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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촬영감독 10인 [2] - 에마뉘엘 루베즈키
오정연 2006-09-15

스타일을 만들지 않는 스타일

<슬리피 할로우>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의 에마뉘엘 루베즈키

촬영감독은 카메라를 드는 사람이 아니라, 화면 안의 무드를 만드는 사람이다. <이투마마> <위대한 유산> <구름 속의 산책>처럼 태양광을 매력적으로 포착한 로케이션영화와 <슬리피 할로우>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처럼 조형적인 세트 안에서 모호한 시공간의 리얼리티를 재현한 영화. 얼핏 연결되지 않는 듯한 영화들을 촬영한 에마뉘엘 루베즈키는 그 오묘한 무드를 가장 중요시한다. 그의 화면은 더위와 추위, 음산함과 따뜻함, 딱딱함과 말랑말랑함 등 직접적인 감각뿐 아니라 독특한 시대의 정서와 숨결까지 전달한다.

<위대한 유산>

‘치보’라는 애칭으로 통하는 루베즈키는 그러나 촬영감독의 기계적인 덕목에는 관심이 없다. 강렬한 콘트라스트보다는 방향을 파악할 수 없는 부드러운 조명으로 분위기를 만든다. 풀숏과 클로즈업에서 빛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들어오는 경우도 생기지만, “촬영감독이 아닌 이상 그런 차이를 눈치챌 관객은 없”기에 별 상관없다. 동료들에게 사소한 오류를 지적당하는 것보다 관객에게 설익은 촬영을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 더욱 부끄럽다. 동시대 촬영감독들이 한 영화에서 몇 가지의 필름을 섞어서 촬영하고, 자극적인 화면을 만들기 위해 블리치 바이패스 등 특별 현상을 시도하며, 최종 프린트를 만들기 전 필름을 스캔하여 디지털로 전체적인 톤을 매만지는(DI) 모든 공정에는 무관심하다. <소공녀>와 <슬리피 할로우>에서 그는 충분히 테스트한 한 가지 필름만을 사용했고, 특별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특수필터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화려한 무빙을 뽐낼 법도 하건만 <레모니 스니켓…> 등 톡톡 튀는 영화에서도 카메라는 신중하다. “촬영으로 스타일을 만들려고 들면 제약을 두지 않고, 과잉된 화면을 남발하게 된다. 촬영감독이 나름의 작은 룰을 깨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는 중요하다.”

케케묵은 편견에서 자유롭되 새로운 기술에는 조심스레 접근하는 루베즈키는 비교적 일찌감치 촬영의 매력과 임무를 몸에 익혔다. 배우 아버지 밑에서 12살 때부터 흑백사진을 찍으며 이미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멕시코 국립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할 무렵, 대부분의 동기들이 감독을 지망한 덕에 “친구들의 영화를 망쳐가면서 촬영의 기본을 배웠다”. 27살에 촬영한 두 번째 장편이자 알폰소 쿠아론의 첫 장편영화는 멕시코의 오스카에 해당하는 아리엘 촬영상 후보에 올랐고, 세 번째 장편으로 아리엘 촬영상을 거머쥐었다. 그는 최연소 수상자였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3년 연속 그 상을 차지한 첫 번째 주인공으로 기록됐다. 일찌감치 할리우드에 건너가 <청춘 스케치> 등을 찍으며 단짝을 기다렸고, 그가 촬영한 알폰소 쿠아론의 첫 번째 할리우드 진출작 <소공녀>는 아카데미 촬영상 후보에 지명됐다.

그 뒤로도 <위대한 유산> 그리고 <이투마마>까지, 쿠아론과 함께한 루베즈키의 필모는 계속된다(5년 만에 호흡을 맞춘 <칠드런 오브 맨>도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멕시코의 생생한 활기를 포착한 <이투마마>의 화면은 분명 매력적이었지만, 할리우드 초년병 시절 생생한 공기를 전달하는 그의 장기는 완벽하게 연극적인 세계에 나름의 활력을 불어넣는 것에 있었다. 팀 버튼이 자신의 영화 중 유일하게 시대극과 판타지의 속성을 동시에 지닌 영화 <슬리피 할로우>의 촬영감독으로 그를 지목한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치보에게 <블랙 선데이>를 가장 중요한 참고영화로 제시했고, 그는 그 작품의 무드를 포착해 자기 방식으로 소화했다. 또한 그의 작업 속도는 매우 신속해서, 거대한 세트에 복잡한 조명설정이 필요한 영화였음에도 촬영 파트 때문에 일정이 지체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

루베즈키는 <슬리피 할로우>를 찍을 당시, 팀 버튼과 프로덕션디자이너 릭 하인리히, 의상담당 콜린 앳우드 등 이미 탄탄한 팀워크를 이룬 이들 사이에서 “학생의 입장으로 돌아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고 한다. 그리고 5년 뒤 하인리히와 앳우드, 루베즈키는 희극과 비극이 절묘하게 결합한 또 다른 판타지영화 <레모니 스니켓…>에서 조우한다. 루베즈키와의 두 번째 작업에 임하는 이들은 “광각렌즈를 선호하는 감독과의 작업은 만만치 않다”고 털어놓는다. 25mm를 표준렌즈 삼고(일반적으로 35mm 카메라의 표준렌즈는 50mm), 40mm 이상의 렌즈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그의 카메라는 프레임의 구석구석, 세트의 바닥부터 천장까지 드러내기 일쑤여서 세트디자인은 언제나 난감하다. “망원렌즈로 촬영한 인물의 클로즈업은 친밀감을 더한다”는, 일반적인 촬영의 기초를 그는 믿지 않는다. “그렇게 찍힌 인물은 실제로 카메라에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공적인 느낌을 준다. <슬리피 할로우>에서는 망원렌즈에 아웃포커스로 배경을 지우기보다는 배경 속의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고, <레모니 스니켓…>에서는 10cm 거리에서 아이들을 촬영했다. 렌즈와 실제로 가까이 위치한 배우들의 반응을 지켜보는 것은 멋진 일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친밀감은 영화의 이야기에도 도움이 된다.”

루베즈키의 인물 클로즈업이 지닌 기이한 힘은 그 때문이다. 자신의 촬영부였던 로드리고 가르시아 감독의 연출작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은 그러한 능력이 극대화된 영화다. 꼼꼼하게 짜여진 현실의 그물 밖으로 비어져나오는 마법 같은 순간을 동력삼는 이 영화 속 주인공들 모두는 한번씩 단독 클로즈업으로 자신의 맨 얼굴을 드러낸다. 그녀들이 내뱉는 한숨까지 느껴질 듯 가까운 거리감이 일상 속에서 맛보는 특별한 교감을 방불케 한다. 그는 지극히 고전적이고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영화만이 가능한, ‘리얼한 마법’을 펼쳐 보인다.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상기하자면, 그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땅 라틴아메리카에서 건너왔다.

올해 초 개봉한 루베즈키의 최근 촬영작은 <뉴월드>. <황무지>와 <천국의 나날들> 등 자연주의적이며 명상적인 화면의 대가 테렌스 맬릭이 그를 선택한 것이다. 17세기의 신대륙이라는, 그 누구도 직접 경험하지 못했지만 생생한 재현이 관건인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촬영감독으로 루베즈키는 제법 잘 어울린다. <뉴월드>는 루베즈키의 필모에서 오랜만의 귀향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잠시 이별해야 할 것은 스튜디오 지붕 밑에서 어마어마한 조명기들과 함께했던 날들뿐만이 아니었다. 크레인이며 중장비, 영화조명, 그리고 엽서처럼 어여쁜 화면까지 최대한 배제해야 했다. 온전히 태양에 의지하여, 인내심과 순발력을 테스트받는 촬영의 연속. 영화 자체는 실망스럽다는 평가가 중론이지만, 루베즈키는 맬릭의 테스트를 온전히 통과한 모양이다. 그의 차기작은 테렌스 맬릭의 새 영화로 일찌감치 낙점된 상태다.

이 장면! <슬리피 할로우>의 숲

실내와 실외 공간의 자연스런 연결

<반지의 제왕>을 비롯한 일련의 판타지영화 이전에 선보인 <슬리피 할로우> 속 실외 공간은 다소 독특하다. 언제나 안개가 자욱한 숲속과 음산한 마을…. 실내 세트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고, 야외 로케이션 세트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놀랍게도 숲속은 실내에서 촬영했고, 아기자기한 마을은 야외에 세트를 지었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실내와 실외 촬영 분량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것”이었다는 팀 버튼은 “치보가 이를 훌륭하게 성공시켰다”고 말한다. 마을로 향하는 숲길은 영화의 분위기를 한눈에 보여주는 공간이다. 어디서 귀신이 나타날지 모르는 기괴한 숲이 만들어질 스튜디오에 처음 들어선 루베즈키는 스튜디오로서는 치명적인 결점인, 낮은 천장에 경악했다. 결국 그는 500여개의 조명기로 천장을 채우고, 모든 조명기의 밝기를 컴퓨터로 조절할 수 있는 시스템을 완비했다. 그리고 뿌연 스모크를 가득 채우면, 그림 같은 세트 안에는 순식간에 영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조명기로부터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빛은 영락없이 두터운 구름을 뚫고 오는 햇빛이었다. 복잡한 보조조명으로 기교를 부리지 않는 루베즈키는 든든하고 확실한 세팅으로 화면의 분위기와 촬영의 속도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번에 잡았다. 나무의 검은색과 안개가 대조를 이루면서 전반적으로 낮아진 채도를 지니게 된 숲은 영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애초에 흑백영화로 <슬리피 할로우>를 완성하고 싶었던 팀 버튼에게 루베즈키가 선사한 매력적인 모노톤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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