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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당한 뒤 영화에 빠져, 영화평론가가 됐지
2001-09-12

한국 최초의 영화평론가로 활동, 조선배우학교 설립해 영화인 배출

하이고, 너무 오래돼서, 그러니까 내가 1901년생이에요. 음력으로 1월 열흘날요. 순 서울 태생인데, 우리네 환경이 뭣이랄까, 자연하고 제일 가까운 위치에 있었어요. 남산이 참 좋았는데 지금 내가 자라기는 순저히 산에서 자랐다고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상동공옥소학교라고 나는 거길 댕기곤 했어요. 우리 아버지가ㅏ 매우 완고하시고 성격이 강한 편이라 머리를 땋고 학교 가기 이전에는 학교에 안 보낸다고 했어. 그런데 그냥 선생님이 데리고 가서 머리를 싹둑 잘라 버렸어요. 그래서 학굥 가게 됐지. 그때가 1909년이죠. 거기서 영어를 배웠고 4부 합창 같은 걸 하면서 음악에 대해 가까이 할 기회가 있고 그랬댔죠.

그게 선교 게통, 지금 말하면 감리교 계통입니다. 해서 인제 예배날이 된다든지하며는 상동공옥소학교의 여학생들 남학생들이 같이 모이게 되었는데, '저 색시는 참 잘생겼다'는 그런 것이 싹터가지고 나도 연애를 하게 된 거죠. 그게 S란 색신데 나보다 두살 연상으로 아직 여기 서울에 살아있어요. 그 이름을 이야기하며는 그 집안에 한번 사건 일까봐서. 그래 집에서는 공부 잘하는 줄 알고 "너 공부 잘한다"하면, 연애편지 쓰고 있는 겝니다.("말씀드리기 참 어렵지만, 조숙하셨습니다. 그래, 소학교 3학년 때구만요." - 대담중의 이영일)내 누님이 답장을 받아줬습니다. 그 뭐 기쁜 맘이야 말할 수 없죠. 머리가 띵할 정도로다 내 정신이 뱅뱅도는 거예요. 그후에 서로 예물 교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남산을 같이 올라가요. 거기서 내려다보면 경사진 언덕에 금잔디가 좌악 그냥 깔려 있습니다. 샘물이 흐르고, 그리고 거기서 밑에 누가 양을 쳤는지 모르지만, 양들이 이렇게 오락가락하고 있어요.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 뜨고 멀리 한강에는 나루가, 또 기차 연기 뿜고 가는 것 같은 것 , 그 환경이 러브신이 그대로 된 거예요.

그랬는데 연적이 나타났어요. 그게 지금 장진호라고 제중윈 의사의 아들입니다. 그 학생하고, 그때 실망이, 비참한 가운데 눈물까지 흘리지는 않았지만은 분하고 분해서 그 학생하고 일부러 싸움도 많이 하고, 그러니 학년 시험에 결국은 낙제야. 아버님께서 집안이 망했다. 학교 들어가서 사람 버렸다고 말이야. 머리를 깎은 것이 잘못이라고. 그래 양반이 흥분을 하시니 그 배우던 책 다 불사르고, 내가 4대 독자였는데 "왜 이렇게 하느냐"하고, 그후에 아버님이 돌아가셨죠. 내 열세살 때입니다.

김기진, 박영희와 함께 영화 순례

그러면서 이사를 하고 배제에 입학을 했어요. 실연을 하고, 보니까 중학교 가서 그때부터 <춘향전>을 읽은 겝니다. 참 보고 많이 울었어요. 참 기가 막히고 말이지. 그리고 그 때 나도 무얼 하나 쓰고 싶다는 생각이 나요. 그래 그때부터 내가 청춘 잡지는 전부 사다가 보는 겝니다. 또 그때부터는 영화를 몰래 좋아하니까 고등연예관(일제 초기의 양화 전문극장 - 필자) 영화구경을 댕기고, 영화구경은 8살부터 댕겼으니까요. 그때 김기진, 박영희 등이 같은 멤버입니다. 일본 말도 모르는데 <녹성> 문예지, <영화세계> <활동지식> 등 활동사진 잡지라는 잡지는 다 사다놓고 그래서 보는 거예요. 그래 일본말은 그래서 배운 겝니다. 배제학당에서는 내가 일본말을 제대로 공부 못했어요. 그러다가 멤버들과 기미독립운동도 하게 됐죠. 그리고 퇴학을 해가지고는 그냥 학교를 종친 것입니다.

그래 20년에 내가 일본을 들어간 겝니다. 기회를 탄 것이 그래 됐어요. 여기 일본 <대판매일신문> 경성 통신부가 있어요. 기미독립운동도 있고 하니까 거기서 아마 한국사람 하나쯤 어떻게 기자로 만들어 쓸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정책적으로 있었던 모양이지요? 신문광고가 났는데, 내가 보고 일부러 사환으로 쫓아 들어갔어. 그때 목적이 일본 가는 목적이었지요. 그래 그 다음해에 일본에 들어갔죠. 내가 먼저 도착한 곳이 일본의 대판(오사카). 그리고 동경 일일 신문을 하니까 다음에 동경. 그때부터 일본말을 제대로 배운 게죠. <동아일보>가 1920년 4월 1일에 나왔고 <조선일보>가 아마 두달인가ㅏ 먼저 나왔는데, 거기서 내 일은 이거를 필요한 것만 일인들이 지적해준 대로 번역하는 것이었습니다.

밥먹고, 그래 그때 그것만 하면 내 일은 다 끝난 게예요. 그러면 극장 가는 겝니다. 극장이나 뭐 촬영소 쫓아다닙니다. 그러다가 동료사원이 기막힌 변사가 있는데 참 잘 한다는 말이야. 그래 내가 보고는 그 사람 해설을 필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에 보내는 거에요. 단성사에. 그때 단성사 주임 변사가 김덕경(서상호와 함께 일제 초기 유명변사-필자)인데 '너 한국서 해설하려면 이렇게 하라', '이런 영화 지금 이렇다' 이렇게 필기해서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다가 23년 5월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죠.

조선배우학교를 설립해 영화사, 영화미학 가르쳐

그때 우리나라는 문예 부흥기라고 할까요? 한창 물산장려 운동이 나오고 했죠. 그런데돌아와서 느낀 것은 한국영화, 성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극장에 대한 것에 관심이 있었고 영화에 관심이 있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한 거죠. 또 내가 일본서 스튜디오 촬영을 하는 것을 많이 구경하고 또 책을 읽어서 알기는 하지만은 실천한 건 없었어요. 그래서 여기서는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돌아와서 신문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는데 그때 알게 된 사람이 <개벽>(3.1운동 이후 천도교를 배경으로 발행된 월간 종합자-필자)의 현철입니다. 이 양반이 연극공부를 했는데, 그래 같이 배우학교를 세웠어요. 정식 이름이 조선배우학교죠. 현재도 그 집이 그냥 남아 있는데 와룡동 72번지, 2층집입니다. 내가 일본에서 해설을 적어보낸 것이 인연이 돼서 김덕경이에게 자진으로 2층 건물을 하나 내어 받았죠. 24년 11월 27일에 정식 개학을 했어요. 사실 그거는 내가 그해 9월부터 서둘렀지만 최초의 배우학교인 만큼 '학교는 뭐냐'는 식으로 서에 호출당해 취조받고 하면서 늦어졌죠.

그래 학교를 세웠는데 최초의 학생이 12명이었습니다. 지금은 이북에 가버렸습니다만은 박재흥이, 또 김아구(녹음테이프에서는 김아구로 들리나, 김아부라고 기록된 자료도 있음-필자)라고 우리나라 창극의 시조입니다. 또 이금용(일제시대 유명 배우-필자)이가 있고, 또 왕평(노래 <황성옛터>의 작사가-필자)이, 또 아랑극단 단장으로 있던 지금은 고인이 되었습니다.만은 양백명이, 그래 이 사람들이 거기서 제일 뒤에 대성한 인물이죠. 거기서 내가 아는 대로다가 영화에 대한 역사, 시나리오 작법, 영화미학을 가르쳤어요. 연기기초도 가르쳤죠. 또 연기실기를 좀 시키고, 연극에 관한것은 현철씨가 주로 했죠. 발성법, 연극사 같은 거 , 분장술까지 배웠습니다.

수업료가 3원이었는데.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라 수업료를 낸 사람이 없었어요. 그때는 교과서가 없었던지라 그래서 인쇄부, 제본부, 동사부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교과서를 만들게 하면서 수업료를 대신하게 했죠. 또 처음에는 김아구하고 김아구 아버님하고 그때 돈 현금 600원을 만들어 가지고 왔어요. "내 아들을 맡아서 연극을 만들어 주시오"했죠. 그래서 그 600원 참 고맙게 받았습니다. 그 600원 자금은 전부 '호떡 대금'이라고 했습니다. 선생이나 학생이나 으레 호떡 사다가 그걸로 점심 때우는 거예요. 그러다가 창신동으로 이사를 했어요. 그때 넓은 집에서 제대로 하면서 학생이 많이 늘었죠. 학생이 한 30, 40명 정도 됐었어요. 그런데 그때 배우학교를 그치게 된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기록은 고 이영일 선생이 남긴 귀중한 자료인 원로영화인 녹취테이프를 소장 영화학도들이 풀어 정리한 것입니다.

정리 이유미/ 이영일 프로젝트 연구원. 한국에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 이론과2학년riffraff@dreamwiz.com

이구영(李龜永1901~73)은 초기 영화게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이자 '올 라운드 플레이어'였다. 최초의 영화평론가로 이땅에 '영화미학'이라는 용어를 들여왔으며 조선배우학교를 설립하여 복혜숙 등 많은 영화인들을 길러냈다. 그외에도 감독, 시나리오, 편집, 제작, 기획, 홍보 등 초기 영화게에서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분야는 거의 없을 정도다.

그는 소년 시절 첫사랑에 실패하면서 문학과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대판매일신문>의 사환이 되어 일본에 간것이 결정적으로 영화의 길에 들어선 계기가 되었다. 귀국 뒤 국내 신문 등지에 글을 기고하면서 알게 된 현철과 함께 조선 배우학교를 세우게 되었고, 일본 변사의 해설을 한국에 보내면서 단성사와 연을 맺게 되어 후일 영화제작과 신전 일을 하게 되었다. 그가 단성사에서 일하는 동안에 벌어지는 사건들은 '최초' 혹은 '최고'라는 말과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최초의 영화 홍보물, 최초의 조선인 판권소유 영화<심청전>(1925), 극심한 검열을 뚫고 상영된 조선 최고의 영화<아리랑>(1926)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감독으로서의 열망을 조력자로서 펼쳤던 활약과 무게를 넘어서서 꽃피우지 못한 데 대해 아쉬움을 피력하고 있다. 초기 영화계의 여러 분야에서 활약한 만큼 다양하게 펼쳐지는 그의 이야기는 무척 흥미롭고 유용하다. 특히 수십년이 지난 일인데도 불구하고 주요 연도, 통계 수치 등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의 능력이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