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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대에도 포르노는 있었다
이영진 2006-09-20

도색영화회 사건

1947년 2월8일 오전 11시40분. 이른바 도색영화(桃色映畵) 사건의 첫 번째 공판이 열리던 서울재판소 4호 법정은 잠시 술렁거렸다. 방순원 심판관이 사실심리를 앞두고 일반 방청인의 퇴장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예끼! 니놈들이 사람이냐, 짐승이냐.” 독립촉성전국청년회 소속 젊은이들은 물러나면서 참았던 욕설을 퍼부었다. 도색영화 상영의 주범으로 법정에 선 피고 김재영과 김린이는 고개를 떨구었다. “풍문에는 남녀가 홀라당 벗고서 몸을 합한다던디. 그걸 어떻게 찍었을까 당최 모르겄네.” 궁금증을 미처 해소하지 못한 수군거림도 들려왔다. 법정엔 입회 검찰관, 담당 변호사, 그리고 신문기자들만이 남았고, “추잡하고 에로틱한 남녀 나체 군상의 활극”에 관한 피고들의 진술이 시작됐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든 포르노 사건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도색영화회 사건. 도색영화회 사건은 당시 서울에서 첫손에 꼽히던 요정 명월관에서 터져나왔다. 수도경찰청은 1946년 12월5일 20여명의 주객(酒客)들이 불법 16mm 도색영화를 관람했다며 기생 최선 등을 붙잡아 취조에 들어갔다. 도색영화 상영을 주도한 상인 김린이가 자수하면서 수사는 불이 붙었다. 도색필름 제공자인 충무로 악기상 김재영과 영상기 대여자인 신당동 사진사 정화세까지 검거됐고, 명월관뿐만 아니라 국일관, 청향원, 란정 등 서울 시내 주요 요정에서도 수차례 도색영화 상영이 이뤄졌음이 드러났다. 상업은행 지점장 등 “기생들을 무릎에 앉혀놓고 주흥과 향락에 취한” 유력인사들 또한 경찰서를 들락거리는 처지가 됐다.

“아름다운 조선의 남녀풍기를 어지럽혔다”는 문제의 도색필름은 김재영이 1945년 11월 전 동아장미상사 이사로 일했던 일본인 관정희(管政喜)로부터 건네받은 것이다. 당시 한 신문은 거금 1천원(당시 영화 관람료 20원)의 관람료를 받고 상영된 이 영화를 두고 “서양 남자 1명과 서양 여자 2명이 나체로 추잡한 실연을 하여 관람자에게 성욕을 충동케 하는” 12분가량의 성애물이었다고 보도했다. 시시한 수준의 애정물은 아니었던 듯하다. 당시 경성방송국, <경향신문> 등에서 기자로 일했던 문제안(86)씨는 “이 무렵 요정 등에서는 덧문까지 걸어잠그고 비밀리에 도색영화들을 상영했다”며 “직접적인 성행위 장면을 담고 있는 분명한 포르노물이었다. 심지어 수간(獸姦) 등의 장면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경천동지할 도색필름들은 당최 어디서 건너온 것일까. 당시 서울재판소는 명월관에서 상영된 도색필름이 “만주지방에서 밀수입한” 것으로 추정되며, “러시아 남녀가 출연하는” 음란물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에 대해 문씨는 “당시 대부분의 도색영화들은 미군의 위락거리로 들여온 미국영화”라고 말한다. “국일관 등에 나도 초대받아서 몇번 본 적이 있다고. 대개 요직에 있던 사람들의 부탁으로 큰 기업체 사장들이 나서서 미군을 초대하는 식의 파티가 열렸고, ‘재밌는 거 한번 보자’ 하는 즉흥적인 제안으로 그런 상영회가 열렸어. 다, 미국영화야. 현상소를 돌며 여러 번 뜬 거라 화질은 별로였는데, 스크린 대신에 벽에 흰 종이를 붙여서들 봤지.”

당시 여론은 음란물 상영이라는 비도덕적 행위에 대한 질타보다 고급 요정을 폐쇄하고 이를 일반인에게 개방하라는 요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전국근로자동맹 등은 1946년 12월8일 성명서를 발표해, “수백만 동포들이 여전히 기아와 추위 속에 떨고 있는 참상을 차마 보지 못할 지경이다… (중략)… 대중식당을 제외한 고급 요정은… (중략)… 전부 전재 귀환동포에 개방 제공하기를 엄숙히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1946년의 민생은 그야말로 도탄지경이었다. 해방 직후 조선총독부는 자국민의 귀국 자금 마련을 위해 통화를 남발했고, 국민들은 “1년 만에 물가가 10배로 뛰어오르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겪어야 했다. 게다가 토지를 불법 거래하고 식량 등을 매점매석하는 등 이권 챙기기에 정신없는 악질 모리배들까지 설쳐댔다. “정글의 법칙이야말로 유일한 규범이었다.” 리영희의 회고처럼, 해방 이후 서울은 힘있는 자만 숨쉴 수 있는 아비규환이었다.

하지만 미군정은 뒷짐지고 불구경했을 뿐이다. 시민에게 싸게 팔 요량으로 진도에서 사들인 고구마 5천여 가마가 갑자기 알코올 양조용 원료로 둔갑한 고구마 사건, 미국에서 배급용으로 들여온 비스킷을 서울시장과 일부 상인이 담합해 폭리를 취한 비스킷 사건 등과 함께 도색영화 사건 또한 여론의 뭇매를 맞았고, 시 당국은 적산 요정을 개방하여 전재민(戰災民)을 입주시키겠다고 했지만, 결과는 흐지부지였다. 김재영은 벌금 1만원, 김린이는 벌금 5천원을 언도받았을 뿐이다. 언론인 오기영은 1947년 <삼천리>에 이렇게 썼다. “(요정을) 개방시키겠다는 현명한 당국자의 말을 들은 지가 오래다. 그러나 실정은 어떠한가. 요정은 여전히 모리배의 상담실로서 호경기를 구가하고 있다.” 요정에선 그 뒤로도 미군이 초콜릿과 함께 던져준 도색영화들이 상영됐을까. 분명한 건 그 뒤로도 오랫동안, 요정에서는 포르노보다 더한 정치 협잡과 거래가 이뤄졌다는 사실일 것이다.

참고: <신문기사로 본 한국영화>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해방경성의 풍자와 기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한국현대사산책>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