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두번 한국 무대에 오른 적이 있는 슬라바 폴루닌의 <스노우쇼>는 사람의 말(言)이 얼마나 무력한지 일깨우는 마임 공연이다. 외로움에 지쳐 밧줄로 목을 매려고 하지만 나비 한 마리를 보고 죽음을 포기하는 한 남자, 바람을 품어 부풀어오른 자기 외투를 안고 플랫폼을 도는 이별의 춤. 이처럼 음악과 이미지와 몸짓에 기대어 수많은 감정을 찰나에 담는 <스노우쇼>는 광대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아득한 향수를 불러온다. 스스로를 다치게 하면서 웃음과 눈물을 한순간에 담았던 광대들은 자루처럼 헐렁한 노란색 작업복과 발에 맞지 않는 빨간 신발 차림의 슬라바 폴루닌과 함께 망각의 세월을 건너 우리 곁에 다가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를 보기 위해” 러시아의 작은 고향 마을을 떠났던 폴루닌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마임 공연을 보고난 다음 그때까지 꿈꾸었던 엔지니어가 되는 대신 광대가 되었다. 그는 열살 때 처음으로 <키드>를 보고 사랑하게 되었다는 찰리 채플린의 무성연기와 러시아 광대들의 전통을 자신의 마임속에 끌어들였고, 극단 리체데이를 설립하여 철의 장막을 건너 세계를 유랑하기 시작했다. 폴루닌이 챙 넓은 모자와 잿빛 외투, 오리발처럼 달랑거리는 신발을 걸친 세명의 광대들을 이끄는 <스노우쇼>는 폴루닌이 공연해온 작품 중에서 대표적인 장면들을 모은 것. <익스프레스>는 고독이라는 키워드로 연결되는 이 공연을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에 비교하며 무대에 홀로 던져진 남자와 그의 침묵이 빚어내는 마술의 순간을 주목했다.
폴루닌이 커다란 전화기를 끌어안고 웅얼거리는 순간을 제외하면 <스노우쇼>는 사람의 목소리를 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스노우쇼>의 광대들은 밤을 새어도 다하지 못할 이야기를 쏟아내는 듯하다. 간신히 끌고나온 침대가 보트로 변해 달빛을 그대로 흡수한 듯 은빛으로 반짝이는 바다를 건너고, 빗자루 끝에서 딸려나온 거미줄은 끝도 없이 펼쳐지며 객석을 뒤덮고, 이별을 재촉하는 기적 소리에 서글퍼진 광대는 차마 무거운 신발을 떼지 못한다. 그 모습을 보며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스노우쇼>의 절정은 눈물방울에 젖은 편지가 눈송이로 변하며 무대와 객석에 흩날리는 대목일 것이다. 웃음에 눈물이 스미고 한 남자의 슬픔이 아름다운 눈송이로 관객을 매혹하는 이 에피소드는 말로 설명하려는 순간 무력해지는 감정의 정수를 보여준다.
폴루닌은 자신의 공연이 어린아이와도 같다고 말했다. “아이는 부모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이해받고 싶어하는 순간, 진정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리고 매우 느리게 자라나기 시작한다. <스노우쇼>도 그와 같다. 내가 하고 있는 공연은 때로 멋지고 때로 형편없지만, 어린아이처럼 천천히 자라나고 있다.” 세계를 돌아 한국에 돌아온 <스노우쇼>가 어떤 모습으로 자라고 변화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