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들의 식지 않은 열정을 엿보는 즐거움
관록의 거장들과 젊은 작가들이 고루 포섭된 영화제 중반까지는 후자들의 신작이 전자들의 것보다 영화적으로 훨씬 강하게 어필했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블랙 달리아>는 원작의 방대하고 치밀한 세계 그리고 흑백 누아르 필름의 미학적 틀에 속박당한 채 감독 스스로 자유와 상상력을 잃어버린 작품이었고, 무너진 월드 트레이드 센터 아래 깔렸다가 극적 구조된 인물들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올리버 스톤의 <월드트레이드 센터>는 그 감동이 미국식 휴머니즘 안에 완벽히 갇혀 있었다. 독일 감독 폴 버호벤은 <블랙북>이란 영화에서 2차대전 당시 독일 장교와 유대계 여성의 실제 사랑 이야기를 평범한 독일어 멜로드라마로 바꾸었을 뿐 민족의 역사적 죄의식과 치열하게 싸우지 않았다. 알랭 레네의 유쾌한 소동극과 스티븐 프리어즈의 기품있는 대중영화, 가린 누그로호의 비장미 넘치는 인도네시아 전통 오페라극이 없었다면 베니스에서의 거장들과의 만남은 절반의 만족에 그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제가 후반에 접어들면서 마뇰 드 올리베이라, 알랭 로브그리예,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의 영화들이 차례로 공개됐다. 축제 초반, 다른 감독들의 유명세에 가려졌던 유럽 신예감독들의 영화를 발견한 일과 더불어 이들 세 작품과의 만남은 느슨하게 흘러갈 뻔했던 영화제 후반을 팽팽히 조여주는 즐거움이 됐다.
<세브린느, 38년 뒤>(Belle Toujours/70분/프랑스/비경쟁)는 늘 긴 호흡으로 영화를 다듬어온 마뇰 드 올리베이라의 매우 미니멀한 신작. 초현실주의자 루이스 브뉘엘의 1967년작 <세브린느>(Belle de Jour)로부터 38년 이후의 시간을 잇고 있는 영화다. (공교로운 우연으로) 올해 경쟁부문 심사위원장 카트린 드뇌브가 주연했던 <세브린느>는 의사 남편 곁에서 문제없이 유복한 일상을 살던 여성의 일탈을 다룬 이야기다. 세브린느는 삶의 권태로움을 못 이기고 남편 친구에게서 고급 요정을 소개받아 들락거린다. 욕구와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가정에 재안착할 무렵 남편 친구가 집을 찾아와 “당신에 대해 남편에게 할 얘기가 있다”며 남편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그 뒤로 그들은 어떻게 됐을까. <세브린느, 38년 뒤>는 눈물겹게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 콘서트에서 한 노신사가 노숙녀를 내내 곁눈질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날 이후 쉬지 않고 그 금발의 노숙녀 뒤를 쫓던 그는 마침내 그녀와 대면할 기회를 얻는다. 이제 와서 만나 무슨 얘기를 할 거냐고 부정적으로 되묻는 여자에게 남자는 근사한 저녁과 선물을 준비한다. 세브린느와 그녀의 옛 남편 친구는, 어둡고 조용한 호텔 식당에서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해, 그것을 납득하고 인정하는 법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다. 영화의 원제목 뜻으로 ‘변함없이 아름답다’는 구절은 올리베이라의 영화에서 남편 친구 베네딕토가 세브린느를 38년 만에 만나 던지는 인사이자, 그 어떤 모습의 과거든 돌아보았을 때 우리가 갖게 되는 느낌을 옮긴 말이다. 올리베이라의 다른 영화들처럼 <세브린느, 38년 뒤>의 영화적 풍경은 매우 고고하면서도 주제는 참으로 쉽다. 동시에 이 영화엔 한 흐름의 만연체가 아닌 독특한 문체의 올리베이라가 있다. 의식과 기억을 의심하게 만드는 대화들, 비연속적인 이미지, 즉흥적으로 무대 중심에 개입하는 주변부의 일들. 작가가 또 한 작가를 이야기하는 방식으로서 <세브린느, 38년 뒤>는 ‘변함없이 아름다운’ 브뉘엘에 대한 올리베이라의 생생한 기억이기도 하다.
누보로망의 선구자인 작가 출신 감독 알랭 로브그리예는 글쓰기의 원초적 욕망과 인간의 성적 판타지를 혈기 왕성하게 탐구한다. <당신의 이름은 그라디바>(C’est Gradiva Qui Vous Appelle/ 110분/ 프랑스/ 오리존티)는 예술비평가인 젊은 남성에게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모로코에 머무는 존 로크는 한 동양 작가의 그림에 경도돼 있는데 특히 그를 사로잡은 건 그 작가가 그려낸 동일한 모델의 여성이다. 어느 날 존은 근처 시장에 나섰다가 나비처럼 나풀대는 하얀 옷차림의 금발 미녀를 발견한다. 연기처럼 사라진 그녀를 찾아내는 과정에서 주인공은 사도마조히즘에 젖은 비밀클럽의 세계를 알게 된다. 영화의 첫 시퀀스에서 존 로크가 말 그림을 응시할 때 존 로크의 집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나는 신비한 영화적 경험 이후 <당신의…>는 이야기를 쓰는 주체와 이야기 속 주인공 사이의 경계를 허물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객체의 욕망이 주체를 압도하다가도 다시 주체의 권위가 그것을 좌절시키는 과정의 반복이 <당신의…>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힘이다. 그 위를 가학-피가학의 성적 판타지가 덮는다. <당신의…>는 보는 관점에 따라 나이 든 마초감독의 비정상적 성적 판타지를 전시한 영화일 수도 있고, 혹은 감독 나이가 84살이란 점이 무색할 만큼 역동적으로 출렁이는 원초적 욕망의 롤러코스터적 경험일 수도 있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와 끝없이 이어지는 장황한 대사들.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의 <그들의 이런 만남들>(Quei Loro Incontri/ 68분/ 이탈리아/ 경쟁)은 지금껏 그들이 만들어온 영화적 미학을 고스란히 잇는 신작이다. 이 영화는 총 5막으로 구성됐다. 숲이 있고 두 남녀가 있다. 그들은 그리스신의 역할을 맡은 연극배우인 듯하다. 그들의 대화는 인간 내면과 유년기 향수에 관한 것이다. 막이 바뀌면 카메라 위치만 조금 달라진 동일한 숲에 또 다른 남녀주인공이 등장해 비슷한 대화를 나눈다. 스트라우브와 위예의 영화적이면서도 매우 문학적인 세계 <그들의…>는 이탈리아의 실존주의 시인 체사레 파베세가 쓴 <레우코와의 대화>를 영화로 옮겨낸 작품이다. 10명의 배우들이 번갈아 쏟아내는 대사들은 모두 파베세가 쓴 문장들이다. 연극 관람의 강제적 형태이자 어느 이탈리아 시인의 정신적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재현해낸 <그들의…>는 스트라우브와 위예가 아니면 결코 할 수 없는 영화적 실험이다.
큰 기대를 끌어모았던 두기봉의 <방축>(Exiled/ 100분/ 홍콩/ 경쟁)은 폭력과 배신, 복수와 의리의 테마와 비장함을 앞세운 비주얼을 통해 홍콩 누아르의 전통을 다시 잇는 작품이다. 그러나 심리적 공감의 토대가 미약하게 구축된 상태에서 공멸에 이르는 위대한 남자들의 세계를 보여주려 했던 탓에 큰 반향을 부르지 못했다. 애니메이션이 아닌 극영화에 도전한 오토모 가쓰히로의 <무시시>(Bugmaster/ 131분/ 일본/ 경쟁)도 실망 속에 묻혔다. 옴니버스 단편식 원작 만화를 2시간 넘는 드라마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힘을 잃은 탓도 있고, 오토모만의 에너지 충만한 시각적 쾌감이 사라진 탓도 있다. <무시시>는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오토모의 전형적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별들의 전쟁이라는 점에서 올해의 베니스를 정리한다면, 이순과 고희에 이른 노장들의 식지 않은 열정과 타협없는 영화세계를 확인케 한 자리임에는 틀림없다.
“브뉘엘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세브린느, 38년 뒤>의 마뇰 드 올리베이라 감독 기자회견
기자들의 질문은 단순했고 마뇰 드 올리베이라 감독의 대답은 복잡했다. 되도록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한 감독은 언어를 신뢰하지 못하는지 모든 대답을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이어갔다. 그 긴 답변들을 지면 관계상 압축해서 싣는다. 의미적으로는 불완전해졌지만 위대한 거장을 기억하려는 또 한명의 거장의 생각이 조금이나마 전달됐길 바란다.
-카트린 드뇌브가 여주인공을 연기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브뉘엘 영화의 여주인공이 다시 연기를 했다면 당신 영화에 어떤 의미가 되었을까. =이 영화는 배우를 위한 영화가 아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다. 배우들은 그 인물들을 연기했을 뿐이다. 브뉘엘 영화의 인물들은 젊은이였다. 30년이 지났으니 그들은 더이상 젊은이가 아닐 것이다. 젊었을 때 한 실수를 젊은이가 평가할 수는 없다(당시 브뉘엘에 등장했던 배우들이 다시 나올 수는 없다는 뜻).
-이미 작가감독으로 유명한 당신이 누군가의 영화를 반복하면서도 그것을 당신 자신만의 영화로 만들어내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었나. =그의 영화에 충실했고 브뉘엘에 충실했다. 나는 브뉘엘이 잊혀지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브뉘엘의 영화가 잊혀지고 있다는 사실이 두렵다. 그것은 곧 세상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이번 영화를 만들면서 나는 세상을 보는 시선이나 태도에서 브뉘엘의 방식을 따랐다.
-브뉘엘에 대한 오마주인가. =오마주는 아니다. 나는 처음부터 이 영화를 브뉘엘에 대한 오마주로 의도하지 않았다. 오마주는 잊혀진 사람에게 바치는 것이다. 나는 브뉘엘의 인물들이 재회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브뉘엘에 대한 오마주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면 브뉘엘에 대한 영화가 아닌, 브뉘엘식의 영화를 내 방식으로 바꾸는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미국식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나는 테러리스트입니다”
장 마리 스트라우브가 마달레나 다디에게 전해온 서신
영화제에 불참한 대신 장 마리 스트라우브는 기자들 앞으로 친필 서신을 보내왔다. <그들의 이런 만남들>의 여주인공 마달레나 다디가 손에 쥔 편지는 모두 3장이었다. 각각 다른 주제로 쓰여진 세 편지의 내용을 극히 일부 발췌했다. 스트라우브가 쓴 문장들은 비유와 은유로 빽빽해서, 올리베이라의 대답과는 정반대의 이유로 정리하는 데 역시 어려움이 있었다. 영화제 폐막 뒤 <라 레푸블리카>가 쓴 바에 따르면 이 편지들이 공개된 다음 경쟁부문 심사위원 카메론 크로 감독은 “미국인 입장에서” 스트라우브의 세 번째 편지를 불편해했다는 후문이다.
1장: 공산주의자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나라에 있는 우리는 너무나도 무식합니다. 명예를 더럽히지 않을 만한, 무식하지 않은 공산주의자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기까지, 지금 우리가 할 수 없는 말들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돌아올 때까지. 옛날 옛적엔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서만 불을 피웠는데, 지금은 우리가 얻은 걸 지키기 위해 대체 얼마나 더 많은 무고한 이들을 태워 죽여야 하고, 대체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을 광장과 길가에서 살해해야만 하는 겁니까.
3장: 내가 바로 테러리스트입니다. 나는 테러리스트를 찾아내기 위해 수많은 국립경찰과 사법경찰이 있는 곳에서 영화를 즐길 수 없습니다. 내가 테러리스트인 이유는 이것입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테러리스트들의 수는 결코 많은 게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