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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9월11일 뉴욕
문석 2006-09-29

이건 아니잖아. 왜 하필이면 오늘 미국, 그것도 뉴욕을 떠난다고 했던 것일까. 2006년 9월11일 오전, 서울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뉴욕 JFK공항으로 가는 마음은 한없이 어둡고 무거웠다. 입구에는 완전무장한 장갑차들이 늘어서 있고, 경찰과 군인들이 살벌한 눈을 번득이면서 피부색이 노랗거나 검거나 거무튀튀하거나 잿빛이거나, 하여간 희디희지 않은 사람들을 무조건 발가벗기는 상황일 거야. 불안해, 무서워. 비행기 출발시간보다 4시간이나 일찍 터미널에 도착한 것도 그러저러한 예측을 감안한 탓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황급히 들어간 터미널 안은 조용했다. 탑승수속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수십명의 승객들, 그리고 막 교대를 마쳤는지 정리를 하고 있는 공항요원들이 그저 일상적인 표정만을 짓고 있었다. 탑승권을 받아서 보안구역 안으로 들어가는데도 불과 2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피곤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까딱이는 보안요원만이 있을 뿐 군인이나 경찰, 모욕적인 조사와 수색도 존재하지 않았다. 휴우, 정말 다행 아닌가.

공항에 설치된 TV에선 <CNN>의 9·11 특집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원숭이처럼 생긴 이 나라 대통령이 세계무역센터가 있던 자리 ‘그라운드 제로’를 살펴보는 모습,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전황, 9·11 희생자 가족의 현재 모습, 9·11 테러와 관련된 음모이론의 실체 분석 등이 흘러나왔다. 뉴욕에 도착한 9월6일부터 10일 사이에도 방송과 신문, 잡지에선 9·11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그중에는 9·11 희생자의 눈물겨운 러브스토리도 있었고, 지난 5년 동안 미국 내 모슬렘의 생활을 다루는 기획기사도 있었으며, 미국의 안보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FOX> 뉴스의 비통한 절규도 있었다. 그러나 그 5일 동안 뉴욕 시내의 일상에서 9·11의 흔적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여전히 관광객의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는 그라운드 제로나 9·11 희생자 묘지를 쓰레기 매립지에 건설하는 데 반대하는 유가족의 시위 정도만이 여기가 바로 그 현장임을 증거하고 있었다. 차라리 일반적인 시민들은 9월10일 개막한 NFL 시즌이나 U.S.오픈 테니스 결승전에 더 관심을 두는 것 같았다.

이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탑승구 앞에 앉아 있자니 혼자만 뭐 대단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 같아 쪽팔리는 심정이었다. 하긴, 9·11 이후 미국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도 아니고 뉴욕 곳곳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난 것도 아니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미국 정부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뿐 아니라 세계의 곳곳을 들쑤시는 중이다. 공항 로비에서 벌떡 일어나 “퍽큐 원숭이, 빌어먹을 양키들!”라고 소리라도 치고 싶지만, 그랬다간 당분간 한국 땅을 밟기 어려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다리를 얌전히 모으게 된다.

핏, 9·11도 별거 아니군, 하면서 비행기에 오르려는데 짙은 피부톤의 남자가 앞서 탑승하는 게 보였다. 이런이런, 저 사람 과연 보안검색을 잘 받은 걸까. 또 저 가방은 왜 저렇게 큰 거야. 오, 제발제발 5주년 기념 테러리스트가 아니기를. 가만가만, 기내 소화기가 어딨지. 마음속의 호들갑은 비행기가 북극항로로 완전히 접어들 무렵에야 멎었다. 그제야 외양만으로 그를 의심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쪽팔렸다. 결국 원숭이는 나였던 것이다. 이건 아니잖아, 정말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