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6월22일. 오전부터 종로경찰서는 비상이 걸렸다. 시내 경운정(현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강당에서 일어난 정체 모를 괴화(怪火) 때문이었다. 오전 9시께 일어난 불은 천도교 조직부 최모씨가 일찌감치 발견해 크게 번지지 않았지만, 경찰은 “배후에 정치적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수사를 진행했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익 갈등이 극에 달하던 상황이었다. 1945년 말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는 <동아일보>의 명백한 오보로 불붙기 시작한 좌와 우의 대치는 그야말로 ‘전쟁’ 수준이었다. 어느 쪽이 먼저든 린치에는 보복이 뒤따랐다.
천도교 방화 미수 사건을 두고 경찰이 정치적 배후를 의심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방화사건이 일어나기 아흐레 전인 1946년 6월13일에는 국제극장에서 조선 제일의 희극배우 신불출이 인기만담 프로그램이었던 <실실사전>(失笑辭典)을 공연하다 “태극기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우익 청년들에게 린치를 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청색은 소위 우(右)요 적색은 좌(左)다. 그리고 팔괘는 연합국을 상징하는 것으로 조선은 좌우가 갈리우고 연합국은 언제나 주위에 있다. 또 미소는 전쟁을 하리라”는 재담(!)이 불씨였다. 우익쪽 행사들이 곧잘 열렸던 천도교 강당이 보복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틀 뒤인 6월24일, 의외의 방화 미수 용의자가 붙잡혔다. 교동초등학교 교사 자제인 김창근이라는 14살 소년이었다. 경찰은 “소년이 본래부터 불장난을 좋아하여 이전에도 4차례나 방화를 한 적이 있는” 변태적 기질의 소유자로, “흑인들이 백인 여자를 화형(火刑)하는 영화를 보고” 충동적으로 저지른 방화라고 결론내렸다. 대가리 보고 놀라면 꼬리 보고도 놀란다고, 경찰로선 ‘변태소년’의 모방범죄에 가슴을 쓸어내린 것이 쪽팔렸던 모양이다. 일주일 뒤, 경찰은 아예 미성년자 출입 엄금 조치를 내렸다. 적발시 극장쪽에 책임을 묻겠다는 엄포와 함께.
그러나 현실의 정치 공방은 린치에서 그치지 않았다. 테러로 번져갔다. 여운형, 김구 등이 연이어 암살됐다. 해방은 “모든 것이 가능할 것 같은”, 정치적 열정으로 가득했던 “광기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흥분의 도가니는 짧았다. 점점 핏빛 싸움으로 변질됐다. 극장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1945년 11월 전평 결성식 때 중앙극장에선 총격전까지 일었다. 1947년 1월10일 중앙극장 관중석엔 일제시대 사용됐던 수류탄이 던져졌고, 7월 부산극장 무대에선 다이너마이트로 만든 수류탄 2개가 폭발해 부상자를 냈다. 이에 앞서 3월23일 서울극장에서 ‘삐라’ 살포를 폭탄 투하로 오인해 관객이 아우성을 친 사건은 민중의 열정이 공포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폭력의 시대는 언어 또한 감염시켰다. 해방 직후 사라졌다가 “1945년 말 모스크바 3상회의를 기점으로 다시 범람하기 시작한” 삐라는 정치적 대결의 최첨병이었다. 미군정의 삐라 살포 금지 포고령은 소용없었다. 해충, 분쇄, 박멸, 참칭, 악질 떼마, 타도, 반동, 극악, 처단 등 당시 삐라에 주로 쓰여진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중재란 없었다. 협상도 불가능했다. 오직 아(我)의 선동일 뿐이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극장에는 정전을 틈타 삐라가 뿌려지는 일이 빈번했다. 서울뿐이 아니었다. 광주, 부산, 인천 등 전국의 극장에선 삐라 휘날리는 광경이 스펙터클하게 벌어졌다.
아이러니한 건 “당시 남한 민중의 문맹률이 80%에 달했다”는 점이다. 삐라를 읽을 수 있는 이는 고작 20%에 불과했다. 1946년 11월에 서울 시내 극장에는 이른바 종이 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용지갱생상자’가 설치됐는데, 이 또한 웃지 못할 상황을 짐작게 한다. “해방 직후에 찍어낸 각종 잡지들을 보면 당시의 심각했던 물자난과 힘겨웠던 경제사정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중략)… 재생 종이를 만드는 과정에서… (중략)… 기절초풍할 사실은 투박한 표면에 수상한 고춧가루가 점잖게 박혀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질가미(휴지)의 흔적이리라.”
극장에 휘날렸던 삐라에는 고춧가루가 없었을까. 혹 있었다면, 삐라의 고춧가루는 (정치)과잉과 (민생)결핍의 불균형의 흔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