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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스톤베리>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1]
오정연 2006-09-18

축제의 열기를 말로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문자가 아닌 이미지와 소리를 활용할 수 있다고, 그것이 쉬워질까.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의 뜨거운 광기, 혹은 자유와 방종이 수시로 자리를 바꾸는 혼돈의 간접경험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게다가 그 축제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페스티벌 글래스톤베리라면 영화로 옮겨 섣불리 흥을 깨느니 가만히 있는 게 낫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뮤지컬, 음악다큐멘터리, 뮤직비디오 등을 만들어왔던 줄리언 템플은 그 ‘미션 임파서블’을 나름의 방식으로 달성했다. 그가 4년에 걸쳐 완성한 <글래스톤베리>는 축제가 안식년을 맞이한 2006년, 연례행사의 부재를 달래줄 정도로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다큐멘터리는 무대를 둘러싼 스펙터클을 세심하게 전달하는 공연실황 중계도, 노래의 정서를 비주얼로 설명한 뮤직비디오도 아니다. 그것은 천개의 눈을 동원하여 수십년에 걸친 문화현상을 담아낸 특별한 여정이다. 조금은 낯설고 혼란스럽지만 벅찬 열정으로 가득한 그 여정에 대한 다음 설명은, 스크린을 통해 맞이할 전설적인 축제에 대한 간략한 지도가 되어줄 것이다.

검은 화면 위로 찰박찰박 진흙탕을 걷는 소리가 들리면서 <글래스톤베리>는 시작한다. “포르노 대신 치약을 샀다.” 35년간 지속된 음악축제에 대한 서두로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글래스톤베리페스티벌로 말하자면, 가장 인기가 많았던 해로 기억될 2005년에는 11만2천장의 티켓이 예매 3시간 만에 동이 났고 총 15만3천명이 다녀갔으며 그 다섯배가 넘는 사람들이 티켓을 구하기 위해 혈안이 됐고, <BBC>가 주말 특별프로그램으로 편성한 중계는 500만명의 사람들이 시청했다. 이쯤 되면 축제라기보다는 문화현상이다. 열렬한 관중의 함성, 뜨거운 무대의 열기, 설레는 축제의 여흥 등 일반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도입부는, 이 기묘한 대상과 어울리지 않는다. 줄리언 템플 감독은 얼핏 당연하고도 어려운 길을 택한다. “글래스톤베리에 실제로 있는 듯한 느낌, 군중과 함께 축제에 참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연출하고 싶었다는 그는 축제의 구석구석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여기서 구석이라 함은 단지 공간이 아닌 시간까지 포괄한다. 무대 위 록스타의 열창이 진흙탕에서 자기들끼리의 장난에 열중하는 축제 참가자의 모습과 교차되듯, 알몸으로 활보하는 70년대의 히피와 무대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향해 휴대폰을 가져다대는 2000년대의 젊은이가 나란히 보여진다.

창문 사이로 새벽이 오는 걸 보지 않고 사랑에 빠진 거라 할 수 없지. 우린 아름답고 불행한 도둑들. 당신은 이 거리에 서 있네. -모리세이의 <The First of the Gang to Die> 중에서

어둑한 새벽, 글래스톤베리로 향하는 한 무리의 젊은이들을 따라가는 중간중간, <내셔널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하는 내레이션이 글래스톤베리라는 지역의 역사적 의의를 설명한다. 연대기적이지도 않고 귀납 혹은 연역적이지도 않으며 그 어떤 인터뷰이의 설명 자막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영상물은 출처를 알 수 없는 다양한 화질과 포맷의 소스를 이어붙인 거대한 콜라주에 가깝다. 러닝타임 135분의 중반부를 넘어서도 <글래스톤베리>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축제가 계속되는 3일을 모방한 듯 거칠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영화는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고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든 앞으로 나아간다. 동력은 두 가지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전설적인 뮤지션들의 음악, 그리고 평범한 축제참가자들의 눈높이를 정확하게 반영한 시점. 음악과 참가자가 대등한 위치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구성, 그것은 결국 축제의 이상에 가장 근접한 형식이었던 셈이다. 혼란스러울지언정 권위적이지 않은 글래스톤베리의 본질.

주최측에서 의뢰하고, ’의도없이’ 시작한 프로젝트

“이야기를 정제하거나 미화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 80년대 후반 마약을 복용하는 축제의 이면이 90년대의 폭도들과 연결된다. 그러한 이면 역시 축제의 본질이 될 수 있다.” <글래스톤베리>의 혼란스러운 화법에 대한 줄리언 템플의 설명이다. 축제의 진면모는 그 예측 불가능함에 있다. 1970년 9월19일, 지미 헨드릭스가 세상을 뜬 다음날, 자신의 농장을 단 하루 동안 공개하여 음악축제를 열었던 마이클 이비스가 지금의 글래스톤베리를 상상할 수 있었을까. 젊은 농장주가 자신이 참가했던 블루스페스티벌을 작은 규모로나마 재현하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에서 시작한 이 축제가 매년 여름 주말 3일 동안 전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과 함께 자신만의 세상을 건설할 것임을 누가 예상했을까. 1파운드 혹은 무료로 축제에 참가하여 낙원을 꿈꿨던 히피들 역시 그 낙원에 철조망이 둘러쳐지고 티켓 가격은 125파운드에 이르며 여기서 발생한 수익의 일부인 135만파운드가 각종 자선기금으로 사용될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더 왕과 성배의 안식처이며, 성요한이 나타났던 거룩한 땅을 더럽히는 냄새나고 방탕한 히피들에게 거침없이 혐오의 말을 내뱉는 지역 주민들은 어떤가. 조용한 낙농마을의 여름이 그처럼 계속해서 북적일 것임을 알았다면 미련없이 그곳을 떠났을 것이다. 결국 의도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의도대로 되어갈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재밌는 것은 이처럼 자유분방한 대상을 자유분방하게 따라잡는 다큐멘터리가 주최쪽의 의뢰로 시작한 ‘어용’ 프로젝트였다는 사실이다. 2002년 단지 담장을 만드는 데만 100만파운드를 써야 했던 마이클 이비스는 글래스톤베리가 더이상 계속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왜곡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축제를 영화로 기록하는 것에 대해 오랫동안 반대해”왔던 이비스는 독립영화감독이자 축제 집행위원인 로버트 리처드에게 영화화 의사를 밝힌다. 그리고 호명된 것은 줄리언 템플. 평단과 관객에게 고루 외면당한 야심찬 뮤지컬영화를 찍었고, 20년 사이에 섹스 피스톨스에 대한 장편다큐멘터리 두 편을 만들었으며, 데이비드 보위와 블러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한 바 있으니 일단은 적당한 선택으로 보인다. 이비스로부터 무엇이든 찍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낸 템플은 12명의 카메라맨과 함께 2002년의 축제를 기록하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어떤 식으로 영화를 완성해야겠다는 의도없이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자신이 담아내고자 하는 대상과 정확히 같은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너에 대한 사랑을 절대 의심하지 마. 마음가는 대로 생각하는대로 자… 글래스톤베리. -데이비드 그래이의 <Babylon> 중에서

우드스탁과 몬테레이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넘어서겠다는 각오로 제의를 수락한 템플에게 “직업 배우들을 축제 참가자로 캐스팅하여 만든 일종의 페이크다큐멘터리 <글래스톤베리 더 무비>(1995)”는 고민의 대상이 아니었다. “공식적인 홍보물을 찍어내는 아첨꾼”이 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템플이 찍은 것이 분명한 이비스의 인터뷰는 “(글래스톤베리가) 살짝 과대평가된 것은 사실이죠?”라는 식의 도발적인 질문이 오간다. 그의 카메라는 화려한 무대와 동등한 비중으로, 더러움의 극치에 다다른 화장실과 아무 데나 배설을 일삼는 이들을 다룬다.

축제 참가자들이 보내온 1500시간의 영상물 소스

성실하고 엄밀하게 축제를 기록함과 함께 템플은 더 많은 자료를 구하겠다는 생각에서 개인 참가자들이 축제를 촬영한 영상물을 구한다는 공고를 낸다. 이내 템플은 “이 소중한 자료를 삽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료로 이루어진 영화를 만드는 것, 2002년뿐 아니라 글래스톤베리의 역사 전체를 다루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분량의 영상이 모여들었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템플이 직접 찍은 기록에 <BBC>가 공식적으로 찍은 방송기록, 영국영화협회가 제공한 1920년대 글래스톤베리를 담은 영상, 그리고 사람들이 보내온 온갖 포맷의 영상물은 모두 합쳐 1500시간에 달했다. 은밀한 텐트 안에서 탁 트인 무대 앞까지, 몰래 들어오기 위해 담장을 넘는 순간과 마약을 복용하는 순간까지…. 특별한 목적없이 포착된 사적인 광경은 에너지로 충만했다. 38살의 자료제공자는 이를 일컬어 “삶에서 잊혀지지 않을 전기를 글래스톤베리에서 얻었다. 그저 짧은 시간의 기록이 아닌, 손자들과 함께 보게 될 기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줄리언 템플은 글래스톤베리를 다룰 만한 적임자가 아니다. 페스티벌의 원류와도 같은 히피문화와 젊은 시절 템플이 빠져들었던 펑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다. 글래스톤베리가 위치한 서머싯주에서 나고 자란 그가 단 두번만 글래스톤베리페스티벌을 찾은 것도 그 때문이다. “어린 시절 히피들은 그저 패션 모델 같았다. 글래스톤베리는 펑크 정신에는 어울리지 않는, 히피들만의 축제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다.” 1971년 학교를 빼먹고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친구의 등쌀에 못이겨 아침 일찍 일어나 데이비드 보위의 공연을 목격했던 것만을 기억하고 있던 템플은 1997년 클래시의 전 멤버이자 친구인 조 스트러머를 따라 글래스톤베리로 향했다(조 스트러머는 템플의 다음 다큐멘터리의 대상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그해는 26년 만에 데이비드 보위가 귀환한 해였지만 템플은 그저 축제의 외부와 내부를 가르는 철조망이 축제의 정신을 더럽히는 것이 아닐까 잠시 근심했을 뿐이었다. 이에 대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물론 없었다.

템플은 누구보다도 음악적 표현에 익숙한 영화(다큐멘터리) 감독이고, 글래스톤베리는 세기의 문화현상이라 불려 마땅한 음악축제였지만 둘 사이는 가까이 하기엔 꽤나 멀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가장 적절한 거리가 되어주었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내내 템플과 그의 영화를 향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던 이비스는 “줄리언은 글래스톤베리를 진심으로 이해했고, 그 어떤 것도 배제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1차 편집본에 대한 그의 유일한 불만은 폴 메카트니와 오아시스와 라디오헤드 등 글래스톤베리를 찾았던 뮤지션의 공연이 포함되지 않은 것이었지만, 최종 완성본에 라디오헤드가 들어가게 됐음을 알았을 때 매우 기뻐했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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