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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골적이고 단호한 정치적 커밍아웃, <괴물> [1]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정치적 읽기를 요구하는 영화다

봉준호의 세 번째 영화 <괴물>을 보았다. 그리고 미루고 미룬 다음 이 글을 쓴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만날 하는 말이라 좀 지겹긴 하지만 여기서는 좀더 근본적으로) 이 글이 스포일러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나는 이미 경고했다! 그 다음은 내 책임이 아니다). 나는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스포일러없이 이 영화를 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스포일러를 피해 쓰려고 노력할 때 <괴물>에 관한 글은 이미 본 이 영화의 예고편 이상을 쓰는 것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에 대해 쓴다면 영화가 ‘개봉한 다음에’ 쓰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게 두 번째 이유이다. (다시 한번 같은 어투로 첫 문장으로 돌아가서) <괴물>을 보았다. 그런데 본 다음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괴물>은 당신이 생각하는 (혹은 생각했던) 그런 ‘괴물’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 최상의 의미로 나는 영화를 본 다음 중얼거렸다. 봉준호, 당신 미친 거 아냐?

봉준호의 단호한 정치적 커밍아웃

말을 빙빙 돌릴 필요가 없다. <괴물>은 모두가 한물간 주제라고 생각한 토픽을 다시 우리에게 불쑥 물어보고 있다. 더도 덜도 아닌 말 그대로 봉준호는 100억원짜리 ‘정치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괴물>이 나를 놀라게 만든 것은 정확하게 그런 의미에 한해서이다. 이때 내가 말하는 ‘정치적’이란 니코스 풀란차스가 (주어진 사회구성체를 계급투쟁의 정치적인 방식으로 사고하는)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을 (정치적인 심급, 부문, 국가기구와 이데올로기적 기구, 부분구조를 대상으로 한) ‘정치적인 것’(la politique)과 구별할 때 쓰는 용법으로서의 ‘정치적인 영화’이다. 말하자면 <괴물>은 홍기선의 <선택>이나 김동원의 <송환>과 ‘같은’ 의미에서 정치적인 영화가 아니다. <선택>이 ‘정치적인 영화’(cinema, la politique)라면 <괴물>은 ‘정치적인 영화’(cinema, le politique)이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은 정반대이긴 하지만 봉준호의 <괴물>은 강우석의 <한반도>와 ‘똑같은’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영화이다. 양쪽 모두 매우 뻔뻔할 정도로 노골적인 ‘정치적인 영화’이다. 한쪽은 우파 (영웅적-)민족주의, 또 다른 한쪽은 좌파 냉소주의 혹은 냉소적 좌파(그런데 그 정의가 이데올로기적으로 말이 되느냐고 따져 묻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나는 다른 방식으로 정의할 말을 아직 찾지 못했다). 그것도 <한반도>의 강우석처럼 그저 허풍을 떠는 제스처가 아니라 <괴물>은 봉준호의 단호한 정치적 커밍아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건 그저 시작하고 난 다음 첫 장면 5분을 보기만 해도 ‘뻔하다’. 아무도 <킹콩>을 보면서 왜 저렇게 커다란 원숭이가 생겨났는지 궁금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에이리언>을 본 다음 저런 기생 생물체가 가능한지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는다. 그런데 봉준호는 ‘괴물’이 어디서 생겨났는지 보는 사람이 ‘잘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첫 번째 신은 주한 미8군 용산기지에서 “먼지 낀 포름알데히드”를 방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방류하는 그 수백병에 담긴 “먼지 낀 포름알데히드”를 수평 트래킹으로 찍은 다음 그걸 한강과 디졸브로 연결시켰다. 이동하는 카메라,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한강의 물결. 그 둘을 하나로 겹쳐놓은 디졸브. 그런 다음 그걸 ‘마시면서’ 한강에서 ‘무언가’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비오는 날 한강 낚시꾼 두 사람의 입을 빌려 설명한다. 그리고 6년8개월 뒤 그 ‘무언가’가 비오는 날 ‘하필이면’ 부도 맞은 다음 뛰어내린 윤 사장을 ‘잡아먹기 위해’ 한강 다리 아래서 기다리는 것으로 연결한다. 미군 기지와 한강, 부도 맞은 사장. 이 세개의 연속된 신은 누가 보아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지 자명하다 못해 어리둥절할 만큼 노골적이다. ‘괴물’이 왜 생겨난 것인지 더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여기서 ‘괴물’은 그 어떤 비유적인 ‘억압의 귀환’이 아니라 말 그대로 미군 부대의 “먼지 낀 포름알데히드” 무단 방류에 대한 생물학적 결과이다. 그 ‘결과’가 자본주의 경쟁시장에서 낙오한 채 자살한 남자를 잡아먹는다. 생각할 만한 지적. ‘결과적으로’ 잡혀먹힌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결과’가 다른 ‘결과’를 잡아먹은 것이다. 약간의 과장. 자본주의 시장의 ‘결과’를 분단체제하의 반식민지국가에 상주하고 있는 주한미군 부대의 ‘결과’가 잡아먹는다. 그런데 그 결과가 한강에 있을 리 없는 괴물이다. 물론 봉준호는 “19살에 한강에서 괴물을 보았다”고 우기는 중이다(수많은 인터뷰에서의 같은 말의 반복). 이 말에 관심있는 나의 방점은 19살이다. 스무살이 되기 일년 전, 고등학교 3학년. 세상을 소년과 어른의 사이에 서서 바라보기. 상상과 상징의 경계. <괴물>은 그 둘 중 하나이다. 그것을 그 상태로 유지하려 들기 혹은 상징의 자리에서 상상을 넘보기. 나의 반론. 그런데 ‘괴물’을 가장 믿지 않는 사람은 봉준호 자신이다. 그렇지 않다면 ‘괴물’이 나타난 다음 병원에 단체로 잡혀간 강두 가족이 그날 밤을 병원에서 보내면서 간호사가 “박강두씬 검사할 게 많으니까요, 아침까지 아무것도 드시면 안 되구요”라고 한 다음 신에서 박강두가 골뱅이 먹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구태여 골뱅이를 클로즈업해 이거 어디선가 많이 보지 않으셨어요, 라고 반문하는 것 같은 숏이 왜 필요했을까? 한강 다리에 골뱅이처럼 매달린 괴물. 그냥 차라리 골뱅이-괴물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의 모양의 유사성. 그런데 생물학적으로 골뱅이가 “먼지 낀 포름알데히드”를 마시고 괴물이 될 확률은 어느 정도일까?

2000년 맥팔랜드 사건을 되풀이

여기서 이 과정을 미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이 결과는 윤리적인 것과도 상관없다(물론 도덕적으로는 비난받을 일이다). 남한에서 ‘괴물’이 미군 부대에 의해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억압의 귀환’이라는 상징적 다시 쓰기로 옮겨 쓰기 위해서는 그걸 정치적으로 다시 읽을 때에 비로소 성립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첫 장면을 보는 순간 (적어도 당신이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에 ‘최소한의’ 관심을 갖고만 있다면) 구체적인 사건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괴물>은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구체적인 사건과 맞닿아 있다. 그렇다. 상징적 그물망에 ‘한강의 괴물’이 걸려드는 것은 당신이 이 첫 번째 장면에서 2000년 2월9일 미8군 용산 주한미군 부대에서 한강에 (동일한 용액인) 포름알데히드를 방류한 맥팔랜드 사건이라는 직접적인 인용을 떠올릴 때이다. 물론 그 ‘최소한의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 <괴물>은 그저 ‘괴물영화’일 뿐이다. 하지만 맥팔랜드 사건은 제대로 매장되지 않았고(아직도! 아니, 차라리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지금 주한미군 기지 이전을 위해 토지오염 치료에 한국 정부가 부담해야 할 돈은 정부 추산으로 1천억원, 환경단체 추산으로 5천억원이다. 이걸 누가 내나? 당신의 호주머니), 봉준호는 그 셈을 끝내기 위해서 괴물을 불러온다(게다가 이 영화의 첫 장면에 명시된 2000년 2월9일과 맥팔랜드 사건은 같은 연도, 심지어 같은 날짜이다. 이것이 그저 우연일까?). 말하자면 현실과 상징 사이의 대차대조표. 부채의 청산을 위해서 ‘불현듯 나타난’ 괴물. 그런 다음 질문한다. 이제 어떻게 할 참인가? <괴물>은 ‘괴물’이 나타난 다음 현서를 납치당한 가족의 심리적 갈등을 그린 영화가 아니다. 그런 것 따위는 이 영화에 없다. <괴물>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시급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그런 다음 질문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그때 이 가족들은 무엇과 싸우는가? 이 영화는 행동을 촉구한다. 이 가족들을 돕지 않는 정부는 무엇과 싸우지 않는가? 말 그대로 (한)강 건너 불구경. 그때 문제가 되는 것은 비정치적인 현실과 정치적인 상징 사이에서 갈린 틈새로 모습을 드러내는 실재이다. <괴물>의 역설은 ‘괴물’이 맥거핀이 아니라 실재라는 데 있다. 상징으로 통합되지 않는 그 무엇, 그것을 상징적으로 만드는 것에 대항하면서 <괴물>의 상징적 요구에 그것을 성립시키기 위하여 그 안에서 최종적으로 버티고 있는 고정점. 정치적 상징들 모두를 떠안고 그 모든 무게를 버티면서 위협하는 현실성의 상실로서의 대상. ‘괴물’은 현실이 불러일으키는 환상을 걷고 그 안에 살고 있는 당신에게 정치적인 각성을 일깨워 실재를 보라고 맹렬하게 촉구하는 중이다. 말하자면 반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 아래의 남한.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비상계엄하의 국가. 감시와 배신의 세상. 낡은 토픽. 하지만 여전히 진행 중인 역사.

나는 <괴물>이 진행 중인 역사의 반복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괴물에게 납치당한 딸 현서가 결국 죽고 마는 이 비참한 이야기가 코미디라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때 우리는 유명한 충고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역사는 두번 되풀이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그 다음은 희극으로. 봉준호 자신의 말. “누구든 한강에서 괴물이 나오는 영화를 구상한 사람이라면 맥팔랜드 사건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나, 환경단체에서 들으면 펄쩍 뛸 일이지만, 나는 신문을 보면서 바로 시나리오에 대입할 수 있겠다며 좋아했다.”(<씨네21> 제561호, ‘가족얘기가 아니다, 보호모티브가 중요하다’) 봉준호는 2000년 2월9일 맥팔랜드 사건을 되풀이하는 중이다. 그때 이 희극은 현실을 향한 어처구니없는 절망감에서 오는 냉소주의에 가득 찬 것이다. 어떻게 주권을 가진 한 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봉준호의 웃음은 차가운 웃음이다.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벌어질 수 없는 일. 그래서 괴물이 나타난다. 그걸 보고 웃는 관객은 둘 중 하나이다. 그건 냉소적인 동의이거나, 못 본 척하(거나 실재를 보지 못한 채 역사를 영화 안에 가두려)는 외면이다. 이 직접적인 참조의 토대. 맥팔랜드 사건이 일어난 지 6년이 지났지만 그걸 ‘한국’영화 안으로 끌고 들어온 사람은 봉준호뿐이다. 그는 “누구든… (중략)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지만 그걸 다룬 영화를 만든 건 당신뿐이다. (봉준호의 상식으로는) 누구든? 하지만 아무도! 오직 당신만이 그렇게 떠올리고 그런 다음 그렇게 설명한다. 구체성 안에서의 투쟁. 타락한 현실의 구조 안으로 들어와 그 안에서 벌이는 비극적 조건에 대한 희극적 행동. 그때 이것은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을 상징적 네트워크 안으로 끌어들여 실재를 보라고 호소하는 정치적 투쟁의 놀랄 만한 소생이다. 같은 말의 반복. <괴물>은 우리에게 정치적인 읽기를 요구하는 영화이다. 그걸 외면하면 안 된다. 현실이 덮어쓴 환상을 치우려는 투쟁. ‘괴물’이 나타나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간다. 그때 비로소 투쟁이 시작된다. 카피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투가 시작된다’.

그런데 문제가 다소 복잡해졌다. <괴물>의 사투는 이중적인 것이 되었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전에 인터넷에서 이 영화에 관한 평을 읽었다. 물론 그걸 다 읽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이미 수천편의 글이 올랐고(당연하지! 영화사 보도자료에 따르면 6일 만에 371만명이 보았다고 한다), 공식적인 지면과 웹진에 올라온 글만도 수십편에 이른다. <괴물>은 본 다음 그 사람으로 하여금 무언가 말하고 싶게 만든다. 그건 전적으로 봉준호의 재능이다. 그런데 그걸 무심코 읽다가 이상한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 글들은 서로 다른 입장으로 쓰인 것임에도 거의 일제히 일정 부분을 이 영화가 정치적인 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데 할애하고 있었다. 나는 그 주장(들)이 좀 이상하게 읽혔다. 정치적인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아니라고 주장할 아무런 필요가 없으며, 그래야 할 그 어떤 이유가 있을 리 없다. 그 글들은 어떤 반론을 위해서 쓰인 글이 아니다. 대부분 첫 시사를(보거나 첫 주말에) 본 다음 아직 어떤 글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첫 인상을 쓴 글들이다. 봉준호는 무대 인사에서 제발 <괴물>을 정치적으로 보세요, 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 글들은 누군가의 견해에 반박하기 위해서 <괴물>이 정치적인 영화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그 글들을 읽은 내 독후감은). <괴물>을 본 다음 이 영화는 정치적인 영화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영화를 본 다음 즉각적으로 떠오른 자기의 인상으로부터 무언가를 방어하기 위해서, 말 그대로 자기의 인상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주장하고 있는 중이다. 그 부정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한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러한 방어가 필요해진 것일까? 혹은 왜 자기 자신이 본 것에 대해서 자발적으로 저항해야 할 필요가 생겨난 것일까? 수동적인 자기 자신(의 정치적인 목격)에 대한 자기 자신에의(비정치적인) 능동적인 무력화. 말 그대로 정치적인 견해를(지닌 영화를) ‘지금 눈앞에서’ 보는 것에 대한 창백한 두려움. 정치적 외설성? 그러니까 <괴물>은 그것이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그것이 보는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일까? 그런데 그게 왜 부끄러운가? 혹은 그것이 왜 두려운가? 탈정치적인 담론들이 넘쳐나는 유행의 시간. 그것을 ‘쿨하다’고 말하는 시대. 그런데 <괴물>은 영화 안에서 ‘괴물’과 사투를 벌이면서 사실상 영화 바깥에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집단적인(대중적인?) 혐오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그 담론들로 하여금 말하지 않으려는 정치적인 것을 마주보게 만들고 있다. 정치적으로 말하지 않으려는 것.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정치적 스펙터클. 물론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은 ‘정치적인 것’(la politique)과 달리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하면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우파들이 좌파영화를 보면서 프로파간다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대로 좌파들이 우파영화를 보면서 파시스트영화라고 말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결론이다. 하지만 정치적인 것을, 그것 자체를 <괴물>에서 보지 않는다면 달리 볼 만한 무엇이 거기 있는가?

괴수영화 계보로 따지면 <괴물>은 B급 컬트

만일 <괴물>을 그냥 오락스펙터클영화로 보면서 ‘Digital怪獸’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주목한 다음 그걸 우리가 마침내(!) 만들었다는 흥분을 잠시만 제쳐놓는다면 우리는 이 정도의 (기술적 완성도를 지닌) ‘괴물’영화를 이미 너무 많이 보았다. 그래서 <괴물>을 ‘괴수’영화의 계보에 놓는다면 B급 컬트영화 정도일 것이다. ‘괴물’의 스펙터클이 보고 싶다면 그저 예고편으로 충분하다. 미안하지만 더이상 놀라운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만일 영화 앞장면 15분을 놓쳤다면 다시 보는 편이 낫다. 그런 다음 괴물은 가끔씩 단지 ‘깜짝 쇼’만을 할 뿐이다. 게다가 누구나 본 다음에 하는 말이지만 괴물이 불타 죽는 마지막 클라이맥스의 CG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구리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훌륭하지도 않다. 차라리 정반대이다. 도무지 앞뒤가 말이 안 된다. 정말? 따져 물어보자.

할 수 없이 줄거리의 짧은 환기. 2000년 2월9일 주한 미8군 용산기지. 더글라스 부소장은 한국인 김씨에게 ‘먼지 낀 포름알데히드’ 수백병을 한강에 ‘방류하라’고 명령한다. 2000년 7월, 한강에서 두 낚시꾼이 무언가를 본다. (아직 오지 않은) 2006년 10월, 부도 맞은 사장이 한강에서 자살하기 직전 강 속에 무언가 있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가을. 한강 여의도 둔치에서 할아버지 박희봉(변희봉)과 아버지 박강두(송강호)는 매점을 하며 먹고산다. 엄마는 13년 전에 도망갔고, 딸 현서는 중학교 2학년이다. 삼촌 박남일(박해일)은 대학 다닐 때 정치운동을 한 다음 졸업하고 백수로 불평불만만 늘어놓으며 술로 나날을 보낸다. 고모 박남주(배두나)는 수원시청 대표 양궁선수로 별명이 ‘거북이’라고 부를 만큼 모든 일에 굼뜨다. 그 가을 오후 괴물이 나타나 현서를 잡아간다. 가족은 이제 현서를 되찾기 위해 악전고투를 하고, 군부대는 한강 접근을 차단하고, 미군은 바이러스 오염으로 판단한다. 와중에 할아버지 희봉은 죽고, 이제 남은 세명이서 괴물을 잡기 위해 현서가 있다는 원효대교 북단으로 달려간다. 그때 미군 부대는 ‘에이전트 옐로우’라는 생화학전으로 괴물을 죽이려 하고, 환경단체는 반대시위를 하기 위해 한강에 집결한다. 그때 괴물이 나타나고, 모두 도망간 원효대교 아래에서 강두 가족은 괴물을 불태우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미 잡혀간 현서는 죽은 다음이다. 그리고 짧은 에필로그.

보고 난 다음 누구라도 상식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질문. 한강의 백주대낮에 괴물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마구 잡아먹는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이 괴물을 잡을 생각도 안 하고 그냥 한강에 접근하는 것을 통제하는 것 이외에 하는 일이 없다. 시민들은 괴물이 나타나서 사람을 잡아먹고 있는데 다들 바이러스에 감염될 걱정만 하고 있다. 그런데 바이러스가 더 무서울까, 잡혀먹히는 게 더 두려울까? 미군 부대에서는 괴물에는 신경도 안 쓰고 바이러스 감염자만 찾아내려고 애를 쓴다. 그 괴물이 나타나서 사람을 잡아먹고 있는데 한강에 ‘에이전트 옐로우’를 사용하여 괴물을 사살하려고 하자 환경단체에서는 괴물이 나타나서 사람을 잡아먹건 말건 ‘에이전트 옐로우’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시위에만 몰두한다. 정말 그럴 수가 있을까? 그런데도 영화는 시침 뚝 떼고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이 영화에서 괴물이 있다고 믿고 있는 건 박강두의 가족과 영화를 보는 우리뿐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더 이상한 건 이 상식적인 질문을 내 동료들은 거의 던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지금 일종의 벌거벗은 임금님과 비슷한 사태가 있다. 두 가지 질문. 왜 눈앞에 있는 걸 보지 않는가? 혹은 못 본 척하는가? 이를테면 <한반도>에 대해서는 그렇게 이야기의 불합리성에 대해서 꼬치꼬치 묻던 이들이 <괴물>에서는 그게 안 보이는 척한다. 봉준호가 그걸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봉준호가 모를 리가 없다. 그러므로 당연한 그 다음 질문. 그렇다면 봉준호는 <괴물>에서 우리가 무엇을 보기 원하는 것인가? 아니, 차라리 ‘한강에 사는 괴물’은 정말 무엇인가?

본 것을 못 본 척하게 하는 강박증

나는 먼저 이 영화 제목 <괴물>을 물어보고 싶다. 이 영화의 (처음 알려진) 제목은 <한강>이었다. 그러다가 <리버>로 바뀌었다. 그런 다음 다시 <괴물>이 되었다. 이것은 단지 제목을 바꾼 것이 아니라 아마도 봉준호 자신이 영화를 준비하면서 관심이 옮겨간 과정의 기록이기도 할 것이다. 사실 이 영화가 한강에서 찍기는 했지만 <괴물>은 한강의 풍경에 거의 관심이 없다. <괴물>을 본 다음 한강의 새로운 풍경을 보았다는 말을 나는 믿을 수 없다. 강의 풍경을 보여줄 수 있는 2.35의 (시네마스코프) 비율을 포기하고 <괴물>은 1.85의 비율로 찍었다. 촬영을 한 김형구는 말한다. “봉 감독과 함께 시네마스코프 사이즈와 1.85 대 1 사이즈 모두 테스트 촬영을 해봤다. 넓고 와이드한 화면이 블록버스터에 적합한 건 당연하다. 규모도 큰 작품이고 한강처럼 펼쳐진 공간을 담으니까. 하지만 이건 한강 홍보영화가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폐쇄된 하수도, 그 안에 있는 괴물이었다.”(<필름2.0> 홈페이지, “한강에 괴물이 산다”, 2006년 7월20일) 게다가 한강의 아날로그 풍경은 거의 없다. 괴물이 나오지 않는 대부분의 한강의 화면조차 후반 DI(digital intermediate) 색보정 작업으로 덧칠해놓았으며, 그래서 한 프레임 안의 밝기와 그림자 부분이 살아나기는 했지만 사실상 이 한강의 모습은 (‘먼지 낀 포름알데히드’로 한강의 환경공해를 다루는 이 영화의 토픽과는 반대로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스러운’ 숏을 볼 수 없는 디지털 풍경화이다. 이를테면 두 번째 신에서 광각렌즈로 잡은 다음 덧칠해서 할 수 있는 한 (아마도 <괴물>에서 가장) ‘와이드하게’ 보여주는 비오는 날 낚시하는 장면. 강의 풍경은 동시에 물에 비치는 빛의 풍경이다. 그러나 이 빛은 모두 디지털 빛이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장면이 디지털로 만든 장면이니 본 적이 없는 게 당연하지! 그런데 그게 정말 한강의 풍경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잘 알다시피 한강에는 모두 27개(혹은 공사 중인 다리까지 31개)나 된다. 하지만 공간적으로 <괴물>에서 한강의 풍경은 여의도 주변을 벗어나지 않는다. 장소의 고정. 게다가 시종일관 원효대교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 영화에서 나는 원효대교의 전경을 잡은 단 하나의 숏조차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한강의 새로운 풍경을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 이상하게도 <괴물>에는 거기 없는데 그것이 거기 있는 것처럼 말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본 다음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자꾸만 관심을 다른 데 돌리게 만든다. 무엇을 무엇으로부터? 왜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그토록 애를 쓰는가? 본 것으로부터 보여지지 않은 것에로의 후퇴, 아니 차라리 퇴행. 거기 있는 그 무엇으로부터 미학적인 설명에로 물러나기. 좀더 정확하게 ‘괴물’을 ‘괴물영화’로 가둬두기. 그 힘. 말하자면 자기 암시. 그런데 그것이 내게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없는 것을 본 척하는 것이 아니라 본 것을 못 본 척하려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사유 안에 머물려는 안간힘. (못 본 척하려는 사람들과 같은 말투로 말하자면) 더도 덜도 아닌 강박증.

영어 제목 <The Host>는 ‘주인’이란 의미

그런 다음 세개의 서로 다른 제목에 대해서. 이 영화가 ‘공식적으로’ 처음 보여졌을 때의 제목은 <The Host>였다(<괴물>은 올해 칸영화제 감독주간에서 첫 시사회를 가졌다). 그런 다음 한글 제목 <괴물>로 개봉했다. 나는 그때 왜 <The Host>가 <괴물>로 번역되었는지 궁금했다. (영어사전에 따르면) ‘Host’의 말뜻에는 ‘괴물’이란 풀이가 없다. 그런데 영화 <괴물>에서 ‘Host’는 ‘괴물’이다. 두 말은 이 영화에서 동의어란 뜻이다. 그때 두말 사이의 번역을 성립시키는 근거를 물어보는 것은 중요하다. 한 가지 더. 그런데 일본어 제목은 한글을 일본어로 그냥 읽은 <구에무르>(グエムル)다(부제는 ‘漢江の怪物’(한강의 괴물)이다. 그런데 일본어에서 괴물은 우리가 말하는 괴물과 뉘앙스가 다르다). 그 말뜻은 이 영화는 ‘怪物’이지 (일본영화에서 시리즈로 등장하는 ‘고지라’와 같은) ‘怪獸’가 아니라는 의미의 완강한 저항일 것이다. 결국 영미권과 유럽, 일본, 한국이 다 다른 뜻으로 소개되었다. 말하자면 어느 쪽이 진짜 ‘괴물’의 속뜻일까? 영화를 본 다음 영어 제목을 생각했다.

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Host’를 (거의 대부분의) 기사들이 ‘숙주’라고 번역할 때이다(봉준호의 어떤 인터뷰에서도 나는 그가 ‘Host’를 ‘숙주’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대답을 읽지 못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무엇이 혹은 누가 ‘宿主’인가? ‘숙주’는 기생을 ‘당하는’ 대상이지 기생을 ‘하는’ 동식물이 아니다. <괴물>에서 괴물은 기생을 당하는가? 아니면 유괴당한 현서는 괴물에 기생‘하는가’? 혹은 그 역인가? 그런데 그 둘 사이에는 (괴물영화에서 흔히 보는) 그 어떤 소통도 없다. 현서를 뒤쫓는 네명의 가족들이 현서의 유괴에 빌붙어 국가로부터 위자료를 받으며 현서의 죽음에 기생‘하는가’? 그러므로 현서는 가족에게 기생‘당하는가’? 아니, 그렇지 않다. 나는 <괴물>을 숙주와 기생의 관계로 읽는 것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영화 <괴물>의 영어 제목 <The Host>는 ‘주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인? 그렇다. 그것도 배 터지도록 먹고 마신 다음 다시 토해내는 식탁에 초대한 주인의 자리이다. 봉준호는 (인터뷰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처음에는 독극물을 쏟아붓고, 괴물도 사람 뼈를 뱉어내고, 나중에 에이전트 옐로우가 가스 배출하는 것까지 먹고 뱉는 모티브를 반복한다. 그러나 중요한 건 누군가가 먹인다는 거였다. 마지막 장면에서 송강호가 밥상을 차리는 것도 그렇고, 강두의 딸 현서는 지옥 같은 지하에서 자기보다 더 작은 아이를 보호하려 사투한다. 이게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이다.”(<한겨레> 7월12일자, “오른발은 코미디, 왼발은 비극, 그냥 걷는 걸음으로 찍었다”) 마지막 말의 봉준호의 말을 다시 읽으실 것. “이게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이다” 먹고 뱉어내기. 누군가 먹인다는 것.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이 ‘가장 중요한 모티브’를 따라 읽으려하지 않는다. 숙주는 강탈을 당하는 것이지, ‘기생하는’ 그에게 기꺼이 베푸는 것이 아니다. 숙주는 자기에게 기생하는 상대에게 환대를 베풀지 않는다. 환대를 베푸는 것은 언제나 그를 손님으로 초대한 주인이다. 그렇다면 누가 주인인가? 혹은 누가 손님인가? 주인과 손님의 자리를 놓고 벌이는 술래잡기. 주한 미8군 더글라스 부소장이 한강에 ‘방류’하라고 명령한 “먼지 낀 포름알데히드”를 먹은 다음, 그로부터 6년8개월 뒤 부도 맞은 다음 한강에 뛰어들어 자살한 윤 사장을 먹고 인육에 맛을 들인 괴물이라는 손님을 한강에 초대한 주인은 누구인가? 나는 그 주인을 물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서가 괴물에게 납치된 건 그녀의 계급적 운명

한강 강변이라는 만찬석상. 온갖 종류의 (한강 강변에는 외국인들도 보인다) 인육 파티가 열리고 있는 장소. ‘에피타이저’로(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괴물은 왜 현서만 ‘잡아먹지’ 않은 것일까?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다. 배가 불러서!) 중학교 1학년 소녀가 항상 그 시간에 그 장소에 나타나는 만찬식장. 당신은 현서가 운이 없어서 괴물에게 납치되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만일 괴물에 쫓기면서 강두가 붙잡고 도망치던 그 손이 현서의 손인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그 손의 주인이었던 바로 안경 낀 현서 또래의 그 소녀가 괴물에게 잡혀갔다면 그건 정말 운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서는 운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녀의 계급적 운명이다. 운명이라고? 그렇다. 나는 그래서 그녀의 죽음이 더 슬프다. 그녀는 매일, 그 시간에, 그 장소에 학교가 끝나면 와야 한다. 가난의 대물림. 박희봉은 강두와 남일, 남주를 앉혀놓고 그 자신의 한강 강변 매점을 ‘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가족사에 대해서 길게 설명한다.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남일과 남주, 모두 잠들 만큼 지겹도록 한 이야기. 그런데 그걸 지금 다시 말할 때 그건 우리보고 들으라는 것이다.

“느그들은 잘 모르겠지만 강두 저 놈, 갓 태어나서 무지 똑똑했어. 아닌 게 아니라 상계동 신동 났단 소리 들으면서 컸단 말이지, (중략) 그러다가 남주 태어난 다음 해에, 니들 어미마저 저 세상 가고, 니들 둘은 대전 큰고모 댁에 임시방편으로 가 있을 동안, 그래두 강두 이놈은 나랑 있겠다구 상계동에 남아가지고 말여, 내가 새벽부터 야밤까지 일 나갔다 들어와 보면, 이놈이 빈속으루 하루 종일 어딜 그러케 삘삘거리면서 돌아다녔는지, (중략)그러구선 상계동서 와르르 쫓겨나가지구, 강변에서 장사 시작하고, 몇해쯤 지나선가 강두 나이 스물셋 됐을 땐가, (중략) 이 자슥이 태어난 지 며칠두 안 된 핏덩이 하날 뜩 델꾸 들어와, 그게 현서, 애엄만 벌써 어디루 날라버렸고…(중략).”

그런 다음에도 이 처량한 이야기는 새벽에 매점 앞에 괴물이 나타날 때까지 이어진다. 이 대사는 박희봉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자 서울 도시 빈민의 연대기이다. 그의 대사를 따라 다시 구성해보자. 달리 배운 것 없고 몸이 재산인 박희봉은 아마도 대전에서 살다가 도시 근대화가 이루어지던 1970년대 그 어느 날 무허가 판자촌이 즐비하던 서울 외곽 상계동에 둥지를 틀었을 것이다. 그는 낮밤으로 일을 했고, 하지만 그에게 집은 생기지 않았다(말하자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올림픽을 앞두고 상계동은 재개발에 들어갔고, 거기 살던 박희봉 일가는 쫓겨났을 것이다(김동원의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 그리고 그와 그의 아들과 그의 손녀는 이제 한강 강변에서 먹고, 살며, 잔다(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그 추운 눈 내리는 겨울날 밤 강두와 어린 세주는 한강 강변 외로운 매점에서 저녁밥을 먹은 다음 여기서 잔다). 여기는 그와 그의 가족의 의(衣), 식(食), 주(住)의 무대이다. 물론 세상은 그들 가족에게 관심이 없다. 그건 올림픽이 끝나고 이제 월드컵마저 끝난 지금 그때 상계동에 살던 이들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것과 같다. 현서는 그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왜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알 리가 없다. 하지만 그들의 가난은 현서가 매일, 학교가 끝나면, 한강에 와야만 하는 운명을 안겨준다. 부모의 가난은 자식에게 운명이다. 이게 이 영화의 납치를 끔찍하게 만든다. 여의도 매점에서 살고 있는 현서는 한강 원효대교 북단에 살고 있는 괴물이 나타났을 때 (원효대교는 여의도 둔치로 오는 두개의 한강 다리 중 하나이다) 마주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자리에서 매일 살고 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맞다. 만일 현서가 잡혀가지 않았다면 그녀는 운이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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