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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살벌했던 날의 능소화, 소설가 박완서
김혜리 사진 오계옥 2006-09-25

“내가 입때 살아온 얘기만 풀어도 소설로 열권은 넘어.” 미장원에, 목욕탕에 둘러앉은 아주머니들은 훈장을 흘긋 내보이는 퇴역 군인처럼 속삭이곤 했다. 열권이 다 뭔가. 1970년 <여성동아> 장편 공모에 입상한 <나목>으로 문단에 입적한 소설가 박완서(75)는, 36년 동안 100편이 넘는 장·단편 소설을 썼다. 10만 고정 독자를 가졌다고 일컬어지는 그녀는 “마흔살까지 보통 여자로 산 체험을 파먹었다”고 겸손히 말했다. 한데 그 ‘보통 여자의 체험’이 화수분이다. 듬성하게 묶어도 예술가 소설(<나목>), 여성주의 소설(<살아있는 날의 시작> <서 있는 여자>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역사소설(<꿈엔들 잊힐리야>), 세태소설(<휘청거리는 오후> <도시의 흉년>), 자전소설(<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은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 남자네 집>)들이 대갓집 장독대마냥 흥성하다. 출판사 세계사는 박완서 장편 전집을 냈고, 문학동네는 지난 8월 단편을 여섯권으로 갈무리한 전집 개정판을 펴냈다. 읽는 동안은 깨가 쏟아지지만 뒷장을 덮으면 추상(秋霜) 같은 교훈에 손끝이 떨린다. 살지 않으면 쓸 것도 없다.

박완서 소설의 제목은 ‘그’라는 관형사로 운을 떼는 일이 유독 잦다. 그 많던 싱아와 그 산, 그 남자와 그 여자, 그 해 겨울과 그 가을. 가볍지만 오뚝한 한 글자 ‘그’는 영어로 치면 ‘the’의 유일함과 ‘that’의 거리감에 ‘such’의 가느다란 한숨을 살짝 두른 맛이다. 박완서는 그처럼 기억을 자식처럼 치마폭에 싸고 돈다. 아무나, 아무 데나가 아니라 온전히 내 것이라고 못박는다. 하지만 박완서의 소설은 전쟁이 할퀸 폐부를 움켜쥐고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사이에서 뒤뚱대느라 자주 부끄럽고 쓸쓸했던 한국 근대화의 실록이기도 하다. 박완서의 공교로운 이야기들은 전쟁을 겪은 세대에게는 묵은 일기고 젊은이들에게는 전생이다. 그래서 모녀가 같이 눈물을 찍어낸다. 그녀를 만난다는 소식에 과연 부모님은 아는 친척이라도 되는 듯 거드셨다. “그이가 아마 돈암동에 산 적이 있지?” 그러고 보니 작가가 유년을 보낸 현저동도 머지않은 동네였다. 작가의 모교 매동초등학교부터 한때 놀이터로 삼았다는 서대문 형무소까지 걸어보았다. 총명하고 활달한 소녀가 오만 상상에 젖기에 넉넉하고도 남는 거리였다. 지나는 길 사직공원 단군사당에서는 때 묻은 흰 양말을 신은 한 여인이 거듭 엎드려 뭔가를 기구하고 있었다.

먼발치로 한강을 내다보는 구리시 아치울 마을. 작가의 노란 집을 찾은 월요일은 여름이 꼬리마저 감추어 선선했다. 풍경(風磬)도 건드리지 않은 채 사방을 휘감는 소슬한 바람은 작가로부터 불어오는 것도 같았다. 해를 우러르는 창들이 널찍한 집안에서 흐트러진 곳은 책상 위뿐이었다. 어느 쪽이 많은지 모를 화초와 책, 담벼락에 올라앉은 고양이들까지 주인의 여문 보살핌 아래 만족스러워 보였다. 정원에서 사진을 찍는 틈틈이 작가는 잔디 사이 잡초를 꼼꼼히 골라내고 수련(睡蓮)이 낮잠에서 깨어나는 시각을 가르쳐주었다. 그녀가 모르는 것도 세상에 있을까, 나는 잠시 아이처럼 의문을 품었다.

-전화를 드릴 때마다 “아직 덥다”며 주저하셨어요. 여름 나기가 유난히 힘드십니까? =일제시대 소학교에서 경축일에 오랫동안 조회를 서다 졸도한 적이 있어요. 어린 날 기억이란 게 무서워요. 지금도 여름이면 어지럼증이 있고 얼굴이 화끈거려요. 그러다 냉방한 실내에 가면 또 어깨가 오싹거려요. 그렇게 머리랑 몸이 분리되는 느낌이 싫어요. 대신, 선들바람에도 민감해서 바람이 불어오면 그렇게 기쁘고 살맛이 납니다.

-70대의 시간이 마음에 드십니까? =뜻하지 않은 나이죠. 예정에 없었던. (웃음) 걱정도 없고 먼 계획도 없고 하루하루 편안히 가요. 예전에는 작가로서 계약도 하고 연재도 했지만 이제는 매이는 일은 안 하게 되더라고요. 어찌 보면 여벌의 삶이지만 내가 원했던 삶이 이것이 아니었나 싶어요. 경제적, 육체적, 감정적으로 내가 온전히 독립했다는 자유의 느낌이 굉장히 좋습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에 이은 선생님 자전 3부작의 마지막 책을 기다리는 독자도 많았는데, <그 남자네 집>(2004)은 시기적으로 이어지는 경험이면서도 주인공의 이름이 선생님의 이름이 아니어서 3부냐 아니냐 설왕설래도 잠시 있었습니다. =3부작은 밖에서 다른 이들이 붙인 이름일 뿐이고 내가 묶은 적은 없어요. <그 많던…> <그 산이…> 두권은 서문에도 밝혔지만 허구를 완전히 배제했습니다. 독자에게 제일 많이 읽힌 책은 <그 많던…>이지만 나는 <그 산이…>에 굉장한 공을 들였어요. 그 책이 다룬 경험이야말로 나만의 것이거든요. 텅 빈 서울에 혼자 남아서 목격한 것, 그때를 견디게 한 일들, 사람들이 남으로 갈 때 억지로 북으로 올라가며 겪은 체험을 썼으니까요. 그런데 다음 시기로 넘어가면 다른 식구나 남들과 연관이 되는 일이 많아 제가 아는 사실만 쓰는 방식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 산이…>를 읽어보면 화자의 말투는 시종 가지런한데 전쟁 중 갖은 일을 겪고 난 후반에 이르면 ‘나’의 사람됨이 어느새 강퍅해졌다는 것이 은연중에 드러납니다. 인생을 어느 시점 이전과 이후로 나눈다면 그 시기를 지목하시겠습니까? =예, 그렇죠.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이라는 쿠르드족 영화에서 누이가 난쟁이 동생을 살려보겠다고 수레에 동생을 싣고 팔려가다시피 시집가는 장면이 있지 않았어요? 거기서 몹시 눈물이 났어요. 어떻게든 피난을 가보려고 총상 입은 우리 오빠를 수레에 싣던 날 그 해쓱하고 비참한 얼굴이…, 지금은 상상을 못해요. 그리고 내가 경험한 북쪽 점령군은, 책에 묘사한 그대로예요. 일사후퇴 때 서울에 들어온 인민군은 격전기가 아니었으니까 군량을 조금만 융통해도 남은 몇 안 되는 사람들을 먹일 수 있었을 텐데, 인구조사만 해가고 사람 먹여살리는 문제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어요. 방소예술단이니 호화로운 선전선동 사업에 동원하는 것이 먼저였죠. 그런데, 우리 사람은 먹어야 춤도 출 수 있잖아요. (웃음) 나는 양극화가 싫고 유럽식의 기독교적 사회주의 같은 형태를 이상으로 여겨왔지만 지금도 북쪽의 화려한 카드섹션과 시설 불비한 병원의 모습을 뉴스에서 접하면 그 정부는 하나도 안 변했구나 싶어요.

-전쟁을 잊기 위해 썼다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잊을까봐 썼다고 하시겠습니까? =국가를 지나간 회오리가 나를 조금도 비껴가지 않았을 때 겪은 이러저러한 특별한 경험에 대해 증언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어요. 그냥 잊어도 될 것을, 꼭 써야만 했던 건 내 기질이고요. 왜 사람들이 가정 풍파만 겪어도 밖에다 이야기하고 싶어하잖아요? 나는 글쓰는 재능이 있어 경험을 불리기도 하고 그대로도 썼지만 다른 사람들도 많이들 말하고 싶어해요. 딸 친구의 아버지는 6·25 나고 석달은 지금 일기를 쓰라고 해도 쓸 수 있다고 한답니다. 내 책을 보고 전쟁 경험을 편지를 보내온 분들도 있고 더러는 자비로 두터운 책을 낸 이들도 있어요. 지난 IMF 때 한 친구는 자기네집도 흥청거리고 살다가 어려움이 닥치니까, 속으로 “니들도 맛 좀 봐라” 하고 신이 났대요. 내가 뒷방을 박차고 나설 때가 됐구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에 내 지혜를 보탤 때가 됐구나, 말은 안 해도 속에서 신바람이 치밀더래요. (좌중 폭소)

-분단 이후 중산층의 생활을 담은 작품도 많이 쓰셨습니다. 평온해 보이는 일상 아래 뭔가 일그러진 게 있다는 것을 쏘아보고 꼬집어내는 소설들이었습니다. 그 작품들의 집필 동기도 전쟁을 그린 소설에서 말씀하신 시대를 증언하려는 욕구와 연결되나요? =그렇죠. 어려운 시기에 더 좋았던 것도 있어요. 가족애나 남녀의 사랑이나 애틋함이 더했죠. 모든 일이 지금보다 밀도가 높았다고 할 수 있죠. 내가 하면 사랑,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이야기와는 다른 거예요. 그때 우리가 서로 아꼈던 것, 사랑했던 것을 생각하면 참 절절했어요. 아마 그때는 사랑만이 삶의 기쁨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르죠. 지금은 기쁨을 느낄 것이 달리 많지 않습니까.

-딸에게 시집 안 간다고 타박하는 것이 보통인데 선생님 모친께서는 오히려 “너 같은 아이가 공부를 해야지 왜 시집부터 가냐”고 타박하셨다면서요. 어쩌면 그런 기대가 버거워 선뜻 결혼하신 게 아닌지. =대학 공부를 마저 못 시켰으니까요. (작가는 서울대 국문과에 6·25가 일어난 1950년 입학했고 개강은 하필 6월이었다.) 오빠만 해도 시골서 소학교를 다녔는데 어머니는 서울 빈민가에서 홀몸으로 살면서도 저를 서울의 좋은 학교에만 보냈어요. 그러다가 혼란기에 삼촌이 사상 다툼에 휘말려 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았고, 뒤이어 뜻하지 않게 전쟁 중에 오빠를 잃은 어머니는 딸에게 더 기대하셨겠죠. 그런데 나는 그 완전히 파괴된 집안을 그냥 면하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물론 이후에도 친정일을 많이 도왔지만 결혼 당시에는 청산하고 내 세계로 가고 싶었죠.

-작고하신 바깥어른과 1953년 올린 결혼식을, 필름으로 촬영해놓으셨다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지금도 집안 어딘가에 있어요. 소리는 안 나오는 무성영화예요. 그때, 남편은 모든 것을 내게 최고로 해주고 싶어한 것 같아요. 그 바람에 부자인 줄 알았는데 시집와보니 신부를 싸 데려오는 데에 다 쓴 거였죠. (웃음) 남편은 관대한 사람이었어요. 옥죄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내가 그 사람을 택한 이유가 “언제고 소설을 쓰리라” 마음먹어서는 아니었지만, 여자가 생각하는 것까지 알려들고 오늘 뭐 했냐 따질 남자는 아니라는 것은 만나자마자 알았죠. 결혼한 다음 복학하고픈 마음도 있었는데 그런다 해도 호응해줄 것 같았어요. 연달아 태어난 아이들을 젖 먹여 키우느라 결국 학교에 돌아가진 못했지만.

-책상 위에 걸린 손 사진이 아까부터 궁금했습니다. 선생님의 손인가요? =난 내 사진을 집에 걸어두는 것을 싫어해요. 그런데 누가 찍어준 저 사진을 보니까 내가 저 손으로 일도 참 많이 했다 싶어서 걸어뒀어요. 글도 썼지만 살림이 얼마나 큰 일이에요? 사진 한장 더 보겠어요? (<보그>에서 촬영한 손의 클로즈업 사진을 내온다. 사진의 손에는 고풍스런 반지가 끼워져 있다.) 남편이 결혼도 약혼도 하기 전에 선물한 반지예요. 그 궁핍한 때에 큰 호사였죠. 결혼도 안 한 남자에게 반지 받은 것이 창피해서 돌려주지도 못하고 엄마가 알면 미쳤냐고 야단할 것 같아 말도 못했죠. 결혼한 다음 50년을 넘게 꼈어요. 하도 오래 껴서 닳고 비뚤어졌는데, 보는 사람마다 예쁘다 했죠. 그런데 내 손이 마른 탓에 지난 설 즈음에 잃어버렸어요. 세공 하나하나를 내가 다 기억하니 이 사진을 들고 가서 똑같이 만들려고 해요.

-5남매를 낳아 기르셨습니다. 자제분을 많이 두신 것이 전쟁의 경험과 관계가 있나요? 생명이 나고 자라는 일이 유난히 귀중했다거나. =아뇨. 아이 태어나는 일이 기쁘기만 한 것도 아니었어요. 연년생으로 힘겹게 낳은 아이도 있고. 내가 53년에 첫아이를, 막내를 63년에 낳았고 첫 소설을 70년에 썼어요. 딱 맞아떨어지죠. 그 기간이 바로 베이비붐 시대예요. <그 남자네 집>에도 썼지만 인구가 그렇게 불어날 때는 남녀가 사랑을 나눠 당연히 새끼가 생기는 것 말고도 하늘의 뜻 같은 게 있는 것 같아. 기독교의 하느님이 아니라 “하늘이 비를 내린다” 하는 옛말의 하늘. 그때 엄마들이 나라가 인명을 잃었으니 많이 낳자고 단합한 것도 아니고, 산아제한 캠페인까지 했는데 인구를 조절하는 섭리 같은 것이 있지 않았나 싶어요.

장편 공모전 상금을 타면 내 존재가치가 생길 듯했어요

-전업주부로 내내 지내다가 1970년 <여성동아> 장편 공모에 박수근 화백과의 추억을 소재로 삼은 <나목>이 당선돼 등단하셨습니다. 첫발을 내딛으려면 이때다, 라는 느낌은 어떻게 왔나요? =나는 아이들 기르는 일이 우선이었어요. 어느 여성 화가가 젖을 물린 채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몸서리처지게 힘들어 보였어요. 첫 소설을 쓴 1970년은 우리 막내가, 그 아이를 내가 잃었지만은, 초등학교에 들어갔던 해였어요. 그제야 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시어머니 계시고 아이 다섯 기르는 일이 만만치 않았어요. 한 아이 손톱을 깎자면 다들 손발 내밀고 달려드는데 스무개씩 다섯명이면 그게 몇개예요.

-공모 당선으로 받은 첫 고료 50만원은 어떻게 쓰셨어요? =흐지부지 썼어요. (웃음) 나는 시집갈 때도, 가고 나서도 존중을 받고 살았지만 남편이 어찌 되기라도 하면 경제적으로 내가 완전히 무능하다는 게 비참하게 느껴졌어요. 남편 잃은 여자들이 “날러는 어찌 살라고” 하며 울 때는 사랑보다 애들 데리고 먹고사는 문제가 크잖아요. 남편이 술을 좋아했는데 어쩌다 늦기라도 하는 밤엔 얼마나 불안했는지. 통금도 있고 도로 사정도 나쁠 때니 맨홀에 빠지지 않았나, 교통사고가 나진 않았나 마음 조이는 것이 버릇이 돼 지금도 11시쯤이면 불안해요. 나중엔 집에서 마시도록 안주를 마련했고 남편 술 뺏어 먹다가 술을 배웠죠. 아이들 몰래 틈틈이 <나목>을 쓰는 동안 그만둘까 싶기도 했지만 50만원을 탄다는 생각도 하나의 동기였어요. 식구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싶었고 50만원을 타면 내 존재가치가 생길 듯했습니다.

-맏따님이신 호원숙님 수필에 의하면 선생님은 살림을 잘할 뿐 아니라 재미나고 창의적으로 하는 어머니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설 속에 투영된 선생님의 독백에는 “살림은 내 옷이 아니었다.”는 언급도 있으니 실상이 궁금합니다. =소설을 쓰고 있으면 살림을 내가 건성으로 하는 것 같고 연재소설이라도 쓰면 살림이 피폐해지는 것이 눈에 보여 살림한테 미안했죠. 그런데 또 밀린 집안일하며 살림꾼 몸짓을 하고 있으면 내 일이 아닌 것 같아. 지금은 결혼하고 일을 안 하는 여자들이 열등감을 갖지만 그때는 일을 하려면 살림도 잘하라는 요구가 암암리에 강했어요. 지금은 여러분이 이렇게 서재에 나를 앉히고 취재하지만 그 무렵엔 <여성동아>에서 나를 취재하러 오면 장독대도 닦게 하고 시어머니 시중을 들라고 주문해 사진을 찍었어요. 실제로 난 한번도 시어머니 머릴 빗겨드리거나 쪽을 져드린 적이 없는데 하라는 거예요. (좌중 폭소) 신인이니까 따랐으나 속으로 이건 아니다 싶었죠. 당시 마흔에 등단한 작가라고 내게 편지를 보내오는 여성들도 있었는데 나를 ‘둘 다 잘하는 선구자’처럼 받드는 일은 그들에게도 좋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취재당할 무렵에는 이미 식구들이 가사를 많이 분담해줄 때였거든요. 그런데 사실 내가 살림을 좋아하긴 해요. (웃음) 모든 걸 정리해놓지 않으면 글도 못 쓰죠. 글을 시작하기 전에 쓸데없이 찬장을 정리하거나 옷장을 뒤집어 버릴 걸 챙기기도 하는데, 그런 버릇은 글 쓰는 여자들 모두 공감하더라고요.

- <꿈꾸는 인큐베이터>나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을 비롯해 선생님 단편은 주인공이 어떤 후유증을 앓고 있는데 그 병소를 대뜸 드러내지 않고 표면적 이야기를 갈 데까지 끌고 가다 나중에야 심리적 외상을 드러내는 구성이 많습니다. =상처란 것이 다 그렇지 않아요? 누구든 정신적 억압이 없는 사람이 없는데 그런 것들은 비비 돌아서 다른 형태로 나타나요. 겉으로는 그것과 무관한 병을 앓고요. 정신과 의사들이 자꾸 환자에게 말을 거는 것도 돌아돌아 그곳에 이르려는 것 아니겠어요?

-어느 평론가가 말씀하셨는지 기억이 흐릿한데, “보바리 부인이 되기엔 너무 말짱하다”라는 평을 들으신 적이 있어요. 그 표현대로 여주인공들이 큰 일탈을 저지르거나 파국이 오지 않고, 서늘한 각성의 순간에서 이야기가 멈추는 작품이 많습니다. =(웃음) 내가 못해봐서 그래요. 하지만 왜요, 불륜도 많이 썼는데. <꿈엔들 잊힐리야>에서 머릿방 아씨(태임의 어머니)가 불륜했잖아요. 그런 대목을 길게 끌지 않는 것은 불륜의 기쁨이 그렇게 오래갈까 싶기 때문이기도 하고.

난 소설이 너무 어려워서는 좋지 않다고 봐요

-그동안 <박완서 소설어 사전>이라는 책도 나왔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선생님만 쓰고 찾아내는 어휘가 많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츱츱하다’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모릅니다. =내 소설은 표준어를 쓰는 것 같아도 개성 지방 말을 많이 썼어요. 지방뿐 아니라 우리 집안에서 쓰던 말도 많죠. 그래도 사전을 찾아보면 대개 있는 말인데도 가끔 문의를 받죠. 요전에도 “너무 엄마를 바친다”라는 표현을 보고 국어선생님이 전화를 하셨더라고요. ‘바치다’는 ‘집착한다’, ‘밝힌다’라는 뜻인데 내 책 어딘가에 ‘받치다’라고 틀린 맞춤법으로 나갔는지도 모르겠어요. 되도록 여러 권의 사전을 놓고 있는 말인지 찾아보며 씁니다. ‘츱츱하다’는 ‘바치다’보다 더 치사하고 추하게 뭘 밝히는 거예요. 음식 같은 것에 달려들지 말아야 할 자리에 달려드는 경우라든지. 우리는 대가족인데다가 어휘가 풍부한 집안이었어요. 수다스럽진 않았지만 가족끼리 많은 말을 주고받았죠. 그리고 또 중요한 점은 아이의 말을 끊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바삐 살다보면 아이가 어른에게 부당하게 야단맞는 경우가 있잖아요. 덮어놓고 큰 아이를 때린다거나. 그런데 저는 부당하다 싶으면 참지 않고 이건 이랬고 저건 저랬다 말대답을 했어요. 우리 엄마는 그것을 끝까지 들어주셨고 작은어머니는 “아유, 계집애가 저렇게 말대답을 하는데 놔두면 어쩌냐”고 엄마한테 뭐라 하셨죠. 나는 아이들이 자기 논리를 세워 말하도록 끝끝내 들어주는 일이 중요하다고 봐요. 우리 애들도 그랬어요. 한 애는 무르팍에 앉히고 다른 아이가 떠드는 걸 듣고 있으면 품에 안긴 애가 “엄마 나 보고 얘기해” 하면서 내 턱을 제쪽으로 잡아돌리던 기억이 나네요.

-소설 속에 각별히 자주 쓰시는 단어 중에 ‘우두망찰하다’가 있습니다. 그만큼 선생님께 친숙한 감정적 상황인 것도 같고요. =스케줄이 꼬이면서 무엇을 먼저 해야 좋을지 모르겠고 나중엔 무슨 계획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게 되는 상황이죠. 사실 내가 스케줄을 갖고 여러 사람과 교류한 것이 인생 전반부에는 없던 일 아닙니까? 사람마다 관계를 기억하고 관리하는 능력이 다른 것 같아요. 내 능력의 규모를 넘어서는 관계는 사람이건 혹은 출판사건 확대하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에요.

-전시회에 가면 내가 이 그림이나 사진 앞에서 얼마 동안 서서 바라보는 것이 적당할지 판단이 안 될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선생님의 소설은 사람들이 모두 물처럼 술술 읽힌다고들 하잖아요? 그런 말이 혹시 섭섭하거나, 좀더 음미해주었으면 싶진 않으십니까? =글쎄, 난 소설이 너무 어려워서는 좋지 않다고 봐요. 소설은 생겨난 기원부터 학문과는 다르죠. 이해가 안 돼서 또 읽는 일은 없어도 좋아서 또 읽을 순 있다고 생각해요. 내 소설은 그렇게 파란만장한 스토리가 없는 예가 많습니다. 그래도 독자들에게 읽히는 것은 문장의 맛 때문이 아닐까요. 나는 쓰고 나면 속으로 읽고 또 읽어서 거슬리는 부분을 고칩니다. 그냥 잔잔하게만 흘러도 재미가 없으니 격류가 올 때는 격류처럼 만들기도 하고. 우리 옛 소설도 음악적이지 않아요?

-작품 중에서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미망>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등이 TV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어찌 보셨어요? =(웃음) 내것뿐만 아니라 소설로 상상한 것보다야 영화가 늘 못하죠. 읽으면서 생각한 인간상이 그대로 나온 작품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정도였어요. 스칼렛도 레트 버틀러도 애슐리도. 감독의 상상력과 내 감수성이 맞아떨어진 거겠죠.

-거실에 <노팅힐> <8월의 크리스마스> DVD가 있던데요. 영화 취향은 어느 쪽이세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영화를 혹시 좋아하지 않으세요? 그 배우 나온다면 영화를 챙겨보게 되는 배우라도 있으세요? =알모도바르 영화 좋아해요. <그녀에게>는 두 번 봤어요. 키아로스타미 감독도 좋아하고요. 요즘 꼭 봐야지 하는 건, 이나영 나온다는. 맞아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거기 같이 나오는 남자아이(강동원)도 좋아요. 내가 예뻐하는 남자아이들이 많았는데 기억이 안 나네. (웃음) 이나영은 맑아서 좋아하죠. 맑은 사람이 좋고 젊은 사람이 좋아요.

-한때 송도 기생 황진이 이야기를 마지막 장편으로 쓰신다는 말도 있었습니다만. =글쎄요. 아까도 말했지만 이제는 무엇을 쓰겠다는 공언은 안 하고, 그냥 써지면 쓰면서 편안히 살고 싶습니다. 황진이를 쓸 생각은, 송도 상인 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미망>)를 연재할 때 떠올렸어요. 송도에서 피란 나온 사람들이 만든 <송도민보>를 읽었는데, 고향을 그리는 글 중에 황진이 묘에 다녀온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무덤에 풀만 무성하고 비석 하나 있는 옆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퍼서는 먹을 수 없고 입술을 대야만 마실 수 있는 입우물이랍니다. 인상적이잖아요? 황진이의 자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시 몇편밖에 전해 오는 것이 없고 <대동야승>에도 그의 어머니가 황진이를 임신한 동기가 간결하게 나올 뿐이라 굉장히 상상력을 자극하죠. 북한의 홍석중을 비롯해 여러 작가가 쓴 것을 갖고 있지만 황진이 이야기는 마음대로 써도 뭐라 할 사람이 없어요. 후손도 없고. (웃음)

-연전에 호암상을 받고 상금을 “저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에 쓰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기억나요. 먼저 앞세운 가족들에 대해서도 “그들 몫까지 더 잘살아야지, 좋은 일 많이 해야지 하는 생각은 안 한다. 난 그 끔찍한 기억과 더불어 사는 것만도 지겹고 힘들다”고 쓰신 것도요. <그 남자네 집>에서 첫사랑의 환상을 작살내신 것도 그렇지만 뭐든 예쁘장하게 말하거나 위선과 위악 떠는 꼴을 못 봐주는 성격이신 듯합니다. =난 사람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싫어요. 자기 이야기를 위선 떨며 말하는 사람은 금방 알아봐요. 정치가라든가 그런 이들이 위선 떠는 회고록이니 뭐니 보내오면 헌정 페이지를 뜯어내고 그 자리에서 버립니다.

-극도로 견디기 힘든 상황을 맞을 때에도 끝내 다시 글을 쓰시고야 만 것은 글쓰기에 치유력이 있어서일까요? =내가 살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아들을 잃었을 때예요. 분도수녀원에 머무르며 평소 안 쓰던 일기를 매일 썼어요. 생각에 잠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마당에서 나무가 오늘은 어떻게 변했다는 등의 스케치를 적었어요. 그 일기를 추려 <한 말씀만 하소서>로 묶었죠. 지금도 나는 꼬박꼬박 성당에 열심히 나가는 신자는 아니에요. 하지만 아들을 잃기 전까지 내 신앙은 일종의 감정의 사치가 아니었나 싶어요. 모든 것이 뜻대로 된다는 교만도 있었죠. 아이들이 모두 건강하고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가족이 잘 지냈으니까요. 그런데 그 일을 겪고 난 지금은 내가 믿습니다, 신의 존재를. 아들을 잃어버린 시기는 가장 강하게 신을 부정한 시간이기도 했지만 우리가 무(無)를 부정할 순 없지 않아요? 어떤 신적인 존재가 있고, 그리고 그가 어떤 분이라고 생각이 내게 있었으므로 “대체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라고 끊임없이 질문했던 거죠. 그 순간 내가 질문을 던질 상대가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없이 낮고 비루해지면 신이 보여요. 물론 그렇게 해서 신을 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말씀을 돌아보면 선생님께 소설은 증언도 되고 굿도 되고 통곡도 되고 꿈이 되기도 하는군요. 소설의 효능을 이제 와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어요? =소설에는 누추한 생활을 뛰어넘는 힘이 있어요. 시골뜨기로 서울 명문학교에 입학한 나는 아이들 틈에서 촌티가 났고 3학년 때까지는 공부도 못했어요. 한자에는 철학과 이야기가 있어서 쉽게 깨우쳤고 한글은 딱 봐도 ‘가’에다 ‘기역’하면 ‘각’이 되는 일이 자명한데 일본어는 까닭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거든요. 덮어놓고 외는 걸 못했어요. 그런데도 열등감을 이길 수 있었던 까닭은 내가 어머니에게 듣고 책으로 읽어 수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어서였어요. 난 그 애들이 모르는 세계를 알고 있었고 이야기를 해보면 걔네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꼈죠. 여름방학에 내려갈 시골(경기도 개풍군 박적골)이 있다는 사실도 비슷한 우월감을 줬어요. 서울에선 빈민굴 같은 동네에 살지만 방학이면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세계가 따로 있다는 생각은 지극한 해방감이었요. 내 소설이 다른 이에게 그런 힘을, 위로를 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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