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나리오에서 나쁜 영화가 나올 수는 있지만 나쁜 시나리오에서 좋은 영화는 나올 수 없다는 게 구로사와 아키라의 격언만은 아니다. 충무로에서는 매일 이 격언을 뼈저리게 각성하고 확인한다. 시나리오라는 영화의 설계도가 튼튼하지 않으면 공사는 부실해진다. 그만큼 시나리오작가는 영화라는 꿈 공장의 핵심 인력이며 꿈 공장의 지휘자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충무로는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거나, 아니면 소설과 만화 원작을 사서 각색하면서 시나리오작가가 쓴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홀대하고 있다.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차이나타운>의 로버트 타우니의 치밀함, 신화화되고 있는 찰리 카우프만의 천재성, 낮에는 타워 레코드 가게에서 일하고 밤에는 시나리오를 쓴 끝에 할리우드에 충격을 안긴 <쎄븐>의 앤드루 케빈 워커의 집요함 같은 얘기들이 충무로에선 잘 들리지 않는다. 걸출한 작가를 만드는 건 작가 본인이기도 하지만 환경이기도 하다.
언뜻 보면 감독들만이 빛나 보이는 충무로라는 별자리는 모든 스탭들이 함께 힘을 모아 빛을 발하는 곳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시나리오작가들이 만든 꿈의 설계도가 있다. 잘 알려졌지만 미처 소개할 틈을 얻지 못한 작가들, 지속적으로 좋은 시나리오를 쓰는 젊은 작가들을 만났다. 쉬지 않고 꿈을 찍어내는 이들 꿈의 공장장을 모아 어떻게 영화를 하게 됐는지, 어떤 작품을 썼는지, 시나리오를 어떻게 쓰는지 등을 물어봤다. 그리고 그들에게 공통된 한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그건 ‘막힐 때 어떻게 뚫느냐’였다. 그러나 그건 우문이었다. 시나리오작가가 혼자 많은 밤을 지새며 골몰하는 건 사실이지만 PD, 제작자, 감독, 스탭들과 끝없는 수정 회의를 거치고 촬영현장의 숨결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우문에 작가들은 나름의 현답을 주어 시나리오가 어떻게 태어나 세상에 나오는지를 가늠하게 해주었다.
<왕의 남자> <라디오 스타>의 최석환 작가‘뻬빠’로 영혼을 문대고, 죽을 똥을 싸다보면
출신 성분이 저마다 다르겠지만 토목과를 나온 인터넷 회사 이사 출신의 시나리오작가가 흔치는 않을 것이다. <황산벌> <왕의 남자> <라디오 스타>의 최석환 작가는 이준익의 씨네월드, 조철현의 타이거픽처스, 정승혜의 아침, 세 회사의 영화 하부구조를 설계하는 시나리오 건축가다. 조철현의 기상천외한 아이디어가 청사진으로 시작되어, ‘절창을 만드는 데 재주를 보인다’는 짜임새있는 최석환의 시나리오로 이어져, 이준익의 경륜을 만나며 빛을 발하는 게 최근 ‘씨네월드 그룹’의 영화 제작공정이다.
늦깎이 이력이지만 할리우드 키드로 자랐다. 서울 삼양동 토박이인 그는 초등학교 때 대지, 미아, 삼양극장을 전전하며 영화에 열광했다. 영화 포스터를 붙인 대가로 복덕방이나 구멍가게에 나눠준 영화표를 친구 아버지가 가로채서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때로 의미없는 악행이 선행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중·고교 때 개봉영화를 섭렵했고 대학 들어가서는 실험영화를 만들어볼 정도로 의식이 웃자랐다. 어설프게 충무로에서 제작부 막내 비슷한 잔심부름도 해봤다. 그러나 영화를 해보고 싶은 생각까지 들지는 않았다. 마침 SBS에서 들어온 아르바이트를 덜컥 물었고 라디오작가를 하게 됐다. 여기서의 에피소드는 알알이 <라디오 스타>에 녹아들었다. 자유롭고 돈도 넉넉히 주는 라디오작가 생활을 뿌리치기는 힘들었지만 전공을 살려 건설회사에 들어갔다. IMF 뒤엔 친구, 선후배와 함께 인터넷 회사를 차렸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 ‘네가 원하는 게 뭐냐’는 물음이 들렸다. 대답은 영화였다.
훌쩍 서른다섯이 되어 연출부 막내 자리를 찾는 그를 모두가 만류했다. “할 수 있는 게 시나리오 쓰는 일밖에 없었어요. 그건 결과로 보여줄 수 있는 거니까.” 그리고 붙드는 회사 동료들에게 2주의 말미를 얻어 시나리오를 하나 썼다. 가리봉거리의 세곳의 도장 이야기로 <무림지존>. 훗날 <김관장 대 김관장 대 김관장>이 되는 영화의 원작이다.
어떻게 2주 만에 첫 시나리오가 써졌고 팔렸을까. “전혀 배운 경험이 없다. 나에게 이야기꾼 재질이 있었던 듯하다. 몇편의 시나리오를 보고 이렇게 쓰는구나, 포맷을 알았다.” 평범한 시나리오 지망생을 낙망케 하는 이야기다. <달마야 놀자>의 오승현 PD가 작가를 찾는 조철현 대표와 연결을 해줘 <황산벌>을 함께 쓰면서 진짜 작가 생활이 열렸다. 이런 영화를 충무로에서 하다니, 라는 놀라움 속에서 일을 했고 그 뒤로 육상효 감독과 <달마야, 서울 가자>, 그리고 현재 <라디오 스타>에 이르기까지 이준익-조철현과 꾸준히 일을 했다. 이준익 감독은 “너 다른 데 가면 ‘뽀록’나”라며 반어법으로 그에게 신뢰를 보냈고 최 작가는 “우리는 착한 게 경쟁력”이라며 엉덩이를 굳건히 씨네월드에 내렸다. 그는 <왕의 남자> 수천신을 써내려가며 시나리오는 쓰면서 알게 된다는 믿음을 확인했다. “수영 마스터하기 전에 물에 안 들어가겠다는 건 우스운 결심이다.” 그의 말대로 “‘뻬빠’로 영혼을 문대는” 격렬한 회의와 ‘죽을 똥을 싸는’ 산고 속에서 시나리오가 탄탄한 구조를 얻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시나리오 쓰기 계명을 물어보자 최 작가는 ‘별님 달님 이야기’를 들었다. 도발적 사건(산길에 호랑이 등장)-발전적 전개(엄마의 팔부터 온몸까지 먹어치우기)-위기(아이들을 향해 달려가는 호랑이)-클라이맥스(털이 북실한 손을 내밀자 아이들이 도망간다)-반전(하늘에서 호랑이에게도 동아줄이 내려온다)-정서적 만족(별님 달님이 되는 아이들). 단순한 해피엔딩이 아니라 엄마를 잃는다는 원형적 슬픔을 바닥에 까는 것까지 별님 달님 이야기는 시나리오가 갖춰야 할 모든 계명들을 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막힌 대목, 이렇게 뚫었다!
회의를 통해 답을 얻는다
“<왕의 남자>에서 처선이 장생을 풀어주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풀어준다고 장생이 나가면 이야기가 안 된다. 왕한테 들이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낫을 들고 해코지를 해? 반란군에 들어가? 방법이 안 떠올랐다. 45일이나 꼭 막혀 있었다. 경주에서 스탭과 회의를 했는데 스크립터 김미정이 ‘날 밝으면 용마루에서 줄 치고 사설 치는 거 아녜요?’ 하더라. 바로 그거였다. 논리상으론 장생이 궁궐 안으로 들어온다는 게 말이 안 되지만 사설을 듣는 연산군의 표정을 통해 정서적으로 그 개연성의 틈을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