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빈민가를 무대 삼은 영화 <시티 오브 갓>에서는 열살이 안 된 (남자)아이들도 총질을 해댄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아이에게 총을 겨누는 또래가 선심 쓰듯, “손을 쏠까, 발을 쏠까?” 묻는다. (원고 써서 먹고사는) 나 같으면 발을 쏘라고 할 텐데, 아이는 망설임없이 손을 내민다. 뛰고 도망치는 거리의 인생이니 손보다 발이 중요할 것이다. 상대방에게 의미있는 신체 부위에 대한 훼손은 효과적인 모욕이자 보복 수단이다. <타짜>의 도박사들은 손가락이 잘리고, <왕의 남자>에서 왕은 연적의 눈을 빼앗는다. 눈은 ‘보는 자’로서 남성 섹슈얼리티, 다시 말해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시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거세 공포의 변형으로 보았다. 근친상간으로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에 시달리던 오이디푸스 왕은 자살한 왕비의 브로치로 자기 눈을 찔러 죄의 대가를 치르고자 한다. 스스로 거세를 수행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입각한 남성 논리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해석은 오이디푸스 서사의 어머니 살해 동기를 은폐하고 있긴 하지만, 가부장제 사회의 군사주의와 남성 섹슈얼리티의 쌍생(雙生)을 폭로한다.
‘몸이 천냥이면 눈이 900냥.’ 이 말은 전통사회의 논리가 아니라 근대적 담론이다. 시각이 다른 감각보다 특권적 지위를 갖게 된 것은 개인(남성)이 인식 주체로 등장하기 시작한 근대 이후의 일이다. 사실 두뇌, 입, 손발은 모두 같은 몸인데도,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거나 조직에서 개인의 위치를 표현하는 ‘우두머리’, ‘수족’은 신체 기관이 위계화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어느 토론회에서 만난 공군 장교는 내게 자주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한·미동맹의 본질을 “우리 군대는 눈없는 몸뚱이나 마찬가지죠. 까막눈이란 말입니다. 미국이 우리 눈이에요”라고 말했다. 군사작전과 관련한 모든 판단과 지시는 미국이 하고, 한국군은 그들의 수족에 불과하다고 분개했다.
주지하다시피 현대전쟁은 백병전(白兵戰)이 아니라 정보전, 공중전이다. 백병(hand-to-hand)전은 말 그대로 몸으로 하는 육박전으로, 중세기까지 전쟁은 거의 백병전이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무기가 인간의 몸을 ‘떠나’ 인간의 조종 대상이 되면서, 전쟁의 고통은 더욱 은폐되고 관념화되었다. 이제 전쟁은 근육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첨단 무기들간의 경합을 뜻한다. 그로 인해 사람이 죽고 다치는 것은 군사 용어로 ‘부수적 피해’(콜래트럴 데미지)일 뿐이다.
주한미군 철수시 전투력 공백을 자력으로 메워야 한다는 자주국방론은 ‘불가능한 임무’다. 미·일동맹이든, 한·미동맹이든 지금 모든 동맹은 말이 동맹이지, 핵심 전력은 미국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방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군은 육군 중심이지만, 자국 영토가 아니라 전세계를 (침략)대상으로 하는 미국은 공군, 해군 중심이다. 주한미군의 핵 역시 공군이다. ‘적의 도발’을 감지할 수 있는 C4I(Command & Control, Communication, Computer and Intelligence), 즉 지휘, 통제, 통신, 컴퓨터, 정보 등 전장(戰場) 감시체제와 관련 기술력은 모두 미군이 장악하고 있다.
미군이 철수하든 안 하든, 전시작전권이 이양되든 안 되든, 한·미동맹은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 아래 지속된다. 현대전의 중추인 ‘두뇌와 신경에 해당하는’ 공중조기경보기, 에이왁스(AWACS) 같은 장비를 미국이 ‘전세계 평화를 위해’ 각국에 나눠줄 리 없다. 그렇다면 ‘협력적 자주국방’을 위해 우리도 미국에 버금가는 군사력을 갖춰야 할까? 한국 공군이 차세대 전투기로 선정하여 지난해부터 배치한 미국산 전투기 F-15K 한대 값은 1천억원이고, 한국형 구축함 KDX-Ⅲ 한대 만드는 데는 1조500억원이 소요된다. 북한이든 주변 강대국이든 누군가가 우리를 위협하고 있고, 이는 물리력으로 격퇴되어야 한다는 힘의 논리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믿는 한, 돈 많이 들어가는 ‘자주’의 딜레마는 계속될 것이다. 문제는 북한이나 ‘적’이 아니라, 강자의 게임의 법칙을 따라야만 살 수 있다는 상상된 신념 그 자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