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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욱의 현장기행] <그 놈 목소리> 촬영현장 [2]

흔들리는 배우의 표정에서 스릴러 기운이

두 촬영지에서 낌새를 챘지만 <그 놈 목소리>가 <너는 내 운명>과 스타일 면에서 분명히 다를 것이라 확신한 건 세트 촬영 첫날인 8월18일 밤이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불안해하던 설경구김남주에게 유괴범의 전화가 처음으로 걸려온 장면. 김우형의 카메라가 긴박한 상황을 한눈에 잡아내고, 김태경 촬영감독의 B카메라가 들고찍기로 김남주의 흔들리는 눈을 극단적 클로즈업으로 촬영하는데 모니터를 통해 전해지는 느낌이 심상치 않다. ‘다 지켜보고 있으니 허튼짓하지 말라’는 그 놈 목소리의 시선을 B카메라로 설정한 것인데, 이 클로즈업된 시점숏이 중간중간 교차편집돼 들어간다는 걸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역동적이고 스릴러적인 기운이 다가왔다. 여기에 이병우의 음악까지 가세한다면 ‘통속’ 사랑극 <너는 내 운명>과 상당한 편차를 가진, 세련된 팩션이 될 성싶다. 물론 스타일리시하다는 건 악도 아니고 죄도 아니다. 다만 박진표 감독이 일관되게 추구하는 팩션의 확장일지, 포장일지가 알쏭달쏭하다.

닷새 뒤, 세트촬영 5일차이던 8월23일 감독에게서 예상치 못한 말을 듣게 됐다. ‘그 놈 목소리’(강동원)가 오지선(?)에게 전화를 걸어 신고 사실을 아는 듯 위협하고, 크게 낙담하는 오지선을 한 테이크로 찍는 대목이었다.

“180도 트랙킹으로 카메라를 돌리는 건 처음인데 이제 이런 것에 적응됐어. 액션신 찍어야 하는 것에 스트레스받는다고 했잖아. 초조함, 긴박함 같은 거 표현하려면 아무래도 카메라를 움직일 수밖에 없어.”

감독의 ‘(심경)변화’에 대한 질문 일정은 이미 맨 뒤로 미뤄둔 터. 이렇게 흘러가는 박진표식 팩션과 교차되는 배우, 설경구 탐색을 위해 현장의 재구성을 다시 해보자. 서울 시내 로케이션에서 접할 수 있었던 설경구의 연기는 초조하게 운전대를 잡고 있던 모습뿐이었다. 하여 눈에 들어온 건, 운전대를 놓은 뒤 더위를 식히며 이따금 장난기 어린 대화를 주도하는 여유로움이었고, 들을 수 있었던 건 한경배에 대한 컨셉이 ‘창백한 지식인’이며 이를 맡은 설경구에게서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얼굴과 이제까지 듣지 못했던 목소리의 연기를 보게 될 것이라는 감독의 확신이었다.

세트촬영 첫날, 감독은 설경구에게 ‘피부연기’를 요구했다. 늦은 밤, 아들의 행방이 묘연한데 TV에서 유괴 살인에 관한 불길한 뉴스가 흘러나오자 한경배의 목덜미에 소름이 쫙 돋는다는 설정. 카메라가 설경구의 목을 뒤에서 클로즈업하고, 설경구가 배에 얼음을 갖다대며 나름 애를 쓴다. 하지만 소름이 기다렸다가 “액션!” 하면 일제히 곤두서기란 난처한 일이다. 발을 얼음에 담가도 보지만 여의치 않다. 이건 보기에 따라 무척 우스꽝스러운 상황이다. 감독도 배우도 이런 피부연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디렉팅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즐겁게 일단 해보는 거였다. 아들 방에 붙어 있는 가훈 ‘끝까지 폼나게. 아님 말고’처럼. 요는 감독과 배우의 유쾌한 호흡이다.

조명과 사운드 등 세팅을 기다리는 동안 감독이 설경구에게 촬영 후반에 펼칠 모종의 연출 아이디어를 꺼내놓은 적이 있다. 설경구가 바로 야유했다. “아주 신파의 바닥을 긁는구나, 긁어.” 약간 당황한 감독이 수습에 나섰다. “신파가 어때서. 영어로 하면 뉴웨이브야. 누벨바그지. 근데 이거 너무 아트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던 아이디어인데….” “저렇게 뻔뻔하다니까. 하긴 내가 저 뻔뻔스러움을 좋아하지. <너는 내 운명> 봐. 욕을 하려도 너무 뻔뻔스럽게 갈 데까지 가니까 욕을 할 수가 없어요.” 둘 사이가 그저 친구 같다.

이 영화의 기본은 설경구, 비장의 무기는 김남주

8월23일 밤 촬영이 끝나고 짤막한 술자리가 벌어졌다. 수사반장 역의 중견배우 송영창이 잠들기 직전 2시간 동안 뭔가 계속 먹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는 익살맞은 고백으로 폭소를 이끌더니 자못 심각한 코멘트로 또 한번 좌중을 즐겁게 했다. “아니 근데 여기는 세트장을 왜 그렇게 돌아? 처음엔 감독만 혼자 도는 줄 알았어. 아니야, 배우도 같이 도는 거야. 거기서 끝나는 줄 알았더니 스탭도 돌아. 왜 그렇게 죄다 도는 거야?” <너는 내 운명> 때부터 이어졌던 ‘산책 연출법’을 말하는 거였다. 박진표 감독은 일삼아 산책을 즐긴다. 촬영 중간중간 툭하면 배우 손을 붙잡고 세트장 바깥을 슬슬 도는 산책에 나선다. 걸으면서 심각한 디렉팅이나 캐릭터 분석을 하는 게 아닐까. 반대다. 편안한 대화로 긴장을 풀어주면서 계산된 연기를 배제시키는 방법이다. 더불어 감독과 배우는 더욱 다정다감해진다.

세트장을 8시간 이상 지켜보다보면 하루의 촬영도 기승전결의 호흡을 탄다는 게 느껴진다. 8월23일 밤 9시 무렵의 촬영은 위기 뒤의 절정이라 할 만했다.

“신고하셨습니까? 신고하면 애는 죽는다고 했을 텐데요?”(강동원)

“네? 무슨… 아니에요… 그런 거 없어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김남주)

“살리고 싶습니까? 정말 애를 살리고 싶어요? 다 보고 있어요. 당신들 일거수일투족을.”

“아저씨 제발….”

“다시 전화하죠.”

“여보세요? 우리 애 밥은 먹였나요? 네? 밥은요?”

세 번째 ‘액션’에 오케이가 떨어졌다. 긴장어린 대화 내용, 오열하는 김남주의 연기가 무안할 만큼 촬영장은 순식간에 희희낙낙하는 화색이 돌았다. 두대의 카메라로 나눠 찍은 장면의 ‘상태’가 누가 봐도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감독은 B카메라로 잡은 장면을 티저 예고편으로 내보내도 되겠다며 한껏 만족감을 표했다. “사실 내 머릿속에선 여전히 냉정을 잃지 않는 오지선의 모습으로 가려고 했거든. 근데 그건 내 머릿속의 판단일 뿐이고 현장에선 그걸 반대로 해낸 배우가 옳아. 여기서 한번쯤 터뜨려주는 게 맞는 거 같아.” 감독은 자기 생각을 거슬러 연기한 김남주에게 공을 돌렸다. 모든 촬영장이 그렇겠지만 <그 놈 목소리>의 현장은 절대적으로 배우 중심으로 돌아간다.

“고마운 건 스탭들에게 배우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고 한 것이죠. 예컨대 조명이 여기 설치돼 있으니까 이리로 오면 안 될까요 하는 거. 카메라도 마찬가지로 배우에게 동선을 맞춰달라고 하지 않아요. 일어서는 것조차 감정대로 가는 건데. 배우에게 부탁을 하지 말라고 하는 건 배우 입장에서는 정말 고마운 거지.”(설경구)

박진표식 팩션 만들기의 포인트는 배우에 있었다. 아무리 대단한 실화의 소재이건 그걸 표현해주는 주체는 배우라는 걸 감독은 의식하고 또 의식했다. “모든 스탭과 약속한 것이, 실은 반협박이었는데, 튀어나오지 말자는 거였다. 카메라, 조명, 미술 어떤 분야든 아빠, 엄마의 심정을 잡아먹는 거 하지 말자고 했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그 놈이라는 컨셉으로 찍는 B카메라를 빼면 미리 정해놓은 콘티조차 많이 무시되고 있다.”(박진표)

실제로 늘 비슷한 톤의 여유만만을 유지하는 감독이 살짝 열받아 있을 때는 배우의 감정을 방해하는 뭔가를 발견했을 때다. 배우에 관한 한 박진표 감독은 양의 탈을 쓴 여우다. <너는 내 운명>의 촬영을 시작하기 전, 감독은 “전도연은 이 영화의 기본이고, 비장의 무기는 황정민이다. 두고봐, 영화 끝나면 황정민이 틀림없이 재평가받을 거야”라고 했다. <그 놈 목소리> 현장을 처음 찾은 8월6일 감독이 슬쩍 귀띔해준 게 이렇다. “설경구가 이 영화의 기본이고, 비장의 무기는 김남주야. 그리고 형사로 나오는 김영철 선배가 미사일이라면 섬뜩섬뜩한 강동원은 잭나이프야. 근데 지금 김남주에게는 칭찬과 격려가 필요해… 몹시….” 김남주는 캐스팅을 앞두고 감독과 처음 대면했을 때, 어딘가 불편해하는 듯한 감독의 표정을 보고 배역을 맡지 않으려 한 적이 있었다. 그랬던 그가 촬영 중반을 향하면서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연기를 하고 있는 건 분명하다. 난 주눅들면 더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칭찬하면 할수록 잘하는 성격인데 감독이 그런 걸 잘 캐치하고 현명하게 끌어준다”고 무척 흐뭇해했다.

김영철이 미사일이라면 섬뜩섬뜩한 강동원은 잭나이프

다시 설경구로 돌아가자. 그는 이 여우 같은 감독의 든든한 친구이자 일종의 기둥이다. 23일 낮, 비밀수사본부가 처음 꾸려진 아파트에서 한경배와 오지선, 경찰들이 들고나는 긴 테이크를 찍는 장면에서 ‘위기’가 감돌았다. 상우 방에서 4명의 프레임 인으로 시작해 5명->6명->4명->3명->모두 프레임 아웃되는 동선으로 움직이는데 계속 뭔가가 어긋났다. 감독의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감독의 코치를 받지 않고 ‘알아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유일한 배우가 설경구였다. 경찰을 절대로 믿지 못하면서도 달리 어쩔 수 없는 심리를 적절히 드러내면서.

아쉽게도 촬영 스케줄의 변동으로 ‘창백한 지식인’이라는 컨셉을 설경구가 어떻게 구현하는지 제대로 볼 수 있는 장면은 뒤로 미뤄졌다. “분석과 준비? 그건 감독이 하는 거고, 난 그냥 표현해보는 사람이죠. 진짜로. 준비하면 준비하는 대로 되나. 감독과 이야기 나누면서 만들어가는 거지. 내 마음이랑 몸이 다 여기 와 있는데 배우가 그러면 된 거 아닌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캐릭터에 대한 ‘섭취’는 충분히 마친 듯싶었다. “비겁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고, 가증스럽다고도 할 수 있고, 너무 자신있는 사람일 수도 있고. 기자로서 앵커는 최고로 올라온 거잖아요. 시나리오 읽다보면 위험해요. 관객이 정떨어져 하는 인물, 와닿지 않는 인물일 수 있거든… 경찰을 잘 아니까 절대 못 믿어요. 그래서 더 무기력한 거지… 어떻게 보면 사회가 만들어준 캐릭터, 사람들이 만든 캐릭터일지 몰라. 그래서 더 외롭고. 한경배가 이런 아이러니를 겪으면서 사람에 대해 이해하게 돼. 사람이 문제가 아니구나 하고.”

설경구가 한경배에 대한 애정을 얼마나 품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박진표 감독에 대해서는 분명하다. “<죽어도 좋아!>를 보고 이렇게 징그러운 사람이라면 내용을 떠나서 믿을 만하겠다고 봤어. 통박이었는데, 잘 모르는 상태에서 통박을 잘 쟀구나 싶어. 머리를 써서 사람을 이렇게 요리하겠다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대하니까. 물론 영화 나오면 다른 말 할지도 몰라. (웃음) 비슷한 통박의 느낌이라면 이창동 감독 정도. 디테일 챙기는 수준? 그것도 이창동 감독 다음 정도!”

이제 박진표식 팩션 만들기의 궁금증을 마무리할 때다. 스트레스였던 액션신과 스타일리시한 앵글이 불과 일주일 만에 익숙해진 까닭 말이다. “익숙해졌다는 것은 두 가지로 들릴 수 있을 텐데. 이렇게 보여지고 있지만 내 마음은 그런 게 아니라는 것과 영화라는 건 어떻게 보여지느냐가 중요하니까 절박하고 긴박한 상황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게 섞였다고 할 수 있을 거 같아. <너는 내 운명> 때는 시골이기도 하고 사랑의 감정을 따라가는 영화여서 철저하게 스타일을 부리지 않았고, 이건 서울 강남의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고, 주요 배경이 자동차이고 거리이기 때문에 카메라도 움직여야 한다는 걸 받아들였다는 말이지.”

솔직히, <그 놈 목소리> 현장의 많은 순간들이 기자이길 잊고 싶어지도록 매혹적이었다. 설경구가 이렇게 살가웠나 싶을 때,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며 배우만큼 은근한 존재감을 보여주던 김우형 촬영감독의 굳게 다문 입을 지켜볼 수 있을 때, 한두 마디의 전화 목소리 연기는 기술적으로 서울에서 처리할 수 있겠으나 현장과의 생생한 리액션을 위해 양수리까지 달려오던 나문희, 강동원의 열정을 마주볼 때…. 이렇게 생겨난 ‘편견’은 <그 놈 목소리>가 완성됐을 때, 정상적인 비평을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 비평의 권한을 기꺼이 포기하며 첫 번째 현장기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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