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연말에는 축전을 보낼 생각이다.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116-**번지 한겨레신문사 4층 신윤동욱씨 앞으로. “당신의 직장생활 10년을 축하합니다.” 정말로 내 평생에 단 한번 챙기고 싶은 기념일이 다가오고 있다. 내가 직장생활 10년을 버텨낼 줄은 정말로 몰랐다. 정말로 장하다.
서울 1996년 겨울, 신윤동욱 소년은 밥벌이를 시작했다. 방년 스물다섯의 소년 아니 청년은 학교를 떠나기가 너무나 무서웠지만, 더이상 머무를 명분이 없었다. 스무살에는 아니 스물다섯살까지 왜 그렇게 두려운 일들이 많았는지 모르겠다. 정말로 학교를 떠나서 감당해야 할 관계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어쩌다 빨간 물이 들어 있었고, 성격은 소심했으며, 게다가 술도 못 마셨다. 어쩌다 운이 좋아 취직이 됐을 때, 후배들은 내기를 했다고 했다. 내가 6개월 버틴다, 1년 버틴다, 내기를 했다고 했다. 그렇게 나의 공포는 들키기 쉬웠다. 조직이 무서웠고, 세상이 두려웠다. 서른이 넘어서야 뒤늦게 알았지만, 모든 것은 해보기 전의 공포가 정말로 두려운 법이다. 엉뚱하게 광고회사에 취직을 하면서 엉뚱한 생각도 했다. 자본의 카오스가 직장을 결정하는 것과 사회주의 관료가 일자리를 정해주는 것, 어느 쪽이 더 폭력적일까. 어쨌든 밥벌이가 시작됐다.
막상 해보니 못할 짓은 아니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나같은 인간도 내치지 않았다. 그래도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3년만 버티자, 3천만원만 모으면 학교로 돌아간다, 그렇게 시간을 죽였다. 언제든 떠나기 위해서, 발목 잡히지 않기 위해서, 정기적금을 들지 않았다. 나름의 유구한 전통은 오늘도 지켜지고 있다.물론 때때로 목돈이 필요했으므로 월급 통장에 들어온 돈은 차곡차곡 쌓였다가 한꺼번에 인출됐다. 첫 번째 직장에서는 “나는 고립된 섬이야”라고 주문을 걸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렀다.
나에게 약속한 3년이 됐는데, 무언가 시도는 해야 된다고 스스로를 채근했다. 밥벌이를 그만두기에는 용기가 부족했다. 어쩌다 아니 운좋게 <한겨레21>로 옮기게 됐다. <한겨레>니까 월급 반, 운동 반, 그렇게 은근한 자부심을 품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이직을 하면서 월급이 줄었다. 직장을 옮기기 전, <한겨레>에 다니고 있었던 친구에게 물었다. “먹고살 만큼은 주지?” 돌아보면, 소박한 질문이었다. 그때는 언제든 가난할 준비를 하자고 다짐했다. 역시나 우습지만, 그때는 5천원이 넘는 밥은 사먹지 말자는 원칙도 지켰다. 물론 이제는 먹고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일년에 두어번 비행기도 타야 하고, 철마다 예쁜 옷도 사지 않으면 버티지 못한다. 심지어 길가다 혼자서 분통이 터진다. 직장생활 10년이면 얼마는 모았어야 하는 것 아니야? 구체적인 액수까지 생각하다가 그 구체적인 액수의 3분의 1밖에 없는 현실을 떠올리면서 분노가 치민다. 정말 이유없는 반항이요 방향없는 분노다. 겨우 10년 만에, 그렇게 치사한 중산층 아저씨가 됐다.
언제나 나의 욕망은 그리움의 형식으로 포장됐다. 놀고 싶은 욕망은 학교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회에 대한 불만은 운동에 대한 그리움으로 포장됐다. 시간은 무섭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박완서의 동명소설 제목으로 순수한 슬픔의 정서인 ‘눈물’을 의미함)이라고 생각했던 무언가도 슬며시 빠져나가 버렸다. 두어해 전까지 주말이면 시간을 ‘죽이러’ 다녔던 집회에도 가지 않는다. 대신에 주섬주섬 운동복을 챙겨서 헬스장으로 향한다. 나는 그렇게 ‘운동’에서 ‘운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돌아가고 싶은 시절도 없어졌다. 그리운 공동체도 사라졌다. 갈수록 철저한 고립생활이다. 사람도 만나지 않는다. 아무도 그립지 않다고 하면 건방진 말이지만, 누구도 애달프게 그립지는 않다. 어떻게든 먹고야 살겠지, 자신감을 얻은 대신 무엇을 할 것인가, 신념을 잃었다. 가끔은 오래된 노래가 입가를 맴돌기도 한다.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그렇다고 슬프지는 않다. 다만 10년 전 세상이 두려웠던 청년에게 말해주고 싶다. 막상 해보면 별로 두려운 일은 아니라고. 그리고 오늘의 나에게 축전을 띄운다. 누구도 축하해주지 않을 당신의 직장생활 10년을 열렬히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