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에 타계한 극작가 차범석 선생은 생전에 3무(三無), 즉 휴대폰, 자동차, 신용카드가 없는 생활을 고수하셨다고 한다. 현대를 살면서 저 세 가지 무기(三武)가 없는 생활이 과연 가당키나 한 것일까? 나를 찾는 전화가 없고, 무이자 할부받을 일 없고, 지옥철 탈 일이 절대 없다면 한번 해보고 싶은 생활이다. 하지만 난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가 될 만한 여유가 없다. 내겐 더 빨리 걸고, 달리고, 긁고 싶은 욕구가 잔뜩 충전돼 있다. 멋진 자동차를 굴리는 친구를 보면 부모 잘 만나서 좋겠네, 하면서 운전을 배우지 않았던 것은 (대외용으로 말하자면) ‘걸어 다니는 게 좋아서’였다. 어쨌든 뒤늦게나마 달리고자 하는 욕구를 해결하고자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하고 말았다. 그것도 1년 중 장마까지 끼어 있는 ‘가장 재수없다’는 기간에.
나는 채소 장사를 할 거냐는 비아냥 속에서도 꿋꿋이 1종 보통을 선택했다. 하지만 차를 몬 지 이틀 만에 2종 자동을 선택할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클러치’ 때문이다. 클러치는 세게 밟아 서서히 정지하고, 천천히 떼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클러치를 너무 빨리 떼면 차의 시동이 꺼지기 때문에 치사하지만 ‘시동님, 제발 꺼지지 말아주세요!’ 하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밟고 있어야 한다. 이 생소하고 고집 센 장치 덕분에 운전 연습이 끝나면 왼쪽 무릎이 몹시 땅긴다. 이상한 버릇도 생겼다. 화장실의 물 내리는 버튼을 밟거나, 휴지통의 페달을 밟을 때도 마치 클러치를 밟듯 지그시 눌렀다 떼게 된다. <쉘 위 댄스>에서 뒤늦게 춤바람난 샐러리맨이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도 스텝을 밟는 모습은 나랑 별반 다를 게 없다.
처음 일주일은 자동차가 네 바퀴 괴물처럼 느껴졌다. 조급한 탓에 횡단보도 앞에서 정지하지도 않고, 중앙선 위를 줄타기하듯 따라가거나, 경계석 위를 올라갔다 내려와, 핸들을 급하게 돌리기까지 하면 덜컹덜컹 정신이 하나도 없어진다. 현실이었다면 이미 이승발 황천행 비행기의 이코노미 좌석을 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연습을 하면 할수록 괴물 같던 차가 점점 네 바퀴 애완동물처럼 여겨진다. 핸들은 백화점 안내 데스크의 숙녀처럼 상냥하고 클러치도 내 발밑에 앉은 개처럼 고분고분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운전을 배우면 배울수록 운전은 하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든다. 안전교육 때 보았던 손가락 하나없는 교통사고 피해자의 모습이 아른거려서만은 아니다. 솔직히 무섭다. 선배 운전자들의 입에서 ‘사고낼 것 신경 쓰면 운전 절대 못해’라는 닳고 닳은 듯한 말투에 길들여지는 것도 무섭고, 핸들을 갓난아기 잡듯 꽉 잡은 채 땀을 삐질거리며 거북이 운전을 하던 내가 이젠 핸들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듯 돌리고 있단 사실도 무섭다. 더욱이 나보다 겨우 일주일 늦게 운전을 배운 연습생 차량 뒤에 차를 스토커처럼 바짝 붙이며 앞 운전자를 욕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백미러로 쳐다보게 되기도 한다. 앗, 이건 아니잖아?
솔직해지자. 내 휴대폰은 사실 시계 기능으로 겨우 버티고 있고, 무이자 할부받을 만큼 비싼 물건을 살 돈 같은 것도 없고, 지옥철을 탈 만큼 이른 시간에 출근할 곳도 내겐 없잖은가? 그럼에도 왜 조급하고 왜 바쁜 척하고 왜 가지려고 야단일까? 여유가 있는 사람이 여유를 부릴 줄 안다고 말하면서, 또 가진 것은 끝내 포기하지 못하면서도 여유는 쉽게 포기해버리고 마는 것일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새삼 차 선생의 3무 실천이 존경스러워진다. 자투리 시간이 날 때마다 문자메시지 전송 욕구를 충동질하는 휴대폰, 기름값과 자동차 보험료를 달라고 떼쓰는 자동차, 등도 아닌 주제에 매일 긁어달라고 보채는 카드는 三武가 아니라 三無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나보다. 어려운 건 실천이다. 그래서 나도 ‘언젠간’ 현대판 쇠고랑을 내 삶에서 떼어내는 일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물론 처음 클러치에서 발을 떼는 연습을 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또 실천까지는 아주 먼 얘기겠지만, ‘언젠간’ 말이다. 만일 주위에 3무 실천 과정을 카드 무이자 할부해서 속성으로 교육받을 수 있는 학원이 있다면 내 휴대폰으로 연락주시기 바란다. 주차할 데가 많은 곳이면 대환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