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에 처음 왔을 때 개가 되고 싶었다. 타이의 개들은 도로를 침대 삼아 잠을 잔다. 마치 앞으로 세 시간은 푹 잘 테니 깨우지 마시오, 하는 포즈로. 공항 버스는 개들을 멀찍이 피해 오염 가득한 방콕의 공기를 뚫고 달려서 마침내 카오산 로드에 날 내려주었다. 카오산 로드는 한마디로 미친 거리다. 그곳엔 낮과 밤의 개념이 없다. 사람들은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머리를 땋고 영화를 보고 거리 공연을 본다. 나는 젊은 여행자들이 그들의 차가운 열정을 방콕의 뜨거운 대기 위에 흩뿌리는 것을 보았다.
방콕은 여러모로 바쁜 도시다. 마치 서울의 혼잡한 도로 사이사이에 뚝뚝(삼륜차)과 오토바이 폭주족들을 심어놓은 듯하다. 도시에 비해 방콕 사람들의 속도는 더딘 편이다. 나는 MBK라는 멀티플렉스의 퓨전 샤브샤브 집에서 방콕인의 특성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의 특성은 음식을 제때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물을 달라고 10분 간격으로 3번이나 얘기했지만, 식당에 들어간 지 50여분이 지나서야 물이 나왔다. 심지어 물을 들고 온 점원은 반도 마시지 않은 내 주스를 빼앗아갔다. 물과 주스는 동시에 마셔선 안 되는 룰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 돼지고기와 버섯과 오징어를 흙처럼 씹어 먹은 뒤 물과 주스 값을 모두 계산하고 나서야 식당을 나섰다.
어쩐지 영화라도 한편 보면서 기분을 풀고 싶어졌다. 마침 영화관에서는 <Love Wrecked>라는 로맨틱코미디가 대기하고 있었다. 모든 광고가 끝나고 영화가 시작될 즈음 갑자기 뒤에서 들썩이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랐다. 내 뒤에 앉은 모든 사람들이 일어서서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체 무슨 일이기에? 타이의 농촌과 응삼이 스타일의 남자가 반복해서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응삼이 대신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 라엘리안 교주를 놓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촌스러운 화질과 색채였다. 그 화면이 끝나고서야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서야 난 그 응삼이가 국왕임을 깨달았다. 타이인들은 노란 옷을 사시사철 껴입는데 그것 역시 국왕과 황실에 대한 존경의 뜻이었다. 어쩌랴? 이방인(alien)의 눈에는 외계인(alien)만 보일 뿐인데.
다음날 한 외계인은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고 타이 북부의 치앙마이 별로 떠났다. 버스에서 난 수많은 이스라엘인을 만났고 유대인의 저력을 제대로 확인했다. 그들이 하도 즐겁고 시끄럽게 떠드는 바람에 10시간 내내 나는 야간 버스에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치앙마이에서도 트러블에 대한 걱정은 가시지 않았다. 그곳의 트래킹은 듣던 대로 증오스러울 만큼 버거웠다. 4시간이 넘는 산행, 도중에 맛보는 폭포의 아름다움, 왜 반바지를 입고 왔을까 하는 자신의 무지에 대한 혐오, 통나무 다리 하나 제대로 건너지 못하면서 가끔씩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허영심에 대한 비웃음 등 온갖 감정이 전신을 휘어 감쌌다. 그래도 고산 마을에서 낯모르는 유럽인, 타이인과 함께 밤새 쳤던 카드놀이는 여행의 고단함을 다독여주었다.
이런 온갖 트러블들 앞에서도 왜 굳이 힘겹게 여행을 떠나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내 안에 나를 평정하고 있는 물이 차 있기 때문이라고. 그 물은 고요하지만 늘 조금씩 흔들려줘야 한다. 그래서 난 책을 읽을 때도 딱딱한 도서관 의자보다 조금씩 움직임이 있는 지하철 의자를 선호하는 편이다. 내 안의 물은 내부에 고요한 파장과 진동을 일으켜 외부와의 마찰을 줄여준다.
물론 여행을 하는 이유가 이 때문만은 아니다. 여행의 진정한 가치는 하찮은 일의 위대함을 알게 되고 중대한 일의 하찮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여행자는 빨아야 할 양말이 몇 개이고 어디서 물을 사는 게 더 싸며 일기를 쓰고 잘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하다 하루를 마감하곤 한다. 연애, 금전, 진로 문제보다 세탁을 언제, 어디서 할 것인지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자신의 고향에서만 사는 사람은 절대 깨달을 수 없다. 나는 하루종일 뒤집어진 옷을 입고 돌아다니고, 택시비를 두배로 내고, 보트를 타다 수십번을 토하고, 버스 계단에서 구르기도 한 여행자를 본 적도 있다. 그에게 가장 중대한 문제는 그저 하루를 무사히 보내는 일이었다(말할 것도 없이 내 얘기다).
여행 중엔 뜻밖의 행운도 따르게 마련이다. 예정에도 없던 피피 섬에 가기로 급하게 마음을 먹은 나는 전날 맡긴 세탁물에서 옷을 집히는 대로 껴입고 버스에 올랐다. 하지만 피피에 도착해 하루종일 돌아다니면서 왠지 어색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날 밤 옷을 갈아입을 때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난 다른 사람의 속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사이즈가 좀 크더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