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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있수다] 청소의 쾌감
정재혁 2006-08-02

예전에 일본의 모 쇼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여배우는 취미가 뭐냐는 질문에 청소라고 답했다. 객석에선 “에~” 하는 소리와 웃음이 터져나왔고, 그 배우는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변명했다. 청소와 취미라는 두 단어의 불협화음. 하지만 나는 이 둘의 조합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사실 나도 청소를 취미로 삼은 사람 중 한명이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한 표현, 내게 취미는 청소가 아니지만, 청소는 취미다.

청소의 쾌감은 크게 3가지 정도로 나뉜다. 첫째는 어지러운 책상 위와 방 안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포만감. ‘정리할 것이 생겼다’에서 비롯된 이 기분은 지저분한 것들이 앞으로 어떤 새로운 방식으로, 그럴싸한 조합을 만들어낼지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한다. 마치 여행을 떠나기 전 계획을 세우듯 청소하는 나는 버려야 할 것들과 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 사이의 경계를 기준으로 청소 계획을 세운다. 둘째는 말 그대로 청소하는 기쁨. 주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청소하는 내 모습은 마치 헬스클럽에서 운동하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근육을 움직이고, 땀을 흘리는 신체의 동작도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만, 운동이 내 체력을 단련하기 위한 것이라면, 청소는 내 정신을 정화하기 위한 것이다. 보이지 않던 책상 위에 여백이 보이기 시작하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하얗게 변하는 바닥의 표면을 보면 그야말로 무언가 정화되는 느낌이 온몸에 감돈다. 셋째 쾌감은 청소하고 난 뒤 느껴지는 새로움. 보고 또 보았던 방의 전경을 다시 또 보고 싶어지고, 공부도 안 하면서 책상 위에 앉아 있고 싶은 기분은 내가 청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언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어제와는 다른 곳에 온 듯한 상쾌함. 나에게 청소는 사실 취미 이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물리적인 시간과 육체적인 피곤함을 이유로 청소하기를 싫어한다. 이는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청소하는 순간의 쾌감은 충분히 알지만, 이를 실천하기란 꽤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최근 내가 찾은 대안은 컴퓨터 청소다. 오랫동안 쌓아놓았던 파일들을 휴지통으로 넣을 때의 시원함, 휴지통을 비울 때의 통쾌함. 가끔씩 바탕화면을 바꿀 때면, 마치 도배를 새로 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언제부턴가 나는 정리하는 것, 새롭게 시작하는 것, 무언가 계획을 세우는 일들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영화제를 갈 때도 무슨 영화를 볼까 고르는 시간이 더 좋았고, 엄청난 작업을 눈앞에 두고도 지나간 자료들을 삭제하는 일이 더 좋았다.어쩌면 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리셋버튼 앞에서 소심하게 청소나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청소가 취미라고 답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변명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가, 본래 취미란 그래야 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