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일인지 나는 도저히 교정할 수 없는 결점을 가진 존재에게 강하게 끌린다. 파리가 꿀단지에 끌리듯. 예를 들면 바흐보다 비발디를 더 자주 듣고, 소설도 작가의 대표작보다 치기어린 초기작에 심금이 울린다. 적어도 내겐, 순도 높은 결함이 절충적 우수함보다 강렬한 신호를 보낸다. 내가 잉글랜드 국가대표 축구팀을 응원하는 사연도 대충 그러하다. 올해 월드컵에서 잉글랜드 대표팀이 보여준 플레이에 새로운 화젯거리는 없다. 승리를 꺼리는 듯한 선수들의 태도, 페널티킥를 일종의 무례한 짓으로 보는 게 틀림없는 어이없는 승부차기, 스벤 에릭손 감독의 뚱한 고집, 그리고 스콜라리 감독의 팀(이번엔 포르투갈)에게 져 토너먼트에서 탈락한 것까지. 이번 월드컵의 전말은 잉글랜드 팀에게 2002년 월드컵과 유로 2004의 데자뷰였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의 역사가 한줄 늘었을 뿐이다.
정작 나를 흥겹게 만든 건 잉글랜드 언론이다. 8강에서 탈락하기까지(이러니저러니 해도) 무패를 기록한 자국 대표팀에 대해 그들이 쏟아낸 기사는 철저히 불평일색이다. 영국식 코미디의 빛나는 전통인 ‘자조의 수사학’을 가히 절정까지 맛보게 하는 독설의 향연이 펼쳐졌다. 비판의 최대 표적은 ‘아름답지 못한 축구’였다. 잉글랜드 팀을 “동반한 부인과 애인 외에는 이 파티(월드컵)에 보태준 게 없는 선수들”이라고 한 <가디언>은 에콰도르와 맞선 잉글랜드가 “16강전이라 채널을 돌릴 다른 게임도 없는데” 졸전을 펼쳤다며 자국팀을 맹비난했고, <데일리 메일>은 이 경기를 끝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 비유했다. 참다 못한 스벤 에릭손 감독은 “아름다운 축구 한다고 가산점 주나?”고 반박했지만 맞불만 부채질했다. 영국 주요 언론은 칭찬과 격려에도 몹시 인색해서, 한골 넣은 이튿날 조 콜은 한 일간지에 고작 “기독교권 최고의 연기력을 자랑하는” 엄살쟁이 선수로 묘사됐다. <채널4>는 월드컵을 코앞에 둔 5월 중순, 국가대표팀 감독을 놀려먹는 <스벤- 감독, 그의 현금 그리고 애인들> 이라는 풍자 다큐멘터리를 방영해 연 2백만명의 시청자를 동원했다. 국가대표팀을 비판하거나 불리한 사실을 언급하는 일이 ‘이적행위’로 즉각 간주되는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하지만 그 모든 신랄한 보도에도 나는 잉글랜드 인들의 축구와 대표팀에 대한 애정을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축구 대표팀은 웬수 같은 애인이고, 무심한 척 곁눈질을 멈출 수 없는 밉상이다. 가학피학적이지만 그 역시 재미난 연애다. 시시콜콜 꼬투리 잡고 애태우고 때로는 놀려대는 것이야말로 대표팀을 지닌 자국팬의 즐거운 특권 아닐까? 고맙다, 사랑한다, 두 마디로는 긴 대화를 이어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