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칸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과 각본상을 수상한 <멜키아데스 에스트라다의 세 번의 매장>은 토미 리 존스가 위대한 웨스턴의 계승자이자 사려 깊은 작가임을 증명한다. 국경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이란 점에서 존 세일즈의 <론스타>를 떠올리게 하지만, <멜키아데스…>의 영혼은 샘 페킨파의 <알프레도 가르시아의 목을 가져와라>에 더 가깝다. 거기에다 뒤섞인 시간, 시점의 교차와 반복, 상처입은 자의 이야기가 왠지 낯익다면 <21그램>과 <아모레스 페로스>의 작가 기예르모 아리애가를 기억해볼 일이다. 멕시코와 면한 미국의 국경 마을에서 불법 이주 노동자 멜키아데스 에스트라다가 총에 맞아 죽는다. 그를 고용했던 농장주 퍼킨스는 총을 쏜 사람이 신참 국경 수비대원인 노튼임을 알아내고, 노튼을 납치해 시신과 함께 멜키아데스의 고향 마을로 향한다. 한 남자가 어떻게 해 세번 매장됐으며, 세 남자의 여정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영화의 답은 거기 있다. 존스는 국경이란 변방에 사는 미국인들, 그중에서도 노튼에게서 미국인의 얼굴을 찾는다. 폭력과 무자비, 무관심을 가장한 불안을 뭉쳐둔 그는 미국의 병폐, 야만성, 양심을 상징하는 인물인데, 그가 죽은 자와 떠나는 여정은 (뱀에 물린 그의 발이 낫는 것처럼) 치유, 구원, 속죄의 길로 변해간다. <멜키아데스…>는 다름 아닌 한편의 의식이다. 그 과정에서 퍼킨스는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자의 시신을 꺼내 약속의 땅으로 이끄는 행위를 통해 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우정을 완성한다.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모호한 인물로 바뀌는 멜키아데스는 단지 이루지 못할 이상향을 꿈꾸던 방랑자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백년의 고독>에 등장하는 멜키아데스가 그랬듯이 온갖 신기한 물건을 미국인에게 보여줄 이방인이 될 수도 있었다. <멜키아데스…>는 이방인을 예의없이 매장함으로써 미국인이 잃어버린 기회를 되돌리는 거대한 작업이다. 죽은 자를 이상향에 묻는 퍼킨스는 정화된 미국인 노튼을 뒤로한 채 다시 길을 떠난다. 아마도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멕시코에서 떠돌이로 살아갈 것이다. 사라진 옛 친구를 기억하면서. <멜키아데스…>는 미국인의 손으로 그린 냉정한 자화상이면서 동시에 남자들의 순정이 곳곳에 밴 웨스턴이다. 특별판으로 출시된 프랑스판과 달리 미국판의 사양은 음성해설만을 부록으로 수록해 평범하다. 말미의 몇 마디를 제외하곤 대부분 영화보다 제작 이야기로 일관하는 감독과 두 배우의 음성해설 또한 심심한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