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여섯 살 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동네를 휘감고 흐르던 개천은 발가벗고 헤엄칠 수 있을 만큼 깨끗하고 맑았다. 까맣게 살이 익은 아이들은 개천가를 우우 몰려다니며 개구리를 잡거나 숨바꼭질을 했다. 당시 악의없는 장난에도 눈물을 쏟아내던 나는 동네 악당들의 놀림감이었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대판 싸우기라도 하면 될 텐데, 왜 그렇게 바보같이 당하기만 했는지 모르겠다. 어느 날 회사로 출근하는 버스 안에서 우스운 옛일들을 되새기며 나도 모르게 혼자 히죽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동네 얼간이들에게 고함을 지르던, 두살 터울의 여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나는 언제나 여동생과 함께였다. 동네 뒷산을 오르거나 개울가를 쏘다니거나 동네 개구쟁이들과 시비가 붙을 때도.
이렇게도 징한 기억을 공유했건만 우리 자매는 그다지 비슷한 점이 없다. 내가 무턱대고 어디든 나돌아다니는 ‘방랑’형 인간이라면, 동생은 하루종일 집에서 뒹굴어도 도통 지겨운 줄 모르는 ‘방콕’형 인간이다. 한달에 한번씩 헤어스타일을 바꿔대는 예민한 동생과 달리, 나는 대충 혹은 아무렇게나를 모토 삼아 그저 최대한 손 안 대도 괜찮은 편한 모양새를 추구하는 편이다. 구두와 친한 동생, 그리고 운동화를 사랑하는 나. 이럴진대 좋은 일만 있었을 리 만무하다. 고함을 지르다가 급기야는 물건을 집어던지며 싸운 일도 부지기수. 내쪽에선 절대 양보하지 않으려는 동생이 미웠고, 동생쪽에선 아는 척, 잘난 척하는 언니가 눈꼴사나웠을 것이다. 엄마의 알력으로 짧게나마 휴전하기도 했지만 곧 다시 전쟁에 돌입할 일들이 생겨나곤 했다.
무려 20년을 동생과 투닥거렸던 나는 대학 진학을 계기로 상경하면서 혼자 살아가기 시작했다. 2년 후 동생은 같은 이유로 제주도로 건너갔다. 자랄 만큼 자랐고 싸울 만큼 싸웠기 때문일까. 우리는 싸움박질 대신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서로 타지생활을 위로하곤 했다. 방학이 되면 오랜만에 만난 기쁨에 만화책과 비디오를 고르고 쇼핑하며 돈독한 자매애를 쌓았다. 물론 가끔씩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그건 이토록 다른 우리 사이에서 생기는, 어찌할 수 없는 잡음 아니던가. 내가 졸업하고 직장을 얻어 서울에 눌러앉은 사이, 동생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힘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이것저것 시도했던 그앨 생각하니 안쓰럽다는 생각도 든다.
얼마 전 그녀에게서 8월15일이 빨간 날인데 쉬지 않느냐는 문자가 날아왔다. 심심한 참에 서울로 한번 놀러오고 싶단다. 그러라곤 했지만 바쁠 것 같다는 뉘앙스를 은근슬쩍 흘린 탓인지 올라오겠다는 소식이 없다. 설마 그런 걸로 삐진 건 아니겠지. 네가 진정 쉴 곳을 원할 땐 언제든 너를 반겨줄게. 다 아는 사이에 낯간지러운 말을 던지자니 뭔가 울컥 하는 게 새삼 부끄럽고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