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여, 장미처럼 妻よ薔薇のやうに Wife! Be Like a Rose! 1935년, 흑백, 74분, 출연 지바 사치코, 마루야마 사다오, 이토 도모코
미국에서 처음으로 상영된 일본 토키영화로 기록되어 있기도 한 <아내여, 장미처럼>은 나루세의 초창기 성공작이며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영화다. 원작이 되는 나카노 미노루의 신파극 제목이 <두명의 아내>이듯이, 영화는 두명의 아내를 가진 남자라는 설정에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슌사쿠는 에츠코라는 법적 아내를 떠나 시골 마을에서 전직 게이샤 출신인 오유키와 함께 살고 있다. 에츠코의 딸 기미코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되찾아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아버지를 찾아간다. 진정한 아내의 미덕, 혼인 생활의 어려움, 고독에의 공감을 서정성 짙은 터치로 그려낸 작품. 이 영화가 만들어진 지 2년 뒤에 나루세와 결혼하게 되는 여배우 지바 사치코가 기미코 역을 맡았다.
긴자 화장품 銀座化粧 Ginza Cosmetics 1951년, 흑백, 87분, 출연 다나카 기누요, 가가와 교코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가족의 덫에 걸려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신세의 여인을 그린 또 한편의 나루세 영화. 아들을 키우기 위해 ‘벨 아미’라는 긴자의 바에서 일하며 기대와 실망감을 겪는 중년 여성 유키코의 초상을 세심한 필치로 그려냈다. 영화는 나루세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공간과 그곳 사람들에 대한 풍속도가 되기도 한다. 가끔씩 나오는 코믹한 상황들이 영화의 재미를 더한다.
밥 めし Repast 1951년, 흑백, 96분, 출연 우에하라 겐, 하라 세쓰코
나루세의 여인들에게 가정은 편안한 안식처가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감옥 같은 곳이 되곤 한다. <밥>은 그런 여인이 느끼는 심리를 탁월하게 그려낸 나루세 영화들 가운데 하나다. 오사카에서 남편 하쓰노스케와 살고 있는 미치요는 결혼 5년째에 접어들면서 매일 같은 나날을 보내는 자신의 삶에 회의감을 갖는다. 그러던 어느 날 도쿄에 사는 다분히 자유분방한 조카 사토코가 이들 부부를 찾아오면서 미치요의 마음에 생기는 파문은 커진다. 결국 그녀는 새로운 삶을 찾아보겠다며 홀로 도쿄로 향한다. 영화에는 미치요를 중심에 두고 그녀가 삶에 대해 느끼는 실망감, 자유의지에의 투쟁, 정서적인 모호함 등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작가 하야시 후미코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여섯편의 나루세 영화 가운데 첫 번째에 속한다.
부부 夫婦 Husband and Wife 1953년, 흑백, 87분, 출연 우에하라 겐, 스기 요코, 미쿠니 렌타로
<밥>이 호응을 얻자 속편으로 기획된 영화로 이번에는 또다시 남편을 연기한 우에하라 겐의 아내 역으로 전편의 하라 세쓰코 대신 스기 요코가 나온다. 나카하라와 기쿠코 부부는 부모의 집을 떠나 다케무라의 집에 세들어 살게 된다. 그런데 부인 기쿠코가 집주인에게 호감을 갖는 듯한 낌새를 챈 나카하라는 질투심에 빠져들게 된다. 뻔뻔스럽다고 할 정도로 거리낄 것없이 행동하는 다케무라와 다소 내향적인 나카하라 사이의 대조를 중심으로 빚어지는 갈등 상황이 가벼운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영화다.
아내 妻 Wife 1953년, 흑백, 89분, 출연 우에하라 겐, 다카미네 히데코, 단아미 야쓰코
<밥> <부부>에 이어 활기 잃은 결혼생활을 다룬 3부작을 마무리하는 작품. 나루세의 페르소나인 다카미네 히데코가 우에하라 겐과 위기에 빠진 부부를 연기한다. 도이치와 미호코 부부는 지난 10년간의 결혼생활을 덤덤하게 보내온 사이이다. 그런데 남편이 회사의 동료에게 마음을 뺏기자 부부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돈다. 이제 그 수명이 다한 듯한 관계에 대한 사려 깊은 영화로 인간 행동에 대한 나루세의 예민한 관찰력이 돋보인다. 하야시 후미코의 작품이 원작인 영화들 가운데 하나이다.
산의 소리 山の音 Sound of the Mountain 1954년, 흑백, 96분, 출연 하라 세쓰코, 우에하라 겐, 야마무라 소
나루세적인 씁쓸함을 맛보게 하면서 결혼의 위기를 절묘하게 다룬 <산의 소리>는 나루세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자신의 영화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 작품이다. 영화는 남편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하는 정숙한 여인 기쿠코, 그녀에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으며 다른 여자와 놀아나는 그녀의 남편 신고, 그리고 며느리가 안쓰럽다고 느낄수록 그녀를 더 살갑게 대하는 기쿠코의 시아버지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야기 정보를 감추고 드러낼 때를 정확히 아는 내러티브 전개,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 감상적인 서정성 등이 절묘한 조화를 이뤄 보는 이를 애절한 미감에 젖게 만든다. 삶의 쓰린 현실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마지막 시퀀스는 특히 깊은 인상을 남긴다.
부운 浮雲 Floating Clouds 1955년, 흑백, 123분, 출연 다카미네 히데코, 모리 마사유키, 오카다 마리코
하야시 후미코의 소설에 토대를 둔 <부운>은 나루세의 명실상부한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며 일본 안에서 가장 사랑받는 나루세 영화로도 꼽힌다. 이 처연한 러브스토리는 전쟁 동안 동남아시아에서 함께 근무했다가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종전 뒤 일본에서 재회해 힘들게, 그리고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게 관계를 지속해나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나루세의 말대로 정말이지 끝까지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쫓아가는 이 영화는 사랑이 절대로 어떤 보상을 주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치 ‘의지의 투쟁’을 벌이듯 사랑을 요구하는 여자주인공 유키코에게 쉬운 공감도 허용치 않는다. 영화는 그러면서도 끝내는 그 사랑에, 그리고 그 당사자인 유키코에 보는 이를 ‘굴복’시키는 기이한 힘을 보여준다. 한편 다양한 전개로를 통해 읽힐 수 있는 사랑 이야기라는 점에서 <부운>은 걸작의 또 다른 조건 하나를 갖춘 영화이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女が階段を上る時 When a Woman Ascends the Stairs 1960년, 흑백, 111분, 출연 다카미네 히데코, 모리 마사유키, 나카다이 다쓰야
영화 속 대사처럼 져서는 안 되는 전투를 치르듯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을 다룬 나루세의 대표작. 사람들로부터 ‘마마’라 불리는 게이코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뒤 긴자의 한 바에서 마담으로 일한다. 서른살이 다 된 그녀는 이제 그녀 삶에서 일종의 전환점이라고 할 시기를 맞았다. 그래서 결혼을 하든지 아니면 자기 바를 열든지 선택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의 선택도 그리 만만치가 않다. 가족에게 ‘착취’당하고 이런저런 남자들로부터 실망감만을 떠안고 말지만 고투로서의 삶을 이어가는 게이코의 이야기를 통해 영화는 낮은 지위에 있는 여성들의 고결한 삶을 찬양하고 그와 동시에 그녀들에게 억압을 가하는 사회의 포악함을 꼬집는다. 한편으로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는 스펙터클과 전혀 관계가 없으면서도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출중하게 활용한 실례로 꼽히는 영화이기도 하다.
방랑자의 수첩 放浪記 A Wanderer's Notebook 1962년, 흑백, 124분, 출연 다카미네 히데코, 다나카 기누요
나루세가 자신의 ‘솔메이트’로 여겼던 하야시 후미코의 자전적 소설 <방랑기>를 영화화한 작품.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하야시에게서 재료를 구했던 여섯편의 나루세 영화 가운데 마지막에 해당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는 지독한 가난과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던 후미코가 방랑의 삶을 살다가 인정받는 작가가 되기까지의 힘든 여정을 담아냈다. 여기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주인공 후미코를 무조건적으로 미화하지 않으려는 정직한 시선과 그러면서도 그녀의 힘든 삶의 여정을 결국에는 현실적으로 숭고한 것으로 만드는 힘이다. 다카미네 히데코의 연기가 가장 빛을 발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흩어진 구름 亂れ雲 Scattered Clouds 1967년, 컬러, 108분, 출연 카야마 유조, 츠카사 요코
나루세의 마지막 작품으로 더글러스 서크의 영화 <마음의 등불>을 연상케 하는 설정으로부터 불가능한 관계의 사랑 이야기가 처연하면서도 아름답게 펼쳐진다. 갓 결혼해 임신 3개월째인 유미코는 통산성에 근무하는 남편 히로시와 함께 미국에 갈 생각에 들떠 있다. 하지만 히로시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면서 그들 부부를 맞이할 행복감은 산산이 부서진다. 유산까지 하게 된 유미코는 남편을 죽인 자동차 운전사 미시마를 용서할 수 없고 미시마는 그대로 죄책감에 빠져든다. 영화는 관계가 불가능할 것 같은 이 두 남녀가 서로에게 이끌리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전혀 서두르지 않는 정연한 발걸음으로 따라가면서 우리를 그들에게 동화하게 만든다. 대사가 거의 없이 진행되는 마지막 10분간의 시퀀스는 나루세의 연출력의 정점을 보게 하며 그 뒤에 이어지는 여관방에서의 이별 시퀀스는 보는 이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