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빡이, 사모님, 사랑의 카운슬러….
코미디 프로그램을 조금이라도 보는 사람이라면 실실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개그야> <웃찾사> <개그콘서트>(이하 개콘) <개그사냥> 등 개그 프로그램을 닥치는 대로 보는 나 같은 사람이 아니라도 이중 어느 프로그램 하나쯤은 보았으리라 생각한다. <9시 뉴스> 대신 ‘마빡이’를 본 뒤 십년 만에 웃어봤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니, 이제 개그는 정치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듯하다(하긴 <돌발영상>이란 희대의 다큐멘터리(?)도 있으니 정치는 개그라는 카테고리 안으로 이미 들어와 있는지도 모른다).
난 심야에 KBS에서 하는 <개그사냥>이란 프로그램을 즐겨보는데, 상당히 흥미롭다. 개그맨 지망생들이 팀을 짜거나 솔로로 출연해 짧은 콩트를 선보이고 기성 개그맨이나 작가들에게 냉혹하게 평가받는 과정 때문이다. 그들 중 몇몇이 <폭소클럽>이나 <개콘> 등에 투입돼 활약하는 모습은 심야 방송 마니아인 내게 쏠쏠한 재미를 준다. 하지만 이와 달리 재능이 없는 개그맨 지망생에 대한 선배들의 지적은 그야말로 차갑기 그지없다. 개그맨이 되기 위해 미국에서 날아온 한 지망생은 계속 그렇게 할 거면 보따리 싸들고 고향으로 돌아가란 얘기를 들을 정도였다. 난 열정은 많지만 어설플 수밖에 없는, 때론 공격당하거나 혹은 그냥 당할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완벽히 감정 이입해 가며 방송을 본다.
대학 졸업반 때 일이었다. 남들이 취직 준비를 할 때 나는 여행 준비로 바빴다. 여행만 갔다 오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되리라 믿을 만큼 철없던 시절이었다. 관건은 역시 돈. 그때 처음으로 매춘도 아니고, 매문(賣文)을 결심했다. 대학 때 써둔 단편소설 한편을 한 문학 잡지에 투고했다. 며칠 뒤 만나자는 답이 왔다. 우리는 명동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다. 왜 지체 높으신 어르신들은 호텔 커피숍을 선호할까, 하는 물음을 채 해결하기도 전에 나타난 60대 할아버지는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안 선생이라고 불러.”
분명 반말이었다. 직업이 선생인지 정말 궁금한 안 선생님은 ‘1천부도 팔리기 힘든 문예지의 현실’이란 주제로 강의를 시작하셨다. 요컨대 작품은 좋다, 하지만 더 필요한 게 있다는 것이었다. 돈이었다. 그는 자신의 잡지에 글을 실어주는 대신, 만원짜리 잡지 100권을 사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학생이니 50권만 사도 된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나이키 창고 대방출’에 버금가는 파격적인 할인가였다. ‘작가’라는 명함과 돈을 바꾸는 위인들이 제법 있다는 그의 말에 0.5초 정도 혹하긴 했으나 그렇게까지 해서 어디 있는지도 모를 ‘문단’이란 클럽에 가입하고 싶진 않았다.
막연히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스티븐 킹이 세탁소에서 일하며 열심히 글을 썼다는 일화까지도 낭만적으로 보였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게 작가로서의 생활고는 이제 낭만이 아니라 넝마처럼 느껴진다. 단순히 글쓰는 일이 좋을 뿐인 초짜 작가, 다시 말해 반(半)백수들에게 생활에 대한 유혹은 끝이 없다. 어떤 작가들처럼 낮에 다른 직장에 다니거나, 방송 DJ를 하지 않을 예정이라면 돈에 초연해지는 방법밖에 다른 건 없다. 세무서는 직장이 없는 내게 소득공제조차 해주지 않으니까. 이런 내게 얼마 전 또 다른 문예지가 또 한번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주었다. 내가 쓰고 있는 장편 연재소설을 1부 더 연장하고 싶다고 하자 그쪽에선 이렇게 말했다. “원한다면 소설을 실어줄 순 있는데 대신 고료는 드릴 수 없습니다.” 이번엔 0.1초쯤 혹했다. 하지만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란 인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난 여전히 돈이 없지만 그렇다고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 글을 쓰지도 않는다.
신(神)은 개그맨 못지않게 장난기가 많다. 어느 순간부터 신의 썰렁한 장난에 농락당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일 그의 장난을 강유미처럼 ‘짓궂군요!’하며 넘어갈 수 있다면, 김미려처럼 ‘신 기사, 운전해, 어서!’하며 오히려 신에게 농을 칠 수 있다면, 마빡이처럼 30분간 이마만 계속 쳐대다가 결국 고객과 함께 쓰러져 눕더라도 행복하게 웃을 수 있다면, 인생은 발랄함 그 자체가 되지 않을까. 적어도 내 책이 얼마나 팔리는지조차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잡지에 글이 실리기 위해 자원봉사라도 뛰어야 할지 모르는 이 한국 땅에서 작가를 하고 먹고살려면 유머 감각 하나쯤은 몸에 지녀야 할 것 같다. 문득 안 선생의 벌렁 까진 이마가 떠오른다. 그가 올해에는 회원 모집과 목표 부수 판매를 달성해낼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