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믹스 원작 영화의 흥행성적에 감화된 할리우드 제작자들은 숨어 있는 DC와 마블의 슈퍼히어로들을 찾아가 스크린 데뷔를 타진하고 있다. 당신이 앞으로 5년간 스크린에서 목도하게 될 모든 새로운 슈퍼히어로물들의 리스트.
<와치멘>(Watchmen)_우울증에 걸린 히어로들
DC코믹스가 <와치멘>을 출간한 것은 지난 1986년이었다. 여러 명의 히어로가 손을 잡고 일한다는 설정은 <엑스맨>이나 <판타스틱4>류의 선배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코믹스 팬들은 곧 <와치멘>이 전혀 다른 차원의 슈퍼히어로물이라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치, 공산주의자와 싸우던 히어로들은 전후 국가의 관리를 받으며 지낸다. 법을 준수하지 않고서 악당을 타도하는 행위는 금지되었고, 히어로들은 초능력을 이용해 회사를 운영하는 등 조용히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간다. 그러던 어느 날 코미디언이라 불리는 히어로가 살해당한다. 이에 몇몇 히어로들이 코미디언의 죽음 뒤에 숨겨진 음모를 캐내기 위해 뭉친다. 자신의 액션 피겨를 팔아먹으며 살아가는 오즈만디어스, 나이트아울, 로르샤흐와 이미 인간의 능력치를 벗어나버린 초인 닥터 맨하탄이 그들이다. 코미디언의 죽음 뒤에는 히어로를 이용해 국가적 정의를 추구하는 미국 정부를 향한 오즈만디어스의 자기 파괴적인 계획이 숨어 있었다.
<와치멘>은 우울증에 걸린 히어로들의 세계다. 사람들은 히어로를 존경하는 동시에 극도로 혐오하고, 이런 세상에서 히어로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느낀다. 결국 버림받은 히어로들은 스스로의 세계를 다시 되돌리기 위해 끔찍한 살육의 계략을 꾸미면서 그것이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의 정의라고 합리화한다. “와치멘은 현실 세계에 대한 우화다. 나는 슈퍼히어로들이 살아 있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를 상상해보았다. 그랬더니 세상은 지금보다도 더 끔찍한 장소였을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같은 해 프랭크 밀러의 <흑기사 돌아오다>가 배트맨을 파시즘적 영웅주의로 가득한 우울증 환자로 묘사하며 전통적 히어로물의 파괴를 선언했다면, 무어는 파괴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히어로물의 미래를 예언한 것이다. 그래서 <와치멘>은 테리 길리엄이나 대런 애로노프스키 같은 몽상가들이 오랫동안 꿈꾸어온 꿈의 프로젝트였다. 결국 메가폰을 쥐게 된 것은 <블러디 선데이>와 <본 슈프리머시>의 폴 그린그래스. 악당과의 일전도, 정상적인 히어로도 없는 우울한 삽화는 어떤 방식으로 스크린에 이식될 수 있을까. 2006년 개봉을 목표로 제작 중인 영화 <와치멘>은 슈퍼히어로물에 바치는 할리우드의 음울한 장송곡이 될 확률이 크다.
<그랜 랜턴>(Green Lantern)_초록색 타이츠를 입은 초인
초록색 타이츠를 입은 초인 그린 랜턴은 1940년에 등장했다. 평범한 엔지니어였던 그린 랜턴은 유성의 파편으로 만들어진 반지를 소유하게 되고, 반지는 총알을 막고 벽 위를 날렵하게 뛰어다닐 수 있는 초인적 힘을 그에게 전해준다. <그린 랜턴>의 인기는 다른 히어로물들에 밀려 급속하게 식어버렸지만 1959년에 새로운 시리즈가 출범하면서부터 초록 초인의 모험은 재개되었다. 새로운 시리즈는 그린 랜턴의 세계를 은하계로까지 확장하는 데 이르렀고, ‘저스티스 리그’라 불리는 단체를 위해 봉사하는 3599명의 그린 랜턴들이 우주 곳곳에서 정의를 위해 싸운다. <그린 랜턴>이 새로운 독자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은 작가 데니스 오닐이 마약문제를 비롯한 60년대 미국의 사회적 현안들을 시리즈 속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시리즈는 미국 코믹스의 사회적 위상을 어느 정도 올려놓았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배트맨이나 스파이더맨 못지않은 열혈팬들을 양산한 <그린 랜턴>의 영화화는 그간 인터넷 코믹스 사이트의 가장 활발한 논쟁거리 중 하나였다. 그간 그린 랜턴 역으로 거론돼온 배우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존 카비젤, <버피와 뱀파이어>의 니콜라스 브랜든 등이 있으며, 최근 잭 블랙이 관심을 보였다는 풍문이 번지자 DC는 성난 팬들을 달래느라 곤욕을 치러야 했다.
<원더우먼>(Wonder Woman)_성조기 복장의 여군 출신 슈퍼우먼
거짓말 탐지기의 발명가 윌리엄 몰튼 마스턴에 의해 창조된 원더우먼은 1941년에 DC의 전신이었던 ‘디텍티브 코믹스’가 발간한 <스타 코믹스>를 통해 데뷔한다. 파라다이스섬에 추락한 트레버 대령은 섬을 지배하는 것이 살아남은 아마존 여인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트레버 대령은 여왕의 딸인 다이아나 공주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고, 다이아나 공주는 대령의 휘하에서 여군으로 근무하며 종종 성조기 복장을 한 원더우먼으로 변신해 악당들과 싸운다. <원더우먼>이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 계기는 1975년부터 방영된 린다 카터 주연의 TV시리즈 덕이다. 시리즈는 특유의 캠피한 매력으로 인해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실사 TV시리즈 중 가장 열성적이고 지속적인 팬층을 낳았다. 현재 2007년 개봉을 목표로 한 <원더우먼>의 영화화는 <미녀와 뱀파이어>의 창조자인 조스 웨든이 지휘하고 있다. 아직까지 배역이 정해지지 않은 가운데 캐서린 제타 존스, 샌드라 불럭과 제시카 비엘 등이 거론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반 헬싱>과 <언더월드> 등에서 액션 스타로서의 자질을 보여준 케이트 베킨세일이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캡틴 마블>(Captain Marvel)_고대 마법사의 힘을 가진 히어로
빌 파커가 1940년에 창조한 캡틴 마블은 슈퍼맨에 대적할 만큼 인기있는 슈퍼히어로였다. 캡틴 마블의 정체는 빌리 뱃슨이라는 젊은이로 마법의 주문인 ‘샤잠!’을 외치면 고대 마법사의 힘을 얻어 캡틴 마블로 변신하게 된다. 이 고전적인 히어로는 각각의 단행본을 100만권 이상 팔아먹은 최초의 코믹스 시리즈로 기록되며 작은 출판사 포셋에 돈다발을 안겨주었다. 독점 시장을 꿈꾸던 DC는 <캡틴 마블> 시리즈를 <슈퍼맨>의 표절이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가 슈퍼히어로 장르의 폭발적인 상승세를 스스로 끌어내릴 수 있다는 판단에 포기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슈퍼히어로의 시대가 개막한 것이다. <캡틴 마블>은 1950년대에 인기 하락으로 막을 내렸지만 판권을 산 DC는 1967년에 새로운 시리즈를 발간했고, 1974년과 77년에 걸쳐서 TV시리즈로 만들기도 했다. 지난 2000년부터는 설정을 현대적으로 완전히 바꾼 <캡틴 마블> 시리즈가 발간되고 있다. 2007년 개봉예정으로 제작 중인 <캡틴 마블>의 극장판은 <롱기스트 야드>의 피터 시겔이 메가폰을 쥐고 지휘할 예정이다. 영화의 제목은 주문의 이름인 <샤잠>으로 결정되었다.
<서브-마리너>(Sub-Mariner)_반양서류 육체를 가진 물속의 왕자
1939년에 처음 등장한 <서브-마리너>는 물속의 히어로다. 주인공인 나모 왕자는 일종의 반양서류 인간이다. 그는 부계의 혈통을 인간으로부터 물려받은 덕에 바닷속과 육지에서 동시에 거주가 가능하다. 처음 등장시 맨해튼을 박살내려던 그는 여경찰 베티와 사랑에 빠지면서 인간을 도와 악당들을 물리치는 히어로로 거듭난다.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서브-마리너> 시리즈는 1962년에 새롭게 시작되고 반양서류 인간 서브-마리너는 포니테일을 한 근육질의 정통 히어로로 거듭나게 되었다. 90년대 후반에 시리즈는 종결되었으나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이 직접 영화화를 계획 중이다.
<고스트 라이더>(Ghost Rider)_어둠의 존재와 계약을 맺은 스턴트맨 출신 바이커
<고스트 라이더>는 다른 많은 코믹스 시리즈처럼 첫 등장부터 혁명적인 진화를 겪어온 히어로물이다. 1967년에 등장한 오리지널 고스트 라이더는 미국적인 카우보이 히어로였다. 그는 빤짝거리는 코스튬을 입고서 권총을 쥐고 서부를 누비며 악마와 싸웠다. 하지만 바이커(Biker)들이 카우보이보다 더 인기가 좋다는 사실을 깨달은 마블은 1973년에 새로운 <고스트 라이더> 시리즈를 만들어냈다. 곧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마크 스티븐 존슨 감독(<데어데블>)의 <고스트 라이더>는 1990년에 새롭게 등장한 시리즈를 토대로 하고 있다. 모터사이클 스턴트맨으로 일하는 사나이가 죽은 연인을 살리기 위해 어둠의 존재와 계약을 하고는 고스트 라이더로 거듭난다는 내용. 조니 뎁이 관심을 보였던 고스트 라이더 역할은 최종적으로 니콜라스 케이지에게 낙점되었다.
<둠 패트롤>(Doom Patrol)_엑스맨에 대적할 만한 돌연변이 히어로 집단
마블이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코믹스가 될 운명의 <엑스맨>을 내놓기 석달 전, DC는 비슷한 컨셉의 <둠 패트롤>을 발간했다. 두 작품 모두 휠체어에 앉은 천재에 의해 지휘되는 돌연변이 집단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DC와 마블의 묘한 라이벌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둠 패트롤>의 구성원은 강철 몸에 인간의 두뇌를 가진 로봇맨. 몸을 마음대로 줄였다 늘렸다 할 수 있는 플라스틱맨, 어두운 에너지를 지닌 또 다른 자신을 60초 동안 내보낼 수 있는 네거티브맨 등이며, 이는 <둠 패트롤>이 마블의 히트작인 <판타스픽4>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둠 패트롤>은 경쟁사의 <엑스맨>과 같은 거대한 인기를 누려보지 못한 채 막을 내렸지만, 돌연변이 히어로 단체 영화에 맛을 들인 할리우드가 판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앤트맨>(Ant Man)_인간의 힘을 유지한 개미 히어로
앤트맨은 마블이 1962년에 내놓은 <Tales to Astonish>의 27번째 이슈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벌레형 슈퍼히어로다. 과학자 핌은 실험 중에 가스로 변해 증발하는 새로운 종류의 액체를 발견하고, 그 액체에 인간을 개미 크기로 줄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앤트맨의 힘은 개미 크기의 몸에 여전히 유지되는 인간의 힘에서 비롯되며, 그는 특수 헬멧을 이용해 개미들과의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스파이더 맨>의 창조자인 스탠 리의 형제 래리 리에 의해서 쓰여지고 <스파이더 맨>을 그린 잭 커비의 손에 의해 탄생한 <앤트맨>은 현재 2008년 개봉을 목표로 영화화가 진행 중이다. 감독은 <새벽의 황당한 저주>의 영국 감독 에드거 라이트. 다분히 코미디 성향의 작품으로 탄생할 가능성이 짙다.
<캡틴 아메리카>(Captain America)_노골적 국가주의, 애국적 히어로
1991년에 끔찍한 저예산의 졸작으로 스크린 데뷔를 한 <캡틴 아메리카> 역시 새롭게 영화화가 진행되고 있다. 사실 <캡틴 아메리카>는 노골적으로 국가주의의 찬양을 앞세우는 애국적 히어로물의 전형이자 집대성이다. 이 작품의 등장 시기는 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맞닿아 있으며, 당시 캡틴 아메리카는 나치나 일본군과 싸우며 1940년대의 여드름쟁이 미국 소년들의 애국심을 충만시키는 데 혼신을 다했다.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성조기로 구성된 코스튬부터 새로운 정비가 필요할 것이다.
<흑기사 귀환하다>(The Dark Knight Returns)_폭력을 합리화하는 배반의 히어로
프랭크 밀러의 걸작 그래픽 노블을 빠뜨린다면 새로운 <배트맨>은 존재할 수 없다. 배트맨이 사라진 시대. 고담시는 여전히 범죄로 고통받는 악의 구렁텅이다. 저택에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브루스 웨인은 또다시 복장을 갖추어 입고 배트맨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조커를 비롯한 적들은 더욱 강해졌고, 미디어와 젊은이들은 타락의 바닥을 기어다닌다. 그러나 배트맨도 예전 같지는 않다. 육체적으로 노쇠한 배트맨은 법과 질서와 도덕에 반하는 폭력을 영웅의 이름으로 합리화하며 악당들을 처단하고, 정부의 충실한 하수인으로 전락한 슈퍼맨이 이에 맞선다.
밀러가 그려낸 배트맨은 낙관적인 미국의 영웅으로 변질되어온 배트맨의 이미지를 배반하는 카오스 덩어리 그 자체였다. 코믹스 팬들은 밀러의 해석에 환호를 보냈고, <흑기사 귀환하다>는 60년대의 짧은 전성기 이후 몰락해가던 코믹스계에 열광적인 독자들을 되돌린 업계의 신화가 되었다. 바야흐로 십대 꼬맹이들을 위한 코믹이 아니라 좀더 다양한 독자를 위한 그래픽 노블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밀러는 배트맨의 탄생을 다룬 (그리고 <배트맨 비긴즈>에 영향을 끼친) <배트맨: 영년>을 발표했고, 1988년에 밀러의 영향을 받은 팀 버튼의 <배트맨>이 개봉했다. <흑기사 귀환하다>의 영향력은 앞으로 제작될 모든 <배트맨>에서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