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부터 구미 예술영화 DVD 시장에서는 동구권 영화들의 출시가 붐을 이루고 있다. 특히 영국 ‘세컨드 런’과 미국 ‘파셋 멀티미디어’의 노력이 두드러진데, 그 덕에 그동안 영화사 교과서에서 이름으로밖에 접할 수 없었던 동구권 감독과 작품을 접할 기회를 한껏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나마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밀로스 포먼, 안제이 바이다, 이리 멘첼, 미클로시 얀초 등의 작품 외에도 폴란드의 안제이 뭉크, 리스차드 부가츠키, 체코슬로바키아의 야로밀 이레스, 베라 치틸로바, 에바트 쇼름, 헝가리의 벨라 타르 등의 작품들이 연이어 DVD로 출시되어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동구권 영화들의 숨겨진 진가를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 소개하는 <다섯 번째 기수의 두려움> 역시 1964년 제작된 체코슬로바키아영화로 체코 뉴웨이브의 일단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작품 중 하나다. 나치 치하의 프라하에서 유대인 압수물품 창고를 관리하는 대가로 처형을 면제받은 유대인 전직의사 브라운이 어느 날 총상을 입은 레지스탕스 치료를 위해 모르핀을 구하면서 겪게 되는 상황을 묘사한 영화는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강한 알레고리를 내포하고 있다. 밀고자와 비밀경찰의 협박, 그리고 감시의 공포에서 비롯된 집단 히스테리아 등은 나치즘에 대한 직접적인 역사적 서술인 동시에 스탈린주의 아래의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은유이다. 작품에 나타난 표현주의적 영상미와 다자적 내러티브, 그리고 동시대 페데리코 펠리니를 연상시키는 전위적이며 퇴폐적인 설정과 묘사 등은 사회주의 스튜디오 시스템에 기반하면서도 동시에 기존 사회주의 사실주의와 구별되는 실험적 영상을 구현하고 있어, 감독 즈비넥 브리니치가 체코 뉴웨이브의 중심이던 포먼, 이레스, 치틸로바보다 반 세대 앞선 선배임에도 체코 뉴웨이브의 예술적 흐름과 전개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준다. 1968년에 미국 공개 당시 열혈 청년평론가였던 로저 에버트에게 완벽한 영화라는 평가를 들은 바 있지만, 프라하의 봄 이후 브리니치는 자국 내에서 평범한 감독으로 전락했고 그의 이름은 잊혀져갔다. 미국 시카고의 시네마테크 파셋 멀티미디어에서 발매된 이번 타이틀은 복원된 필름에서 새로 마스터했다고 소개되어 있지만 화질 자체는 기대 이하이며, 자막도 대사의 뉘앙스를 충분히 전달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실하게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원본의 열악한 화질에도 불구하고 매체 본연의 역할인 디지털 저장과 기록 기능을 통해 잊혀졌던 걸작을 쉽게 접할 기회를 준 것만으로도 DVD 매체의 존재의의가 십분 발휘된 타이틀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