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내면서 치부라고 말하는 건 좀 변태스럽지만 어쨌거나 나의 101가지 치부 가운데 하나는 행동거지가 꽤나 무식하다는 거다. 남자관계에서 말이다. 그 기나긴 고함과 욕설과 때로는 무언가 날아다님의 역사를 펼쳐놓고 싶지는 않다. 딱 두 가지만 이야기하겠다. 지금 사는 집에 이사오기 전 옆집 사람들이 나의 소속을 알게 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고- 나 하나 욕 먹는 건 참을 수 있어도 회사 이미지에 먹칠은 할 수 없다는 애사심, 샤방!- 성질 많이 죽인 요즘도 음, 실은, 음, 가끔, 아주 가끔 화가 나면 “야, 이 삐이익아!”가 튀어나온다. 흠흠. 이런 무식한 삑!
내가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남몰래 하반기 최고 기대작 가운데 하나로 올려놓았던 이유도 방송에서 영화의 ‘진국’ 장면들을 미리 보여줬을 때 떠오르는 아스라한 기시감 때문이었다. 그래 뭐, 저렇게 연애할 수도 있는 거지. 존대말을 쓰며 우아하게 신경전을 벌이건 육두문자 휘날리며 육탄전을 벌이건 연애는 다 똑같은 거 아니겠어? 신경전 벌이는 연애는 고상하고 육탄전 벌이는 연애는 천박하다는 것도 다 선입견이라고. 욕하는 장진영의 절절한 눈빛을 봐. 사실은 저런 연애가 더 진실할 수도 있는 거야, 라며 나는 내 연애사를 얼룩지게 한 그 무식함의 알리바이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본 다음 결. 심. 했. 다. 다시는 내 지성과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무식한 언어와 행동을 절대로 하지 않겠노라고. 그러니까 나는 남보다 솔직하고 더 뜨거웠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했던 것이 아니라 다만 그냥 진짜 무식한 저질기가 있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라는 게 이 영화가 나에게 준 깨달음이었기 때문이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솔직한 연애담’이라기엔 이 영화는 너무 무식하다. 그건 연아가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이고 영운이 몸 따로 마음 따로 노는 이중 생활을 하는 남자라서가 아니다. 술집 여자와 이중 생활을 하는 남자에게도 엄연히 순정을 가질 권리는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룸살롱 취업인들의 라이프 스타일과 여자나 가족을 등쳐먹으면서도 일말의 거리낌없이 해맑게 사는 남자들의 생태학만이 생생하게 녹아 있을 뿐 이 구차하고 통속적인 삶에서 주인공들을 잠시나마 구원해주는 순정은 찾아볼 수가 없다. 특히 영운이 무기력하고 우유부단한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연아에게 아무런 연민- 습관은 있다- 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건 둘의 징글징글한 사연을 “정 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줬지만 지금은 남이 되어 떠나가느냐”라는 가사의 노래방 배경화면으로 강등시켰다. 바른말, 고운말이 오가더라도 연민없는 연애는 창백한데 쌍욕과 주먹질이 오가는 상황에 그것마저 없다면 전쟁통과 무엇이 다르랴. 결국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마치 패잔병만 남은 전쟁영화를 보는 듯한 피로와 우울을 남겼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