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 ‘취향’이라는 것을 갖게 된 건 고등학교 때다. 갸우뚱한 일이지만, 생각해보니 음악이 아니라 워크맨이 먼저였다. 신의 부름이라도 받은 건지 ‘워크맨을 사야 한다’는 계시(!)에 사로잡힌 나는, 세뱃돈을 털어 얇고 새끈한 아이와를 장만했다. 거기서 하늘이 열렸다. 오른쪽 귀에서 왼쪽 귀를 옮겨 다니던 음이 뒤통수 한가운데를 내리치는 <Direct>(반젤리스) 앨범을 들으면서 스테레오의 묘미를 알게 됐다. 핑크 플로이드와 퀸을 처음 들은 뒤론 마음속에 신 같은 존재가 생기는 게 어떤 건지 깨달았다. 두근거리며 새로 산 테이프를 뜯어 일주일이면 달달 외울 정도가 되고, 그럼 다시 새 테이프를 샀다. 뭘 들어도 놀랍고,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율학습 시간을 기다리던 그때는, 어쩌면 내 생애 가장 순수했던 때였을 거란 생각도 든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테이프를 대충 정리하고 CD를 사기 시작했다. 음반을 사는 양은 더 많아졌지만 규칙적으로 음악을 듣는 일은 점점 줄어갔다. 취직하고부터는 그나마 판을 사러 갈 기회도 좀체 없어졌다. 어쩌다 레코드 가게에 들르면 쌓인 욕구를 풀기라도 하듯 한번에 10만원, 20만원어치씩 판을 사들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옛날처럼 정성껏 들을 수가 없었다. 사놓고 두번을 채 듣지 못한 새 판이 점점 늘어간다는 사실은, 내가 점점 음악을 물화(物化)시키고 있는 증거로 보였다. 8백장쯤 되는 판들은 전시품처럼 방 구석에서 시들해져갔다. 그렇게 좋아하던 음악이 ‘그저 있는가보다, 또 더 있는가보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되었음을 깨달았는데, 어쩐 일인지 슬프지도 않았다.
그리고 얼마전, LP를 틀어주는 바를 취재하게 됐다. 그 주인장들은 1만장, 2만장이라는 어마어마한 판을 매만지며 “무궁무진한 게 음악이에요. 아직도 못 들은 좋은 음악이 너무 많아요”라고 했다. 달관한 듯한 얼굴도 있었고, 아직 예민하게 촉각을 세운 얼굴도 있었다. 어느 얼굴이나 행복해 보였다. 그들의 틀어주는 음악을 듣고 있으니 내 가슴속에도 바람이 불어왔다. 아, 아직도 좋은 음악이 이렇게 많구나. 주저앉지 말고 더 걸어야겠다.
가을 바람이 말이다. 이렇게나 시원해서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