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무렵, 대학교 M.T 자리에 자주 등장하던 놀이 중 이미지게임이란 게 있었다. 술잔을 돌리고 술을 가득 따른 뒤 한 사람이 질문을 던지면, 나머지 사람들은 답변에 해당하는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이중에서 학창 시절 가장 잘나갔을 것 같은 사람은? 가장 잘 안 씻을 것 같은 사람은? 가장 거짓말을 잘할 것 같은 사람은? 질문의 종류는 광범위하다. 정말 유치한 것부터 꽤 심오한 난이도까지. 질문이 떨어지면 사람들은 주위를 살피기 시작한다. 과연 어떤 사람이 잘 안 씻을까, 어떤 사람이 잘나갔을까, 어떤 사람이 거짓말을 잘할까.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이미지의 실체는 곧 다수의 손가락질을 받은 사람의 모습으로 대체된다. 호쾌하거나 어색하거나, 웃음이 터져나온다. 하지만 사실 가장 안 씻을 것 같은 사람으로 지목받을 때, 마냥 웃고만 있을 속 편한 사람이 있을까. 또 거짓말을 가장 잘할 것 같은 사람은 정말 거짓말쟁이일까, 혹시 다른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미지를 이용한 사냥의 거북함. 이 놀이의 위험은 바로 불명확함에 있다.
홍상수 감독의 신작 <해변의 여인>을 보면서 이미지게임을 떠올렸다. 중래(김승우)는 문숙(고현정)을 좋아하지만, 그녀가 외국인과 사귄 적이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외국인과 사귄 여자라는 이미지. 중래의 이미지론을 빌리면 그는 어떤 이미지가 주는 전형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우고 있다. 실체에 다가가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물론 그 실체는 다수의 손가락질로 결정되는 이미지의 그것만큼 명확하지 못한 무엇이다. 혹은 다가설 수 없는 도형이다. 그렇다면 이미지게임은 어떻게 성립되는 걸까. 다수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짓말의 결과물일까. 손가락의 판단은 최소한의 객관적 정보도 결여되어 있는 술기운일까. 중래는 이미지의 이미지를 넘어 어디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이미지를 넘어선 이미지란 존재할까. 트랙을 넘어선 답변들. 홍상수 감독은 2005년 여름 어느 자리에서 “디스크라는 게 있다. 아니 그걸 디스크라고 부르자. 트랙에는 이런저런 것들이 시끄럽게 존재하고 있지만, 그 너머에도 무언가가 바스락거리고 있다“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 바스락거리는 그 무엇은 중래의 노트에 남겨진 아메바 같은 도형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하지만 중래는 “한국에서 잘 안 팔리는 여자들이 외국에선 잘나간다”며 치사한 트랙을 플레이했다. 한국에선 안 팔리지만 외국에선 잘나갈 것 같은 이미지는 누구? 불행하게도 현실에서 레코드의 히든트랙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가끔 나의 이미지를 오해하곤 한다. 가끔은 활발한 B형이, 가끔은 소심하고 조용한 A형이 된다. 물론 누구나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대처하며, 장소에 따라 다른 이미지를 갖고 있겠지만, 나는 조금 더 심각하게 아메바 같은 그 무언가도 감지할 수가 없다. 중래처럼 싸우고 싶은 이미지도 없다. 가장 안 씻을 것 같은 사람으로 지목되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가장 인기가 있었을 것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웃으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인생이 어차피 트랙 밖의 일이라고 할 때, 나의 이미지는 위험천만한 그 무엇이다. 때로는 부서지고, 때로는 바스락거리는. 그래서 나는 홍상수의 영화가 좋다. 희망을 남기더라도 손가락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정 힘이 들면 중래처럼 세 그루 나무에 대고 절을 하면 된다. 어디서 본 듯한 여자를 따라 여행길에 나서더라도 생각을 멈추지 않는 한 무너지진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