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연인을 만나려면 파리나 프라하나 발리로 가야 했을까. 여행 중에 기막힌 로맨스를 만들었다는 남들의 자랑을 귀담아들었지만, 이번 여정에서 그런 기적은 이뤄지지 않았다. 출장 아닌, 피땀 흘려 모은 내 돈 내고 떠난 첫 해외여행. 떠나기 직전까지 “선배는 한국에선 이제 구제 불능이니, 맘에 드는 베트남 처자들과 달콤한 로맨스를 만들어서 오라”는 후배들의 적극적인 응원(?)에도, 하노이 대작전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그저, 원치 않은 해프닝의 연속이었을 뿐이다.
맨 먼저 아오자이를 입은 스튜어디스. 베트남에 정통한 친구의 가이드에 따르면, 내가 탄 비행기의 스튜어디스들은 친절할 뿐더러 점심 한끼 정도는 충분히 같이할 용의를 언제나 보인다고 했다. 영어에 능통한 후배의 도움으로 몇 가지 예문(내가 가장 싫어하는 ‘우쥬∼’ 발음이 낀 문장을 포함하여)을 암기한 것까진 좋았다. “오늘 만석인가요? 자리 옮겨도 되나요?” 출발 전 참한 스튜어디스에게 예습하지 않은 문장을 나름 세련된 발음의 영어로 던진 것까진 좋았는데. 스튜어디스는 유창한(!) 한국말로 “아직 기다리세요”라고 답했다. 쪽팔림을 무릅쓰고 후사를 도모하기란 쉽지 않은 일.
가만 있어도 온몸에 육수폭포가 흐르는 찜통 하노이에 시원한 스콜이 내린 이틀째. 마음의 고향이라 불리는 호안키엠 호수 근처 카페에서 카메라를 들고 얼쩡거리다 자극적인 분홍색 우산을 든 처자를 발견했다. 약 50m를 따라간 끝에 말을 붙였고, 일본에서 온 그 아가씨는 “차나 한잔 하자”는 말에 선뜻 응했다.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눈 뒤 근처 성당까지 가서 사진촬영에 응해준 친절한 그녀는 “저녁식사 뒤에 다시 보자. 꼭 기다리겠다”는 요청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 웬걸, 호수를 돌며 술자리를 3차까지 연장하는 동안 그녀는 역시 오지 않았다. 하긴, 그녀가 왔다 해도 짧은 영어로 4차 가자는 말을 하는 것 말고 뭘 했을까.
다음 기회는 소수민족들이 산다는 사파 가는 길에 찾아오는 듯했다. 10시간이나 가야 하는 야간열차에서 마음에 맞는 이성을 만난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는가. 말상대를 원하는 것은 그쪽도 마찬가지일 테니, 자연스러운 관계 형성이 가능하리라. 침대칸에 미리 자리잡고 누워 뿌듯한 상상을 펼치려는 찰나 천장에 머리가 닿는 거구의 독일 남자 2명이 들어왔다. 이들은 강행군에도 좀처럼 지치지 않는 본인들의 체력을 과시하느라 정신없었고,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에 꽤 오랫동안 맞장구를 쳐야 했다. 돌아오는 길엔 베트남 아저씨들과 짝을 이뤄 축구 이야길 했다.
열흘을 타지에서 보내고 한국에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해본다. 한국 남성의 국제적인 매력지수에 대해서. <비포 선 라이즈>의 여운은 한국 남성에겐 기적의 판타지인가. 로맨스를 만들었다는 놈들의 연애담이 과연 진실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