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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저널리스트 존 알퍼트를 만나다 [1]
장미 사진 서지형(스틸기사) 2006-07-25

EBS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EIDF)이 올해로 3회째를 맞아 감독회고전을 준비했다. 회고전의 주인공은 존 알퍼트(58) 감독. 그는 홀로 ENG카메라를 짊어지고 뉴스가 있는 곳은 어디든 누비고 다니는 비디오 저널리스트이다. 알퍼트는 지난 44년 동안 세계 곳곳의 분쟁 지역과 세기의 권력가들, 나아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들까지 하나로 묶을 수 없는 다채로운 소재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EIDF쪽의 초청으로 한국을 찾은 그를 만난 것은 6월11일 오후. 지금까지의 경력이 입증하는 왕성한 활동력 때문일까, EIDF쪽의 행사요원은 알퍼트가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호텔 헬스장에 가서 몸을 풀었다고 귀띔했다. “헬로.” 그는 먼저 인사말을 건넨 뒤 모자를 벗으며 악수를 청했다. 한때 고집스러운 검은색이었을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가고 있었지만, 그의 손은 아직도 따뜻하고 단단했다. “알퍼트는 사람들에게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하는 천부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개인적인 담화이거나 여러 사람과의 만남이거나 그는 촬영과 녹음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게끔 대화를 이끌어갔다.” 2시간 남짓한 인터뷰가 끝나고 주섬주섬 녹음기와 메모지를 챙기면서 자료를 수집하며 읽었던 <세계 다큐멘터리 영화사>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지난했던 장마가 무색하게 뜨거운 태양이 대지를 달군 날이었다.

“목숨에 위협을 느꼈던 때야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몇번이나 자신의 일이 의미있다고 느낄까. 한두번쯤 될까. 내가 하고 있는 일로 한명의 목숨을, 나아가 몇 천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건 분명 대단히 멋진 일이다.” 스스로가 인정한 대로 존 알퍼트는 위험천만한 길을 걸어왔다. 그는 베트남, 캄보디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필리핀을 비롯한 수많은 격전지와 피델 카스트로, 사담 후세인 등 대형 방송사조차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권력가들을 인터뷰해왔다. 게다가 1990년대에 이르면 감옥에 들어가 수감자들을 취재하거나 대형 범죄 조직에 속한 범죄자들을 뒤쫓으며, 미국사회의 그늘을 생생하게 포착하기도 했다.

알퍼트가 위험이라는 적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항상 분쟁 지역이나 권력자에게만 관심을 쏟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미국 인디언, 카우보이, 복서, 브레이크댄서, 여자농구선수단 등 소소한 이웃들의 초상 역시 세밀하게 그려왔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한 가지에 집중을 못하는, 주위가 산만한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하더라. (웃음) 그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일 거다. 지금도 창문 옆에 있는 TV를 보며 저기 저 초록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남자는 뭐하고 있는지 궁금해하고 있잖은가. 나는 실제로 다양한 사안들에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다.” 알퍼트가 가끔씩 전쟁터를 떠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어떤 사람은 팔이 잘려나가고 또 어떤 사람은 죽어간다. 매일 그런 모습들을 봐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견딜 수 없을 때도 있다.” 낮은 목소리에서 지금껏 그가 카메라를 통해 응시해온 서글프고 참담한 풍경이 묻어나는 듯했다. 알퍼트를 소개하기 위해 덧붙여야 하는 설명들은 그 밖에도 많다. 12차례나 에미상을 수상한 TV리포터. 미국 최초의 비영리 지역사회 미디어센터인 DCTV의 설립자. ENG카메라를 이용한 취재의 개척자. 그토록 어지러운 발자취 속에서 단 한 가지 뚜렷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은 끓어오르는 모험심이다. 17세기가 지나며 모험가의 세계는 끝이 났지만, 그의 핏속에는 여전히 모험가의 피가 흐른다. 알퍼트의 행적 앞에 ‘최초의’(first) 혹은 ‘유일한’(only)이라는 수사가 자주 붙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공산혁명 뒤 쿠바에 입성한 최초의 미국인 TV리포터

1970년 뉴욕 콜게이트대학을 졸업한 알퍼트는 2년 동안 택시기사, 주차요원, 신문배달원, 짐꾼, 플라스틱 공장 노동자 등 온갖 직업들을 섭렵했다. “주요한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70년대의 미국 청년들은 사회 변혁을 위해 정부나 대기업의 주장에 반하는 집회를 열거나,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곤 했다. 같은 맥락에서 사회에서 인정받는 번듯한 직업을 얻는 일 역시 옳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 그러니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아주 단순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뚜렷한 목표 의식이 없었던 알퍼트가 비디오 촬영을 시작하게 된 데에는 뒤에 그의 아내가 된 쓰노 게이코의 영향이 컸다. 미술을 공부하는 유학생으로 미국에 와 있던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해 번 돈으로 소니 카메라를 구입했고, 이후 알퍼트 역시 영상 매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택시기사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택시기사들이 처한 열악한 환경을 비디오로 찍어 보여줬는데, 동료들의 호응이 대단했다. 마치 마술지팡이 같았다. 그때 처음으로 미디어의 강렬한 힘을 깨달았다. 내 삶이 변하는 순간이었다.”

“마술지팡이”를 휘두른 것처럼 알퍼트의 삶이 본격적으로 바뀐 것은 그가 최초로 공산혁명 뒤 쿠바에 입성한 미국인 TV리포터가 된 다음부터였다. 쿠바에 도착한 알퍼트는 쿠바인들의 일상생활을 담은 잔잔한 다큐멘터리 <쿠바: 사람들>(1974)을 찍었다. “그때 나는 쿠바에 대한 장밋빛 환상을 품고 있었다. 당시 미국에는 쿠바 정부가 교육, 의료 등의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해 모든 국민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식의 얘기들이 퍼져 있었다. 나는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지만, 어떤 기자도 쉽게 쿠바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때 수많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돌려놓았던 그의 재능이 처음으로 발휘됐다. 그는 먼저 ‘두드리면 열린다’는 명제 아래 쿠바인 외교관을 친구로 만들었다. “쿠바인들은 야구를 좋아했다. 나는 일요일마다 센트럴파크에서 쿠바인들과 야구 시합을 벌였다. 2년이 지나자 그들은 나를 믿기 시작했고, 결국 그러한 인간적인 믿음을 토대로 쿠바에 입국할 수 있었다.” <쿠바: 사람들>은 이후 TV방송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알려졌고, 이때부터 그의 활동은 오르막길에 올랐다.

알퍼트는 또한 베트남 전쟁 이후 베트남 땅을 밟은 최초의 미국인 TV리포터이기도 하다. “얽힌 얘기가 무척 길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미국에 사는 중국인들에 대한 영상물인 <차이나타운: 미국 내 이민자들> 때문이다. <차이나타운…>을 본 베트남인들은 내가 중국인들을 세심하게 잡아낸 것처럼 베트남에 대해서도 잘 그려낼 거라고 믿었다. 사실 베트남의 경제력을 쥐고 있는 이는 화교들이다. 그런 까닭에 베트남인들은 화교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했고, 그들 공동체 속으로 파고들고 싶어했다. 내가 <차이나타운…>을 통해 해낸 것처럼 말이다.” 베트남족에서는 알퍼트에게 베트남 입국을 원한다면 2주 안에 준비를 마치라고 통보했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베트남에 입국한 그는 그곳의 풍경을 담아낸 <베트남: 그 조각들을 주우며>(1977)를 완성했다. 이처럼 누구도 가보지 못했던 곳에서,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연이어 성공하자 대형 방송사들이 그를 잡으려 발벗고 나섰다. <ABCgt; <CBS> 등 많은 방송사에서 그의 작품을 방영하길 원했지만, 그는 그중 <NBC>와 손잡고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존 알퍼트는 그 뒤에도 캄보디아, 필리핀, 중국 등 아시아 지역에 대한 취재를 계속하며, 부패한 정권에 대한 비판을 서슴없이 해왔다. 그중 하나가 캄보디아에서는 찍은 영상물로 당시 크메르루주의 지도자 폴포트가 자행한 대량 학살극을 담아내 화제를 일으킨 바 있다. “저 멀리까지 온통 사람들의 유골로 뒤덮인 장소에 가본 적도 있었다. 유골들이 너무 하얘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만큼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폴포트로 인해 죽어갔다.” 잠시 사그라들던 알퍼트의 목소리는 필리핀에서 찍은 영상물들을 설명할 때 다시 힘을 얻었다. 그때 그가 기록했던 사건들은 마르코스 정권의 부패와 NPA 게릴라들의 무자비함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은 마르코스 정권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내가 촬영한 영상은 그 지지를 철회하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천안문 사태가 발생했을 때 관광객으로 위장한 채 중국에 머물렀던 그는 그로 인해 큰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천안문 사태 이후 다시 중국에 입국했을 때, 중국 경찰들은 내 작업을 강력하게 견제했다. 동료 중 하나를 잡아가서 감옥에 가두거나, 주변 중국인들에게 내 질문에 어떤 대답도 하지 말라며 협박했을 정도다. 그때 찍은 영상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많지만, 당시 아버지가 임종을 앞둔 상태였기 때문에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옆에서 그의 임종을 지켜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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