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부터 미지의 신세계 할리우드에 대한 관심은 높았다. 이미 1920년대에 <동아일보>는 ‘미국영화왕국탐방기’라는 연재를 통해 “허리우드에서는 엑스트라들이 출연을 위해 대수술로 얼굴을 변형하기까지 한다”는 가십까지 시시콜콜 전했을 정도다. 물론 적의도 없지 않았다. 1930년대와 40년대, 할리우드 배우들을 따라 양산 들고 백구두 신고 거리를 활보하며 유행을 좇던 모던 걸들에게는 “매음부 송장의 입술에 구지베니(립스틱)를 바르는 격”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미국영화는 거저 흥미와 쾌락을 중심으로 해서 저속에 흐르기 쉬운” 불구의 도락(道樂)일 뿐이라는 경고도 많았다.
그러나 1945년 이전까지 할리우드는 유한계급에만 허용되는 오아시스였다. 태평양 전쟁을 전후로 극장가에 내걸리지 못했던 터라 대중이 할리우드영화를 직접 맛볼 기회는 적었다. 조선인들이 할리우드 판타지를 즐길 수 있게 된 건 미군정이 들어선 뒤에야 가능했다. 1946년 4월5일, <대동일보>는 “성림(聖林: 할리우드) 9대 촬영소 제작 영화 수편이 입하된다”면서 들여온 영화는 중앙영화사가 독점배급한다고 알렸다. 당시 서울 남대문통에 사무소를 마련한 중앙영화사는 미국인 배급소장을 불러앉힌 뒤, 5월에 첫 번째 배급작 <비는 온다>(1939, 원제 <The Rains Came>) 등을 상영한다.
이 무렵 극장들이 대개 일제시대 군국주의 영화라고 비판받았던 “<군용열차> 등을 재편집해 <낙양의 젊은이>라는 이름으로 바꿔친 뒤 상영”하거나 신파극과 악극공연 등으로 때우던 상황이었으니 영화계 안팎에선 ‘성림영화의 조선 입하’를 반겼을 것 같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1946년 5월26일자 <서울신문>에 용천생은 할리우드영화의 수입과 중앙영화사의 독점배급을 두고 “이제 움이 트는 우리 영화의 싹 곁에 강인하고 왕성한 성장력을 가진 미국영화라는 느티나무를 심으려 하는 것”이며 “만일 이것이 그대로 착근한다면 조선영화의 싹은 노란 싹 그대로 고사하고 말 운명”이라고 썼다.
불행한 예상은 기어코 들어맞았다. 할리우드 세례는 대중의 요구에 앞서 의도적으로, 반강제적으로 이뤄졌다. 조선영화동맹 등이 주최한 소련영화 상영회를 가로막았던 미군정은 중앙영화사 설립 직후에 “앞으로 조선 안에서 제작, 상영되는 영화는 공개 전에 공보부의 검열을 받아야 한다”며 “영어대본까지 첨부하라”는 내용의 ‘활동사진 취체’에 관한 군정법령 68호를 발표한다. 중앙영화사의 독점배급과 검열제 실시에 대한 문화예술계의 비난이 거세지자, 군정 관계자는 중앙영화사는 군정과 상관없는 ‘사설기관’일 뿐이며, 검열제 실시가 “조선영화의 앞길을 가로막는다면 수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해명은 이내 거짓임이 드러났다. <비는 온다>의 개봉을 앞두고 미군정은 4월20일부터 5월 초까지 검열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서울 시내 9개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던 조선,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영화의 프린트를 모두 압수했다. 중국전영제작소가 김원봉 장군과 독립군들의 전투를 기록한 <조선의용대>의 경우 검열을 신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유없이 상영 불가 결정이 내려졌다. 미군정에 비판적이었던 조선영화동맹의 경우 지방 이동 상영 때 “영사기를 압수당하고 테러를 당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미국 정부의 비호가 아니었다면, “1946년에 이미 전체 수익의 17%”를 해외배급으로 충당하고 있었던 할리우드가 각국에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을까. 한국의 경우엔 더했다. 미군정은 일본에 차린 중앙영화배급사를 고대로 본떠 중앙영화사를 설립하고, 일제시대 검열법을 고스란히 가져와 관련 법령들을 만들고, 당시 조선영화동맹을 비롯해 영화인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친미 자산가와 친일파에 남한의 96개 극장의 소유와 관리를 맡기면서도 “당연한 처사”라고 여겼다. 미국한테 일본은 “상당한 경외심을 갖출 만한” 적국이었던 반면, 한국은 “여전히 미개한” 일본의 속국이었다.
“악독스러운 왜정하에서는… (중략) …매년 7, 8백만 석이나 박탈당해 굶주렸다고 하겠으나… (중략)… 해방 후 한 섬의 수출과 박탈의 피해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근 80만톤이라는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양곡은 무엇을 말함인가.” <국제신문>은 1948년 8월15일자 기사에서 미군정 3년은 전 분야에서 ‘노예경제’가 안착화했다고 한탄하고 있다. “미 군용기로 실어나른” 할리우드산 영화들의 융단폭격 피해도 상당했다. 1947년 한해에만 4억5천만원을 가져갔고, 해방 뒤부터 1948년 3월까지 조선영화에 비해 20배가 많은 422편이 상영됐다.
“한달에 3주 이상 미국영화 상영”을 요구하는 등의 횡포를 부렸던 중앙영화사는 3년 동안 엄청난 수익을 거둬들였음에도 미군정을 방패삼아 수입세와 소득세를 제때 내지 않는 등 ‘배째라’식의 버티기로 일관했다. 군정이 끝났지만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했던 이승만 정부가 문제 해결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을 리 없다. “좋은 것 뵈주는데 너희들은 잠자코 구경만 하여라.” 시작이 이러했을진대 이후 직배와 검열을 무기로 손쉽게 조선에 길을 튼 할리우드가 오만을 떨어도 별수없었다. 스크린쿼터를 반쪽 떼어준 2006년, 지금은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