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 로테문드 감독의 <소피 숄의 날들>(2004)이라는 영화는 당시 나치 독재 하에서 反나치 유인물을 배포하는 등 평화롭게 항의 운동을 벌이다 검거되어, 사형판결을 받은 그날 죽은 22세 젊은 여성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와 같은 사람들의 뜨거운 용기와 시원한 희망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피 숄과 ‘백장미’라는 운동조직의 영화는 1982년과 2004년 사이에 여덟편 정도 제작되었다. 이유는 단지 역사나 추모의 뜻을 넘어 당시 소피 숄의 행동과 자세를 오늘날에도 적용할 수 있고, 또 필요한 교훈과 모범으로 실질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치 독재의 악몽을 경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일상적 합의 독재의 세뇌를 깨고 시민용기를 자극하는 데 있다.
얼마 전 추모 행사에 다녀왔다. 추모 행사는 ‘동백림 3인의 거장. 이응노·윤이상·천상병을 기리며’라는 제목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행해졌다. 신문을 보고 가게 된 이 행사는 의미가 크다고 본다. 1967∼68년에 박정희 독재는 죄없는 이들 예술인 3명을 포함해서 독일 등 유럽에서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 수십명을 말 그대로 납치해서 간첩죄를 뒤집어 씌워 서대문형무소에 투옥했다. 물론 잘 알려져 있는 사실들이다. 압제자들이 수없이 많은 사람을 끌고 가서 고문하고 가혹한 짓을 일삼았던 서대문형무소는 어떤 곳인가?
1907년 3차 한·일협약에서 일본은 대한제국의 사법권을 빼앗은 뒤 서대문 금계동(현 현저동)에 ‘경성감옥’을 준공했다. 3·1운동 이후에 서대문감옥으로 개칭된 이곳은 10대 후반인 유관순을 포함한 3천명이 넘는 수인들이 수용되었다. 광복이 되고 나서 미군정 하에서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한국 현대사의 독재자들이 서대문형무소,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 등으로 이름을 바꾸며 ‘공공의 적’들을 처리하는 수용소로 사용했다. 노태우 독재 때는 87년 항쟁으로 이룩한 ‘민주화’를 상징이라도 하듯 구치소는 서대문에서 오늘날의 서울구치소가 있는 경기도 시흥군 의왕읍 포일리로 옮아갔다. 그러나 독재는 끝나지 않았다. 바로 이 구치소에서 수감 생활을 한 송두율 사건을 비롯하여 일제 하 유관순이 옥사한 5년 뒤에 제정된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한, 오늘날까지 존재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을 휘두르며 언론의 자유를 짓밟는 사례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곳에서 3인의 거장을 추모하는 일은 단지 기억하는 것에 그치면 안 되고, 더 나아가 그들을 기려야 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 왜 이들이 그렇게 당했어야 했고, 왜 그들을 투옥한 악법이 아직도 살아있으며, 왜 아직도 그들의 명예회복이 안 되고 있느냐 라는 질문을 적극적으로 던져야 한다. 그러나 그날 행사는 이런 추모(追慕)가 아니라 이 사회의 추모(醜貌)일 뿐이어서 과거사 정리의 현주소를 보여준 사례인 듯했다. 동백림 사건은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결국 지난해 초에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발전위원회가 ‘억지로 만들어진 조작사건’이었음을 밝혀냈고, 정부 차원에서 관련 피해자들에게 포괄적 사과를 권고했는데도 정부와 정치계는 아직도 구체적인 사과 조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이유가 있다. 정치계는 그들이 생각하는 ‘여론’을 눈치보느라 국가보안법의 존폐 견해조차 취하기 어려워하는 만큼 그들에게 행동까지 요구하면 무리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론을 형성하는 사회는 보수언론의 냉전 선전에 세뇌당해 실로 ‘보안’법인 줄 아는 모양이다.
추모 행사는 정말 돈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준비한 행사였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뿐이었다. 문화예술 및 정치계에서 온 후원자와 내빈의 연설은 ‘지나가면서 악수하는 것’, 즉 하나의 수사처럼 보였다. 이 행사의 주인공은 무대 뒤에 걸린 대형사진 속에서만 있었다. 그러나 백기완 선생, 민영 시인 등 초청 인사가 무대에 나서자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특히 백기완 선생은 추모 행사의 의미를 회의하며 ‘민간독재’까지 주장하면서 쓴 소리를 퍼부었다. “진정으로 세분을 기리기 위해서는 그들의 정신을 무기로 삼아 민간 독재시대를 청산하는 싸움에 나서야 한다!”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옛날 이 ‘재야 수용소’에 관심없이 독립문 앞 도로를 바삐 지나가는 자동차들에까지 흘러들어 갔으리라. 그러나 거기까지만. 카메라도 순간의 표적을 놓친 듯했다. 역시나 이튿날 신문과 방송에서는 우아한 옷차림으로 노래하고 피아노 치는 사람들의 모습만 나올 뿐이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행사 때 보고 들은 거장의 작품들이 너무나 분명한 말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철사·한지·밥풀로 만든 이응노의 <군상>(1968)이 인상적이었다. 25x17x17cm에 불과하지만, 어깨동무를 하면서 춤추는 사람들의 즐거운 모습의 상(像)이다. 매우 작은 이 작품은 재료와 작업환경이 형편없어도 얼굴에 새겨져 있는 기쁨과 훨훨 날아갈 듯한 가벼운 몸짓이 생생하다. 옥중에서 믿기 힘들 정도의 열정으로 창조력을 발휘하면서 밥까지 아끼는 소피 숄의 멋진 모습이 떠올랐다.
디스토피아의 반대말은 유토피아보다 에우토피아가 더 정확하다. 하여간 중요한 것은 이를 위한 강한 믿음과 의지인데, 진정한 추모, 즉 과거에 대한 정리 없이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