공산당주의’라는 답변, ‘(남한의) 쌀은 어찌하여 부족한가’라는 질문에, ‘민족반역자, 친일파, 모리배들이 일본으로 밀수출해서 없을 것이다’라는 답변 등이 세간에 알려져 뒷담화를 낳았다.

더 거슬러 일제시대에도 희한한 배우 시험이 있었다. 1943년 현대극장에 입단한 뒤 이후 신필름의 프로듀서로 활동했던 황남씨는 “일제 말기 때는 지금으로 치면 군보도부에서 연예계를 다뤘어. 그래서 연예인은 전부 시험을 치러라, 서커스단에서부터 영화인, 연극인, 악극인, 무용인, 하여튼 연예인이면 전부 시험을 치러라. 그러면 자격증을 준다. 거기 합격한 사람은 징용을 면제해주마 그랬다고… (중략)… 부민관에서 1300명 가까이 놓고 시험을 쳤는데…”라고 전한다. 그때도 질문은 “명치천황은 뭐를 했느냐”, “일본은 왜 전쟁을 하고 있느냐, 지금 어디서 뭘 하느냐” 등이었다.

배우가, 배워야, 배우지, 라며 치른 엉뚱한 시험들에는 모두 의도가 있었던 셈이다. 1950년의 자격시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미 상당수의 배우들이 월북을 했거나 좌파 예술단체들이 미군정의 탄압 때문에 이미 해체 기로에 있던 상황에서 혹시 걸러내지 못한 ‘빨간 배우’들을 잡아내기 위한 이념순화 목적의 최종 오디션은 아니었을까. 참고로 정부의 딴따라 단속은 ‘상식없는 배우’들이라는 매도에서 그치지 않았는데 1950년 2월15일에는 정부 당국이 직접 팔 걷어붙이고 나서 “아편쟁이, 캬란테(개런티) 사취 상습자, 주정뱅이 등 예술인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불순자”들을 구속했다. 예상된 수순이었다.

참고자료 <신문기사로 본 한국영화> <한국영화를 말한다-1950년대 한국영화>(이상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