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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것에 날개 없더라
2001-02-16

시대착오적인 설정으로 일관하는 SBS 미니시리즈 <순자>

SBS 수·목 밤 9시55분

“아, 지 년이 뭔 털어놓을 과거가 있다고. 무슨 고백을 한다는 거야? 설마 우리집에서 니 몸종한 얘기까지 하겠어? 새빨간 거짓말만 늘어놓겠지. 왕년에 넌 안 해본 장사니? 한참 잘 나갔을 때 기자들 모아놓고 얼마나 거짓말을 지껄여댔니? 기자 녀석들은 신문, 잡지에 갈겨쓰고, 뭣도 모르는 인간들은 그걸 보고 콩이니 팥이니 지껄이구 에이구 웃기는 세상.”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한 젊은 여배우가 기자들을 불러모았다. 스타로 성공하기까지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배후가 누구였고, 누가 희생되었는지, 말하자면 양심선언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지난 1월10일부터 방영을 시작한 SBS 미니시리즈 <순자>(연출 문정수 극본 고동률, 전태영)는 이렇게 시작한다. 드라마의 결말을 맨 첫회에 보여준 이 드라마는 “한 ‘촌년’이 고난 끝에 스타가 되지만 결국 지저분한 연예계 생활을 못견디고 자폭한다는 이야기입니다”라며 줄거리를 숨길 것 없이 다 드러낸 채 시작했다. 즉, ‘빤스’ 벗고 덤비겠다는 것이다.

시대착오, 명예훼손, 설상가상

첫회의 의지대로 <순자>는 회를 거듭할수록 점점 노골적으로 몸을 들이미는 것처럼 보인다. 스타를 꿈꾸던 시골 순대국집 딸 순자(이지현)는 여차여차해서 왕년의 유명배우 황승리(정애리)의 집에 `부엌데기'로 들어간다. 순자는 ‘공주님’ 황승리를 목욕시키고, 옷대령, 신발대령까지 해가며 그 집에서 배우가 될 꿈을 키운다. 서서히 카메라는 촌스런 여자가 주변의 도움으로 스타가 되어가는 것을 비춘다. 그리고 동시에 퇴락의 길로 접어드는 왕년의 스타를 잡는다. 희비의 스포트라이트는 안타깝게 이들을 교차한다.

그런데 이 드라마, 처음부터 뭔가 이상하다. 이런 설정은 반세기 전 흑백영화 <이브의 모든것>(All about eve)에서 본 적 있다. 배우가 되기 위해 퇴물 배우의 집에 들어가다니! 배우 개인이 후계자를 키우는 시스템은 고사하고, 전문화된 매니지먼트사가 방송사보다 더 큰 권세를 차지해 가고 있는 현 시점에서 <순자>는 설정부터 충분히 시대착오적이다. 작가는 클래식 비디오를 뒤적이기보다 2001년의 연예계 시장조사나 하고 들어갔으면 좋았을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야기 설정에 그치지 않는다. 한때는 ‘몸이 열개라도 모자라는’ 톱배우였지만 지금은 “냉장고에 한 사흘쯤 넣어둔 우유” 취급받는 황승리(정애리)나, 여성스러운 거물급 패션디자이너 피엘 장의 인물설정을 보자. 리얼리티라는 그럴듯한 탈을 쓰고 <순자>가 취한 과감한(?) 직유법은 괜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법하다. 적잖이 등장하는 ‘김희선’이나 ‘김지미’같은 배우의 실명을 제외하고도, “아이가 주렁주렁 다섯이나 딸린 과부에다 ‘똑’장사까지 시키니, 그런 배역을 내가 왜 하겠어?” 자신을 퇴물 취급하는 방송사에 대해 분노하는 황승리의 대사를 듣고 그녀의 모델이 <육남매>에서 ‘똑’을 팔던 장미희임을 알아차리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는다. “피엘 장의 패션쇼를 보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뭐 있습니까? 안개 깔고, 음악은 영화주제가 아니면 유행하는 외국가요나 틀고, 옷은 또 어때요? 로맨틱하다, 환상적이다 그러지만 누가 그 옷을 사입겠어요? 여자 옷은 미아리 텍사스촌의 유니폼 같고, 남자들의 옷은 댄스홀에서 과부들을 낚시질하는 제비족의 옷 같지 않아요?” 젊은 여배우를 선호하는 피엘 장에게 앙심을 품은 황승리는 TV 토크쇼에 나와 피엘 장의 본명이 장칠복임을 밝히고 그의 이름으로 삼행시를 지어 보인다. 지난해, 우리가 앙드레 김을 가지고 즐겼던 만행(?) 그대로…. 나중에는 순자의 옛 애인과 피엘 장이 동성애 관계를 맺는 설정도 기다린다니 참으로 설상가상이다.

스타시스템, 알고 비판하라

애초 이 드라마의 제목은 ‘누가 순자를 뜨게 했는가’였다. 이른바 한명의 배우가 뜨기까지 어떤 더러운 커넥션들이 있는지를 보여주겠다는 의도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스타들의 실명과 정황을 가져다 쓰듯, <순자>는 방송관계자들이 있는 곳이면 난데없이 수영복을 입고 나타나 “36, 24…” 하며 벌이는 배우 지망생의 `육탄전 쇼'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배우탄생의 현장이다, 라고 폭로하려는 듯 하지만, 불행하게도 <순자>는 황색 저널리즘의 수준에서 한발도 나가지 못한다. “올라갈 거야. 무슨 짓을 해서든지 다시 올라갈 거야. 손톱이 부러지고 발톱이 빠져서 피가 철철 나더라두 그 피 다 뒤집어쓰구 올라갈 거야. 월매? 춘향이는 해도 월매는 안 해! 김지미가 월매하는 거 봤어?” 파릇파릇한 젊은애들한테 밀리기 싫어 발버둥치는 중년배우의 모습을 지나칠 정도로 과장한들, 결핍을 메꿀 길이 없다.

<순자>는 연예계 비화를 벗기고자 달려들었지만 번지수를 한참은 잘못 찾아 벗긴 것 같다. 우리가 보고 싶은 건 `탐스런 가슴'인데 양말만 벗겨 놓고,“어때, 죽이지?” 하는 식이다. 재벌 2세가 여배우를 키워주고, 디자이너가 뒤를 봐주고, 이들을 쫓는 ‘하이에나’ 같은 기자가 있고…, 이런 식의 유치원생도 알 만한 도식적이고 어설픈 정보를 가지고 연예계에 메스를 들이밀어봤자 발생하는 건 앞서 언급한 이유없는 희생자들뿐이다. 하여, 시대착오적인 인물설정과 시스템의 몰이해가 낳은 드라마 <순자>의 관람기는 한물간 농담하고 박장대소를 기대하는 예비역을 보는것처럼 껄끄럽고 안쓰러울 따름이다.

백은하 기자 luci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