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년 전 호텔 파친코를 일제 단속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사회부 말단 기자여서 이런저런 취재에 동원됐다. 도박중독자의 자구모임인 ‘단도박’ 회원 몇몇을 취재했는데, 아직도 기억에 남는 40대 중반의 K씨. 그는 슬럿머신 중독이었는데, 도박 경력이 20년이었다. 대기업 사원이었던 그는 회식을 마치고 직장 선배와 함께 파친코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20년간 6억원을 잃었다고 했다. 도박을 끊기 위해 경찰에 신고도 하고 언론사에 제보도 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K씨는 검지가 없는 오른손을 내보이며 “가족 잃고 재산 다 잃고 난 뒤에 하도 화가 나서 손가락을 잘라버렸다”고 했다. 그런데 K씨는 상처가 다 아물기도 전에 붕대 감은 손으로 다시 슬럿머신을 당겼다고 했다.
이 당시에도 성인 남성 10명 중 1명은 기계도박에 중독돼 있는 걸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이 엄청난 시장을 업자들이 가만둘 리 없지 않은가. 호텔 파친코가 문을 닫자 무허가 성인오락실은 오히려 호황을 맞았다. 파친코 단속 직후 내가 취재한 한 불법 성인오락실의 경우 한달 수입이 2천만원에 달했다. 이중 500만원은 ‘상납지분’이라고 했다. 이때 불법인 성인오락실이 대로에서 버젓이 영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검경과 관련부처 내부의 매수당한 일부 양아치들이 ‘단속’이란 용어를 ‘보호하고 육성함’으로 해석했기 때문일 터이다.
어쨌거나 불법 성인오락실이 암암리에 성업 중인 상황에서 김대중 정권 때부터 합법적인 ‘경품오락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 오락실은 환전이 안 되고 점수를 모았다가 물건으로 주는 오락실인데, 주택가와 대학가 앞까지 난립해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바다이야기’ 같은 사행성 게임장이 경품 오락실을 대체했다. 그 숫자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업소 이름도 이미 도박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진 ‘성인오락실’ 대신 ‘게임장’으로 바뀌고 ‘문화상품권’ 제도가 도입됐다. 허가해준 자들의 명분은 이렇다. ‘오락기계 보급은 게임산업의 발전에 기여하고 문화상품권의 보급은 문화산업의 발전에 기여한다.’(이 종자들은 의료산업 발전을 위해 전 국가적으로 페스트 세균을 보급할 계획도 갖고 있을 것 같다.)
늙은 작부는 썩은 얼굴을 덮기 위해 요란한 화장을 하는 법이다. 바다이야기는 게임산업이나 문화산업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바다이야기 사태는 오래전부터 존재해온 지하의 기계도박 산업을 둘러싼 먹이사슬이 지상으로 머리를 쳐들고 올라온 사건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관광수입’을 위해 일부 관광호텔에 허가해준 호텔 파친코가 내국인으로 가득해서 폐업조치되자, 무허가 성인오락실의 형태로 지하에 잠복해 있다가, 합법의 탈을 쓰고 전국의 주택가로 파고든 것이다. 합법화의 과정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아직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과거 불법 성인오락실 시절보다 바다이야기가 모든 점에서 진화한 ‘악’이라는 점이다. 기계는 합법의 조건을 충족시키면서 사행성을 높이기 위한 복잡한 장치를 갖춘 탓인지 대당 가격이 500만원씩 하는 첨단으로 바뀌었다. 기계 제조업과 상품권 유통업에는 전국의 조폭들이 개입해 있다. 비호세력도 불법 시절에는 푼돈을 얻어먹으며 단속 정보나 흘려주던 일부 부패한 검경 직원에서 합법화의 명분을 만들고 법개정을 실행할 수 있는 영향력있는 자들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바다이야기의 피해자는 속출하는데 가해자는 오리무중이다. 합법과 제도 속에 기생하면서 전략적으로 탈법을 구사하기 때문이다. 과연 검찰이 이 교활한 먹이사슬의 뿌리를 밝혀낼 수 있을까? 검찰은 왜 수십년간 존속된 불법 성인오락실을 뿌리뽑지 않았을까? 언론은 대통령 친인척과 청와대 측근들의 개입을 집중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언론은 왜 오락실이 독버섯처럼 번져나가는 수년 동안 미온적 태도를 취하다 이제야 요란하게 뒷북을 치는 걸까? 무수한 도박중독자를 양산하는 구조적 현실보다 대통령 조카의 상품권 사업 개입이 더 중요하단 말인가? 기계도박은 소수의 악당들이 기술과 권력과 명분을 내세워 국민의 호주머니를 털고 있는 구조적 현실이다. 바다이야기가 된서리를 맞자 짝퉁 게임장은 오히려 성업 중이란 소리도 있고, 문화상품권을 대체할 ‘딱지상품권’이 등장했다는 기사도 있다. 그런데도 온통 바다이야기와 권력의 개입에 대한 의혹밖엔 없다. 검찰과 언론이 싸우고 있는 것이 기계도박의 구조적 현실이 아니라 바다이야기를 둘러싼 정치드라마라면 도박중독자는 앞으로도 계속 생겨날 것이다. 바다이야기 논란은 저마다의 정치적인 저의로 가득한 또 다른 한편의 바다이야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