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의 취미는 기행문 모으기였다. 아마도 아버지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무역선 선장이었던 아버지는 일년에 두어달만 한국에 들렀지만, 그의 사진첩은 항상 거기에 있었다. 희망봉과 파나마 운하, 베니스와 디즈니랜드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면 자그마한 항구도시가 너무나도 갑갑하게 느껴졌다. 1980년대 중반.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지 않았던 그 시절, 저녁이면 울려퍼지는 애국가를 들으며 길거리에 멈춰서야 했던 10살 남짓한 아이들에게 ‘세계’란 ‘외계’였다.
기행문 모으기는 강박적으로 계속됐다. 아는 누나집에 있던 <김찬삼의 세계여행> 전집은 페이지가 닳을 때까지 읽고 또 읽었고, 용돈이 모이는 족족 초판 발행된 가이드북 <세계를 간다>를 사들였다(이 초판 가이드북을 지금 들여다보면 꽤 재미있다. 20여년간 세월이 너무 많이 변한 탓이다. 호텔값은 또 어찌나 싼지). 가이드북을 제외한다면 가장 좋았던 기행문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전규태가 쓴 <매혹의 라틴아메리카>였다. 문학 컨퍼런스에 참가하기 위해 라틴아메리카로 향한 그의 여행은 벅차게 아름다운 리우데자네이로와 아마존 강가에서 박동하는 기이한 삶의 흔적들을 유려한 필체로 담고 있었다. 좋은 기행문을 읽는다는 것은 황홀하다. 타인의 기억과 렌즈로부터 만들어진 흔적을 이미지의 연상으로 그리다보면 낯선 땅의 흙냄새가 발끝으로부터 슬그머니 비상한다. 그 아찔한 즐거움.
하지만 나는 더이상 기행문을 모으지 않는다. 기행문이 너무나 많은 탓이기도 하지만, 좋은 기행문이 잘 나오지 않는 탓이기도 하다. 거대한 서점의 여행서적 코너 앞에 서는 순간, 세상의 수많은 도시와 나라에 대한 젊은 여행자들의 여행기를 이리저리 훑어보며 얻는 교훈은, 종이값이 참으로 비싸다는 것이다. 무례한 표현이지만 용서하시라. 나는 열흘 남짓 다녀온 도시를 ‘완전정복’하거나 ‘매혹’당했다거나 ‘놀았’다는 책들이 왜 여행서적 코너에 있는 것인지 여전히 이해를 못한다. 누구나 책을 출판할 수 있는 지적-공산주의 시대를 사랑하지만, 값나가는 카메라로 찍은 도시의 골목들과 카페들의 사진으로 200페이지의 고급종이를 가득 도배한 뒤, 개인 블로그에 끼적일 만한 의미없는 아포리즘으로 남는 공간을 설렁설렁 채워놓은 책들을 1만∼2만원의 돈을 주고 살 의향은 없다. 이건 인터넷을 이용한 출판문화와 경박한 책읽기 문화가 만들어낸 한국적 현상일까. 그러나 현해탄 너머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일본 소년의 세계여행기를 하나 집어들었더니, 어쭈구리. 알아볼 수도 없는 사진에 유치원생적 아포리즘의 난동이다. 그쪽도 별수 없구나.
그러니까 이런 거다. 당신이 런던이라는 도시에서 한달을 지냈다면, 당신은 최소한 서너명의 사람들과 안면을 트고 지냈을 것이고, 최소한 다섯명의 꽤 재미있는 사람을 만났을 것이며, 최소한 서른명의 무례하고 몰지각한 영국 사람들의 목을 운동화 끈으로 졸라버리고 싶었을 것이며, (여행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였던) 여행의 동반자를 살해해 슈트케이스 안에 넣고 템스강에 집어던지는 상상을 몇번이나 했을 것이다. 사람 이야기만으로 원고지 1천장은 금세 찬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사람의 이야기다. 예쁜 골목을 배경으로 역광 아래서 찍은 그들의 셀프숏이 아니라 여행지에서 마주친 또다른 가난한 배낭여행자들의 미소다. 새로 산 지미 추의 스칼레토 힐에 담긴 그들의 발이 아니라, 걷느라 퉁퉁 부은 발가락을 숨긴 그들의 낡은 여행화(旅行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