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민호 대표는 매의 눈과 코뿔소의 다리를 동시에 가진 사람이다.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CF감독으로 오랫동안 필드를 지킨 워커 홀릭기 다분한 이 CEO는 빠르고 정확한 판단력과 주저없는 추진력으로 업계에 정평이 나 있다. 2000년 광고제작사로 시작한 옐로우필름은 광고, 뮤직비디오를 제작해왔고 올해 초 <연애시대>로 드라마 제작에 뛰어들었다. 또한 2006년 실리샌드를 통해 코스닥시장에 우회상장했고 바른손, 몬스터 등의 매니지먼트사를 식구로 꾸리면서 만만치 않은 캐스팅 파워까지 얻었다. 또한 배두나, 김민준, 오윤아, 이진욱이 출연하는 <썸데이>가 공중파가 아닌 OCN에서 첫 방영되는 것으로 한 차례 언론으로부터 “지상파와의 전면전”이라는 호들갑스러운 관심을 받기도 했고, 2007년 초 방영 예정으로 올해 11월부터 제작에 들어갈 <에이전트 제로>는 설경구, 손예진, 차인표라는 화려한 라인업 이외에도 대한민국 최초의 시즌제 드라마라는 점에서 상당한 기대를 얻고 있다. 하지만 오민호 대표는 결국 이 모든 추진력을 결과물로 가시화하는 동력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크리에이티브”임을 강조한다. <매거진t>와 공동주체하는 ‘숨은 드라마 찾기’를 시작한 것도 이런 연유다. 신인, 기성 상관없이 숨어 있는 빛나는 극본들을 샅샅이 찾아내겠다는 또 한번의 비상인 셈이다.
-올 한해 옐로우필름의 행보는 흥미롭다. 드라마로만 치자면 <연애시대>가 처음인 신생 제작사인 셈인데 성장 속도는 남다르다. 50% 이상 사전제작했던 <연애시대>를 시작으로, <프리즈>가 10월 말 CJ를 통해 방영되고, <썸데이>가 벌써 촬영 중반에 이르렀으며, 본격 시즌제 드라마 <에이전트 제로>를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성큼성큼 내딛는 걸음이 기존의 프로덕션들에 위협적인 존재로 느껴질 것 같다. 혹은 왕따가 되거나. =옐로우필름의 시스템은 영화 시스템에 가깝다. 캐스팅, 대본, 프리 프로덕션이 이루어진 뒤에 편성이 결정되는 식이다. 먼저 편성을 받고 제작에 들어가지 않는다. 물론 이런 우리의 시스템과 방향에 대해 몇몇은 연대의지도 있고, 몇몇은 일단 어떻게 될까 두고 보자는 것 같다. 기존 프로덕션과 공조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외로운 시기다. 왕따가 될 수도, 공공의 적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웃음)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배두나의 여행책 <두나’s 런던놀이>는 오 대표의 기획으로 알고 있고, 3년 전 노자와 히사시의 소설 <연애시대>를 드라마화하겠다고 생각한 사람 역시 오민호 대표라고 들었다. 대중의 요구에 대한 스스로의 동물적인 감각을 믿는 편인가. =광고를 14년간 했기 때문에 트렌드에 대한 고민이나 연구는 숨쉬는 것처럼 해왔다. <연애시대>를 발견할 때쯤엔 이혼율이 50%라는 기획보도들이 언론에서 많이 쏟아져 나왔고 실제로 주변에 이혼을 고려하거나, 이혼한 사람들이 많았다. 불과 20, 30년 사이에 사랑과 연애, 결혼에 대한 생각이 너무 급변했다. 이런 순간에 이혼한 뒤에도 서로의 끈을 놓지 못하는 남녀 이야기는 충분히 소구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꼭 필요한 드라마라는 확신이 들었다.
-11월 촬영에 들어가는 <에이전트 제로>는 캐스팅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그러다보니 “한국판 <CSI>다”, “경찰서 로맨스다” 등 내용에 대한 엇갈리는 진술이 많은데 정말 어떤 이야기인 건가. =근미래의 대한민국 서울이 배경이다. 첨단 우수인재로 구성된 사립탐정기관에 차인표와 설경구와 손예진이 있다. 따로 놓고 보면 사회화가 덜 된 인간처럼 보이기도 하는, 비정상적인 천재들이다. 이들이 비밀리에 국가도 해결하지 못한, 어떤 기관도 해결하지 못한 사건을 의뢰받고 해결해나간다. 탈국가적인 조직이라 국제적인 사건의 의뢰를 맡기도 하고, 사설기관이라는 중립성 때문에 오히려 일반 사람들 입장에 서서 그들을 보호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에이전트 제로>는 장르물적인 성향이 강할 것 같은데 한국은 전통적으로 장르물이 안 된다, 는 속설이 있다. 또한 한국에서 뭐 그런 세련된 드라마가 나오겠나, 하는 부정적인 시선도 많다. =물론 400억원 투자하는 해외 드라마와 40억원 투자하는 우리 드라마의 스케일은 다를 것이다. 하지만 광고제작을 1천편 이상 해온 제작사로서 <연애시대>도 그랬듯이 영상 퀄리티에 대한 자신은 있다. 그리고 과거가 어쨌든 간에 앞으로 장르화, 아니 장르의 세분화는 피할 수 없다고 본다. 드라마는 결국 광고자본을 무시할 수 없는데 이미 광고주들이 분명한 타깃을 찾아 움직이고 있다. 구매력있는 시청자들은 공중파 편성 시간에 집에 가서 TV를 볼 수 없다. 회식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고 야근을 해야 한다. 그들은 대신 재방송이나 VOD, 다운로드를 해서 우리 드라마를 본다. 결국 집계된 시청률은 15%라고 해도 진짜는 30, 40%에 가깝다. <연애시대> <굿바이 솔로> 같은 드라마의 무시 못할 VOD 수입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동안은 눈감고 있던 광고주들이 이미 케이블과 인터넷으로 이동하고 있다. 시청률만 보고 눈뜬 장님처럼 광고를 붙이는 시대는 곧 끝날 것이다. 결국 자신들의 상품을 살 구매자들이 어떤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지를 궁금해하는 광고주들과 상대하기 위해서는 <섹스 & 시티>를 보는 여성 시청자와 <CSI>를 보는 남성 시청자를 잡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 애매한 상품은 안 팔린다. 분명한 장르화는 피할 수 없는 과제다.
-<실미도> <한반도>의 김희재 작가를 메인으로 <올드보이>의 황조윤 작가와 <주먹이 운다>의 전철홍 작가 등이 참여한 <에이전트 제로>의 대본은 현재 어떤 수준으로 뽑아져나오고 있나. =시놉시스는 1시즌 총 24부작이 모두 나온 상태고, 대본은 8개 정도의 에피소드가 완성되었다. 아무래도 첫인상이 중요하니까 시즌 프리미어를 계속해서 손보고 있다. 크리에이티브가 매우 훌륭한 작품이다. 기대해도 좋다.
-작가 시스템에 대한 기준이 있나. =미니시리즈처럼 한 작가가 작품을 꿰뚫고 가야 하는 것은 작가 1명에 이규제큐티브 프로듀서만 붙이는 식으로 가는 것이 원칙이다. 대신 시즌 드라마처럼 기획이 강조되는 경우는 컨셉과 크리에이티브가 핵심이다. 한 시즌 전체를 고르게 질적 컨트롤을 해가면서 빠르고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뽑아낼 수 있는가가 관건인 거다. 이 경우는 몇명이 팀을 구성하는 식으로 간다.
-배우들의 몸값 상승과 동시에 몇몇 스타작가들의 몸값이 과도하게 치솟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우리는 작가의 이름값에 돈을 지불하지는 않는다. 크리에이티브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계약도 없다. 100회 계약, 50회 계약을 해서 숙제하듯 써내려가는 건 창의력을 저해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작가가 이번에 내놓은 ‘크리에이티브’가 가치있는 것이라면 그 가치에 맞는 돈을 주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작가의 이름값이 편성의 진입 장벽을 낮아지게 만들겠지만, 결국엔 데스크나 시청자들 앞에서 크리에이티브의 제단을 맡게 마련이다. 본질적으로 우리 방식이 더 효율적인 셈이다.
-공중파 3사에서 전통적으로 해오던 드라마 극본 공모를 제외하고 제작사에서 주최하는 극본 공모전은 이례적이다. =하루에도 2, 3통씩 신인작가들의 이메일을 받는다. 신인들이 개인적으로 제작사나 방송사에 접근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이런 원석들을 혼자 판단하고 분석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고 싶었던 차에 <매거진t>로부터 제안이 왔다. 옐로우에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면 다른 제작사에서 해도 좋고, 드라마가 아니면 영화적 아이디어로 돌릴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다. 신인작가가 다양하게 발굴되어 신선한 자극을 주는 가운데 톱 클래스 작가들이 여유롭게 좋은 작품을 쓰는 건강한 작가 피라미드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극본 공모 지원자들을 위한 팁을 한 가지만 알려주면 안 되겠나. 이런 대본이라면 두팔 들고 환영한다는. =이번 공모가 단순히 옐로우필름이라는 한 제작사만을 위한 공모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대한민국 작가 풀을 넓힐 수 있는 기회였으면 좋겠다. 그런 점을 <매거진t>라는 잡지와 공유한 것이고 그래서 노희경 작가나, 이재규 감독 등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 거다. 기준도 없다. 팁도 없다. 오히려 지원자들은 어떤 기준에 얽매이지 말고, 누구 눈치도 보지 말고, 각자가 생각하는 최고의 드라마를 써주었으면 좋겠다. 한국 드라마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으면 더 좋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