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문화적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송현숙 감독에게선 자연스러운 예술욕이 엿보인다. 1972년 간호사로 독일에 파견된 그녀의 삶에 그림이 찾아들었고 이를 계기로 영상물 연출에 손대게 됐다. 40여번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연 화가이자 세편의 다큐멘터리를 필모그래피에 올린 영화감독인 그녀에게 이번 가을은 유독 인상적인 시기가 될 것 같다. 10월27일부터 11월9일까지 서울 소격동 학고재에서 개인전을 여는 한편 첫 작품인 <내 마음은 조롱박>으로 제2회 재외동포영화제 ‘월드 코리안의 목소리’ 부문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 사진 촬영은 고역이라던 그녀는 자신의 그림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연신 손사래를 쳤다.
-그림은 어떻게 그리게 됐나. =독일에서 3년 계약이 끝나고 4년째부터 정신병원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환자들에게 기술이나 그림을 가르치는 것을 보니 나도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당시 그림일기를 작성했는데 글은 간단히 쓰는 대신 향수를 느낄 때면 시골집을 그린다든지 해서 그때 느꼈던 심정을 표현했다. 일을 하면서 미술학교를 다녔는데 이후 일년 동안 결핵을 앓으면서 그림쪽에 더욱 매진하게 됐다. 그 결과 1982년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고 장학금도 받았다.
-재외동포영화제에 <내 마음은 조롱박>을 출품한 계기는 무엇인가. =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으로 친분이 있었던 최선주 감독이 제1회 때 작품을 출품했고 그것이 인연이 됐다.
-<내 마음은 조롱박>을 찍은 이유는 무엇인가.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오빠가 전기 감전으로 돌아가셨다. 그 때문에 시골에서 굿도 하고 그랬는데 그런 장면들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독일에는 영화인이 아니어도 영화 제작을 지원해주는 위원회가 있다. 그곳에 신청서를 제출해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그림을 그리면서 내가 속한 배경이나 문화를 그림에 쏟아붓는 걸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무속의 세계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한국의 전통 가옥이라든지 문화가 스며 있다. 한국에선 사람이 죽으면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먹고 마신다. 반면 독일 사람들은 한밤중에 가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도 아침에야 고인을 보러 병원을 찾는다. 그런 것이 나에게 문화적 충격이었다.
-헤센주 영화상도 수상했다던데 관객의 반응은 어땠나. =대부분의 다큐멘터리들이 장면 장면에 대해 세세히 설명하려 하지만 <내 마음은 조롱박>은 설명이 거의 없다. 그래서 내레이션이 부족하고 상영시간이 길다며 TV 방송국에서는 안 사가려 하더라. 반면 다큐멘터리임에도 예술적인 측면을 잘 살렸다는 호평도 있었다.
-내레이션은 자신의 목소리인가. =기계 앞에서 말하는 것이 힘들었다. <내 마음은 조롱박>은 내가 직접 쓰고 읽었는데 두 번째 작품인 <회귀>는 다른 분에게 내레이션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그걸 읽으려니 너무 어색하더라. 영상의 내용은 전라도인데 내레이션을 작성한 분이 서울 출신이라 맞지 않았다. 결국 내 것으로 다시 녹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