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은 가족의 시간이다. 이른바 민족 대이동이라고 불리는 그 엄청난 교통난을 겪는 것 자체가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기 위해서 벌어지는 일이고, 연휴를 만들어주는 것도 바쁜 일상에 한번쯤 시간내서 가족끼리 한번 모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풍요로운 계절, 풍요로운 마음으로 가득한 채로 가족이 모여들어 모두들 행복한 웃음을 짓는 따듯한 광경…. 뭐, 그렇게 끝나면 좋겠지만, 이야기는 계속된다. 모처럼 모였고 반갑기도 하지만, 같이 모여도 뭐 별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반가움은 한때, 무료함 내지 심한 경우 껄끄러움은 나머지 만남 내내. 게다가 만약 여성이라면 그 끝없는 가사노동은 또 어떤가. 여하튼 어서 끝나고 나머지 연휴기간 동안은 난데없던 대가족의 향연에서 벗어나 푸욱 쉬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도 그렇게 양심에 걸릴 일이 아니다.
바로 그럴 때, 만화책은 좋은 동반자다. 집에서 편안히 쉬면서 볼 수 있고, 은둔해버리지 않더라도 서로 귀찮게 하지 않고 각자 혼자 몰두하며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왕이면 가족에게 시달린(?) 김에, 만화도 가족에 관한 작품들을 한번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무슨 가족의 아름다움, 따뜻한 가족애가 지상 최고의 가치라느니 하는 감동의 교훈 작품 같은 것은 사절이다. 꼭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솔직히 이미 현실에서 가족의 감동도 스트레스도 다 받은 상황에서 별로 당기지 않을 법하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상쾌한 도피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서, 화끈하게 엉망진창인 가족에 대한 만화를 집중적으로 읽어볼 것을 권한다. 사실, 가족애가 전혀 없는 완벽한 콩가루 가족에 대한 작품은 드물다. 하지만 ‘알고 보니 숨어 있는 따뜻함’보다는(<이씨네 집 이야기> 등 전통 가부장 가정에 대한 찬미로 가득한 가족만화들), 확연히 드러나는 가족간 애증 섞인 알력과 그들의 좌충우돌 모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작품 정도만 되어도 상당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자리에 몇 가지 그런 작품들을 소개해볼까 한다.
<우당탕탕 괴짜가족>(전 31권), <원조! 괴짜가족>(8권 발행 중) 하마오카 겐지/ 서울문화사
황당하리만큼 괴짜질을 일삼는 가족 성원이 한명 있다고 치자. 나머지 가족 성원은 그 뒤처리로 참 고생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아예 온 가족이 다 그렇다면 어떨까. 그렇기에 오오사와기 집안 사람들은 그럭저럭 잘 살아나간다(물론 주변 이웃과 친구들에게는 엄청나게 민폐지만 말이다). 꼬마 남자애는 막나가는 장난꾸러기, 아버지는 난폭 열혈 택시 운전사, 할아버지는 록 마니아, 어머니와 누나와 아기는 괴력 레슬러, 장남은 폐인. 이 가족이라면 하루하루가 엽기 개그가 된다. 마치 고전 우스개마냥 각종 화장실 개그로 범벅된 엉터리 이야기들이 거침없이 펼쳐진다. 둥글둥글하면서도 항상 맑은 눈으로 부담스럽게 만드는 그림체도 효과만점.
<납골당 모녀>(4권 발행 중) 강현준/ 학산문화사
가족이란 경우에 따라서는 취향마저 닮아버리는 법. 예를 들어서 어머니와 딸이 같은 남자 취향, 그것도 미소년 취향이면 어떨까. 가업으로 으스스한 납골당을 운영하기에 그다지 남자운이 없던 모녀가, 우연히 굴러들어온 미소년을 쟁탈하기 위해 벌이는 뜨거운 신경전과 개그로 가득한 작품. 모녀라는 관계가 오히려 서로를 잘 알기에 더욱 치열한 경쟁으로 몰아넣는 악순환이 주인공들에게는 마음의 고통을, 독자에게는 마음의 웃음을 안겨다준다. 언뜻 진지하게 나갈 법하다가도 어느 틈에 다시 욕망에 충실하기에 가족이고 뭐고 서로 골탕 먹이기에 최선을 다하는 이 가족을 보고 있노라면 현실 속 가족과의 신경전에서 온 스트레스가 어디론가 날아가버릴 것이다.
<심술가족> 이정문/ 묵찌빠닷컴(온라인)
이정문의 심술 시리즈는 한국 명랑만화 장르의 보물이다. 70∼80년대 다른 명랑만화들이 장난기 가득하고 때로는 멍청하지만 사실 더할 나위 없이 착한 개구쟁이들의 모험을 그렸다면, 심술첨지, 심똘이, 심쑥이, 심술통, 심통이와 심뽀 등등 심술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정말 심술맞다. 물론 길창덕의 ‘순악질 여사’도 심술로는 가히 최고봉이었으나, 이정문은 아예 온 가족이 다 심술꾸러기인 작품을 탄생시켰다. 애들은 애들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각자의 눈높이에서 사람들에게 마음껏 심술을 부린다. 다소 부덕한 짓을 저지른 사람들을 갖가지 사소하지만 집요한 심술로 괴롭혀서 뉘우치게 만드는 에피소드도 많지만, 역시 가장 돋보이는 경우는 가족이 심술로 서로서로를 골탕 먹일 때다. 심술의 고수가 더 엄청난 고수에게 당하는 모습의 즐거움인 셈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사악함이라기보다는 마치 놀부와 같은 해학의 묘미가 있다. 이제는 명랑만화라는 장르 자체가 고전이 돼버렸지만, 특유의 항상 화나 있는 표정의 가족을 다시 만나는 것은 역시 반갑다.
<신한국 황대장>(전 5권) 김진태/ 서울문화사 또는 이코믹스(온라인)
모 영화의 성공 덕분에 ‘한국형’ 영웅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금 꽃피고 있다. 한국형 영웅은 평범한 가장이고, 별다른 능력보다는 그냥 한국적 오기와 평범한 생활을 지키려는 가치관 하나만으로 의외로 강력한 적들도 여차저차 해치우는 것이다. 이런 흐름의 원조에 가까웠던 것이 바로 ‘황대장’이었다. 아버지는 대한민국 황대장으로 한때 활약했고, 아들 역시 영웅의 길을 걸어서 신한국 황대장이 되었다(당연히, 한창 신한국을 부르짖던 90년대 초반의 분위기도 반영되었다). 출동할 때 운동복을 주섬주섬 입고 보자기 망토를 두르는 이 영웅 부자는 필살기도 두 다리를 붙잡고 사타구니를 반복해서 밟는 ‘처절한 응징’ 등 아주 통쾌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한 집안에 대물림으로 두 영웅이 있을 때, 그 미묘한(?) 분위기는 어떨까 즐겁게 웃으며 지켜보는 것도 포인트.
<콩가루> 박성훈/하나포스+작가 홈(http://paranoia.anipy.com)에서 연재 중
진정한 콩가루 가족의 진수. 특별히 가족 성원 한명한명이 괴짜라기보다는 가족간 관계가 어느 불륜 아침드라마보다도 더 극단적으로 망가져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가족의 틀 속에서 적당히 버무려져 있기에 일류 부조리 개그가 된다. 화장실 개그나 엽기적 설정과 달리 철저하게 막나가는 관계 자체에 집중해서 웃겨주는 코미디. 은근히 진지하고 딱딱해 보이는 그림체에서 오는 괴리감이 그런 개그의 효과를 더욱 더해준다.
<폐인가족> 김풍/ 미디어다음(온라인)
사실 특별히 가족이 폐인이라기보다는 김풍 만화가가 자신의 출세작인 <폐인의 세계>에서 만들어낸 온라인 폐인 캐릭터를 사용해서 만들어낸 가족코미디. 아버지는 무능하고 어머니는 귀 얇은 주부고, 아들은 재수·삼수생이고, 딸은 영악한 고교생이다. 가장의 권위 따위는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간 지 오래며 누구 하나 서로를 존중하지 않지만, 여하튼 가족은 대충 굴러가는 상태. 어찌보면 별로 과장하지도 않은 한국식 현대 가정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폭발적 웃음의 개그보다는 사회 세태 풍자의 매력이 더 강한 작품.
<쥐>(전 2권) 아트 슈피겔만/ 아름드리
지금껏 개그물을 소개했는데, 사실 뭔가 엉망인 가족 관계를 가지고 과장된 패러디와 개그가 아니라 진지한 접근을 해버리면 상당히 무겁고 부담스러운 작품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는 개그도 아니고 지나치게 엄숙하지 않게 접근하면서도 얼마든지 진지한 즐거움과 감동을 주는 것이 가능하다.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다룬 작품 <쥐>의 가족이 그렇다. 대학살의 생존자인 아버지와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는 만화가 아들. 이들 사이에 있는 것은 서로 다른 세상을 경험하며 살아온 과정, 서로에 대한 거리감, 가족으로서 가지는 연결 등 여러 요소들의 미묘한 균형이다. 이 작품이 걸작의 반열에 오른 것은 홀로코스트의 묘사 때문이라기보다 그것이 바탕이 된 현재의 모습들, 예를 들어 ‘가족’의 관계를 파고들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제3권 태종실록편) 박시백/ 휴머니스트
가족의 굴레, 부자의 애증, 형제간의 다툼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끝나는 비극, 그 모든 것을 극복해내기 위한 정진. 때로는 어떤 가상의 드라마보다도 재미있는 것이 바로 역사다. 조선왕조 초기, 왕의 가족만큼 콩가루 가족의 진수를 보여준 것이 또 있을까. 어차피 대부분 대략의 줄거리야 잘 아는 이야기일 테지만(하다못해 드라마 <용의 눈물>을 통해서라도 말이다), 이왕이면 이번에는 정치권력의 쟁탈전보다는 가족드라마로서 한번 다시 읽어보면 어떨까. 정사에 충실하며 설명이 명료하고, 뚜렷한 그림체와 연출를 구사하는 작품을 통해서 말이다. 아아, 가족이란.
<문조님과 나>(6권 발간 중) 이마 이치코/ 시공사
사람 가족에 대한 작품이라면 아무리 콩가루라도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근친상간과 난교 같은 금기 소재를 마구 꺼내놓고도 명랑한 분위기를 유지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물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면 한층 편하다. <문조님과 나>는 원래 요괴기담 만화를 통해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라든지 소외 이야기를 심어오곤 했던 작가가 펼치는 새장 속 문조 가족에 대한 관찰담이다. 그런데 문조를 많이 오래 키우다 보니 그 짝짓기의 가족 관계가 장난이 아닌 것이다! 촌수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해질 정도의 문란한 번식, 그리고 언제나 어떤 관계에서나 암컷/수컷을 놓고 서로 경쟁하는 모습들. 행여나 그냥 동물 육성만화로 착각할까봐 작가가 중간중간 다시 가계도를 상기시켜주는 것도 여간한 악취미가 아니다. 아니 그런데, 결정적으로 상당히 가볍고 개그스러운 풍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더 즐겁다. 많은 이들은 이 작품을 애완동물 육성 만화 정도로 볼지도 모르겠지만, 이것 은근히 엽기가족만화다.
<사고뭉치! 피스전기만물상>(전 24권) 노다 다쓰키/ 대원 CI.
천재발명가 아저씨 칸타로, 그리고 그 재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장남 켄타로. 이들 둘이 중심이 된 피스 일가의 전기만물상에는 항상 소동이 그칠 일이 없다. 아들은 아버지를 뛰어넘고 싶어하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밀려서 뒤안길로 물러나기 싫어하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아들은 아버지를 구닥다리 취급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미숙한 애 취급한다. 도라에몽(동짜몽)의 전통을 이어받은 듯한 수많은 재미있는 발명품들이 엮어가는 재미있는 소동과 모험이 주가 되지만, 어째서인지 이들 부자의 티격태격을 보는 것이 훨씬 재미있는 멋진 가족만화.
이외에도 꼭 진짜 가족은 아니더라도 의외로 가족적인 분위기의 엉망진창인 작품들도 재미있게 찾아볼 수 있다. 진짜 가족은 아니지만, 소규모 조폭 집단의 모습에 아기가 하나 끼어들 때 생기는 유사 가족의 모습 속에서 포복절도 개그를 만들어내는 <키드갱>(신영우/ 삼양) 같이 말이다. 혹은 전혀 관계없어 보였는데 알고 보니 모두 가족이었다는 것은 어떨까. 알고 보니 서로 피튀기며 싸운 88명의 전사들이 모두 아버지가 같았다는 충격적인 설정의 <세인트세이야>(구루마다 마사미/ 서울문화사)라든지 말이다. 여하튼 추석 연휴는 만화책을 제대로 읽기에는 너무 짧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