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rro Torre 1991년, 감독 베르너 헤어초크 출연 도널드 서덜런드 장르 드라마 (빅스)
환상의 도시 엘도라도를 찾아나선 스페인 군대의 광기어린 집착과 탐욕에 관한 기록, <아귀레 신의 분노>(1972)에는 뉴저먼 시네마의 기수로 평가받고 있는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의 기나긴 필모그래피가 보여주는 집요한 주제의식과 영상미학이 요약돼 있다. 특히 원정길에 포착되는 대자연의 거역할 수 없는 위압은 자신의 환상에 사로잡혀 자멸의 잔혹극으로 치닫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에 대비되면서 더욱 극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의식은 그의 82년작 <위대한 피츠카랄도>를 경유해 다다른 영화 <쎄로또레>(1991)에서도 반복된다.
기암과 만년설로 뒤덮인 죽음의 고봉 쎄로또레. 아무도 정상등반에 성공하지 못한 이 산에 세계 최고의 산악인 로치아와 젊은 패기로 가득 찬 암벽타기 챔피언 마틴이 도전장을 내민다. 그리고 스포츠 저널리스트 아이작이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함께 나선다. 하지만 짙은 안개와 눈보라로 휘감긴 쎄로또레의 연일 계속되는 악천후로 등반은 자꾸 연기되고, 이에 조급증을 느낀 마틴은 로치아가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대원 한스와 함께 무리한 등정을 시도한다. 그러나 한스의 죽음으로 등정은 실패하고 만다. 이에 좌절한 로치아는 자취를 감춰버리고, 본국으로 돌아간 마틴과 아이작은 언론에 자신들이 성공했다는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1년 뒤. 마틴의 성공에 대한 의혹이 가시지 않자 마틴은 결국 재도전에 나서고 이를 알게 된 로치아 역시 다시 등정에 나선다.
쎄로또레 등정에 관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헤어초크 작품세계가 그렇듯이 극단으로 치닫는 한 인간의 집착과 광기를 시각화한다. 대개의 할리우드영화가 산악영화를 찍으며 엄청난 스펙터클의 위용과 재난영화적인 구조의 극적 긴장감을 주축으로 내러티브를 쌓아간다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철저히 쎄로또레라는 산 그 자체이다. 순간순간 포착되는 고봉의 눈덮인 풍광은 신비한 생명감을 가지고 움직이는 안개와 함께 영화의 내러티브를 장악해간다. 그래서 헤어초크 영화에서 드러나는 자연은 단순히 관찰과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 마치 그 자체가 살아움직이는 생명체이듯 위압적이고 그것이 결국 인간에게는 자신의 한계성만을 체감하게 될 ‘숭고’로 다가온다. 영화의 후반부, 서로 반대의 지점에서 쎄로또레를 정복해가는 마틴과 로치아가 교차편집되면서 자연과 인간의 대결구도를 통해 인간사를 다시 사유하려는 헤어초크의 주제의식은 극에 달한다. <쎄로또레>은 감독의 영화계보에서 그다지 눈에 띄는 수작은 아니지만, 그의 일관된 주제의식을 엿볼 수 있는 주요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해 베니스영화제 골든 오셀라상을 비롯해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정지연/영화평론가 woodyalle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