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중계에서 1분이 넘는 컷은 없다
그러나 테크놀로지가 모든 문제의 해결을 찾은 것은 아니다. 그래도 여기서 남아 있는 축구 중계 카메라의 난처함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 종목이 야구나 농구와 달리 넓은 공간에서 개인플레이와 세트플레이가 서로 혼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혹은 팀마다 그 성격이 다르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브라질과 독일의 차이 혹은 양쪽을 겸비한 프랑스. 그때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팀이 서로 대결하는 경우 경기에서 설정해야 하는 기본 앵글의 범위라는 문제이다. 두 번째는 경기장의 종횡비(縱橫比)의 난처함이다. 라이트윙과 레프트윙을 어떻게 동시에 한 프레임에 담아서 횡의 진행을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 혹은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인해 공이 갑자기 상대방의 골문 가까이 떨어졌을 때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종의 구도를 어떻게 따라갈 것인가.
축구 중계는 이 문제를 반대의 방식으로 해결했다. 축구 중계에서 1분이 넘는 컷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말뜻은 처음부터 축구 중계는 리얼리티의 연속성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그 대신 같은 순간을 다른 방법으로 두번 보여준다. 중계는 끊임없이 진행되면서 재빨리 플래시백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 플래시백은 과거시제가 아니라 현재진행 중이다. 그런데 한번은 그냥 보여준다. 그런 다음 뒤이어 분석의 숏이 진행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 보는 것이 이미 본 것이라는 것을 사실을 잠깐 잊는다. 그때 사라지는 것은 그 순간의 뒤를 잇는 데드 타임이다.
여기서 미학적으로 슬로모션이라는 문제와 어쩔 수 없이 만난다. 말하자면 슬로모션의 ‘개입’이라는 질문이 있다. 슬로모션은 선수의 멋진 플레이만 보기 위해서 제공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슬로모션은 그 순간의 경기 내용에 대한 분석적 미장센이다. 스포츠 중계의 슬로모션은 영화와 다른 라이브 슬로모션(Live Slow Motion, 약칭 LSM)이다. 이때 이 슬로모션은 디지털 방식의 중계 이후 1초에 75프레임으로 진행되는 표준속도로 결정되었다. 중계에서 슬로모션은 항상 같은 장면의 반복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동시적으로 진행하는 슬로모션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로모션은 주심이 휘슬을 분 다음 재빨리 지나친 순간, 과거의 시간, 일종의 플래시백으로 되돌아가서 그 장면의 순간을 다시 보는 것이다. 물론 멋진 플레이 혹은 골인이라는 환희의 순간이 재현된다. 그러나 반칙의 순간도 여기 포함되어 있다. 그때 여기에 판정이라는 문제가 심술궂게 등장한다. 모두가 다시 그 장면을 슬로모션에 의해서 다시 보는데 오직 경기장 안의 심판과 선수들만 보지 못한다. 슬로모션은 같은 동작을 서로 상이한 각도에서 3배로 확장된 속도로 때로 할리우드 액션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올해 ‘호나우뚱’이 프랑스전에서 보여준 것은 멋진 플레이라기보다는 대부분 산전수전의 경기를 치른 끝에 프로들만이 할 수 있는 할리우드 액션이었다(뭐 그것도 실력이라면 실력이다). 그때 슬로모션은 경기를 보고 있는 모두에게 판정의 분석적 자료를 제공한다. 만일 여기서 주심이 오심을 내렸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게다가 그 결정이 매우 결정적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프랑스 감독인 레몽 도메네크는 한국과 경기를 치른 다음 골문 안까지 들어갔지만 인정받지 못한 골에 대해서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것도 경기의 일부이다.” 슬로모션은 정확한 객관성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이 기계적 디테일은 축구가 인간이라는 실수투성이의 존재들이 운영하는 게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 그때 축구의 규정은 기계 대신 인간의 손을 들어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아무리 억울해도 재경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기계의 객관성으로 규정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중요한 점을 간과하는 것이다. 카메라의 정확성이 순간의 장면을 붙잡을 수는 있다. 하지만 반복되는 이야기. 중계 카메라는 연속성을 포기한 대가로 그것을 얻은 것이다. 경기의 흐름 안에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객관적 자리는 오직 경기장 안에서 선수들과 함께 뛰고 있는 심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판단은 흐름 안에서 내려야 한다. 축구는 기록이 아니라 시간의 게임이다. 제랄 에쥬네스는 현명한 충고를 한다. “축구는 현실의 스피드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지 슬로모션의 속도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보이스 오프 해설이 의미하는 것?
사실 중계로 축구를 볼 때 경기의 진행 상태는 끊임없는 불연속 상태이다. 그런데도 보는 사람은 거기서 연속성의 착시효과에 떨어진다. 그러한 착시효과를 만드는 것은 이미지에 덧붙여진 보이스 오프 해설이다. 무성영화와도 같은 축구 중계에서 해설자의 개입은 단지 장면을 해설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해설자의 말투, 음성, 지금 벌이지고 있는 경기의 상황, 그 경기가 나와 맺고 있는 관계(말하자면 나의 국적 혹은 내가 응원하는 팀, 내가 응원하는 팀을 격파시킨 팀, 스위스의 16강전, 경기와 상관없이 그 나라와 내가 맺고 있는 관계, 이를테면 일본 혹은 히딩크가 감독을 맡았다는 이유만으로 갖는 알 수 없는 친근감 등등)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그때 이 해설은 분석적 화면의 잉여일 뿐만 아니라 종종 모순되어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독일월드컵에서 마주한 가장 끔찍한 사태는 오프사이드의 여부와 상관없이 SBS가 해설위원 신문선을 ‘강제 송환했을 때’ 벌어졌다. 여기서 시청자들은 해설자가 지금 보고 있는 화면의 코러스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신문선은 거절의 제스처를 선택했다(나는 그의 오프사이드에 대한 판단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가름할 능력이 없다. 그리고 여기서 그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벌어진 사태는 축구의 이름으로 진행되지 않고 “그는 애국자인가”라는 질문으로 갑자기 탈바꿈하였다. 그런데 월드컵과 애국이 서로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여기에 둘 사이를 관계 맺는 매개항은 무엇일까? 이 관계는 (내 생각에) 황우석 사태의 정확한 반복이다. 여기서 해설에 대한 저항은 정확하게 그 무언가의 환상으로서의 경기로부터 축구로서의 경기에로의 분리를 견디는 대신 차라리 집단적인 형태로서의 (축구로부터의) 소외를 택하겠다는 행위이다. 그때 이 해설은 대중적 환상의 장식에 머물러야 한다. 그 순간 그들이 바라는 코러스는 (차두리의) “말도 안 돼, 이건 사기입니다”라는 외침이다. 그런데 주심이 매수되어 의도적으로 오심을 한 것이 아니라면 어떤 경우에도 그 판단을 사기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신문선의 올바른 잘못은 환상의 그 무엇으로부터 스포츠로서의 축구에로 되돌려놓은 것이다. 그때 대중은 이 판단의 객관성을 질문하는 대신 왜 당신은 한국 편을 들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이 반문은 고스란히 다시 질문을 던진 사람에게로 돌아간다. 그 유명한 질문. 당신이 그것을 물어보면서 사실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Che Vuoi?) 약간의 각색. 당신이 신문선에게 왜 한국 편을 들지 않습니까, 라고 물어보면서 사실 정말 물어보려는 것은 당신이 월드컵의 그 어디에도 한국 편의 승리를 약속하는 그 어떤 드라마의 가능성도 없는 축구라는 스포츠 자체의 객관적 부정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데 이 질문이 대답의 끝이 아니다. 만일 이것이 단지 대중의 잘못이 아니라 대중으로 하여금 그러한 환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무성영화와 같은 중계와 객관적 용어로 이루어진 주관적-편향적-‘애국적’ 해설의 협주곡들로 이루어진 결과의 산물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축구는 기술의 대결이며, 선수들의 노력의 결과이며, 감독의 전략으로 이루어진 진행이다. 말하자면 축구 자체는 경기장 안에서 벌어지는 스포츠이다. 여기에는 어떤 주관적 감정의 개입도 있을 수 없다. 물론이다. 하지만 중계에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경기 흐름과 상관없는 인서트, 중계의 미학이자 사기
생각해볼 만한 장면. 잉글랜드와 포르투갈전은 ‘그녀들의 리그’에게 매우 슬픈 날이었을 것이다. ‘그녀들의 리그’의 부동의 1위의 스타 데이비드 베컴이 후반 9분 만에 부상으로 퇴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경기는 내게 흥미있는 두개의 신을 제공했다, 하나는 루니가 후반에서 몸싸움을 하다가 포르투갈 선수를 쓰러뜨린 다음 지나가는 척하면서 낭심부를 발로 밟고 지나갔을 때다. 물론 처음에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루니에게 운이 없게도 주심은 바로 그 순간 눈앞에 있었고, 무려 40m나 떨어져 있었다는 호나우두가 달려왔다(알고 있는 것처럼 루니와 호나우두는 같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팀 소속이다. 그러나…). 호나우두는 항의하기 시작했고, 갑자기 루니가 끼어들었다. 루니가 자기는 의도적으로 밟은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자 원래 그렇게까지 할 의도가 없었던 주심은 레드카드를 꺼냈고, 루니는 퇴장당했다. 그러자 호나우두는 고소하다는 듯이 살짝 윙크하면서 지나갔다. 같은 맨체스터 소속인데도 원래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1,2.루니가 상대를 밝고 지나갔을 때 카메라는 멀리서 바라보았다. 3.카메라가 루니를 인서트처럼 바스트 숏으로 잡는다. 4~6.호나우드가 심판에게 무언가 이야기하고, 루니가 다시 끼어든다. 7,8.카메라는 다시 풀숏으로 돌아가 항의하는 선수들과 심판을 비춘다. 9,10.심판이 레드카드를 꺼내자, 루니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군다. 11~15.루니가 반칙하는 장면이 처음과는 다른 각도에서 줌인해 보여진다. 16~18.호나우드가 윙크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런데 이 장면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소설’이다. 그건 그들이 무슨 말을 서로 했는지 마치 들린 것처럼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기사를 찾아보니 스포츠 전문기자들도 그렇게 썼다. 하지만 그들은 현장에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 담론을 성립시킨 과정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현대 테크놀로지의 붐마이크는 충분히 그들의 대화를 사운드 줌인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중계에서 일종의 금기의 선이다. 그때 이 설명을 성립시킨 것은 그들 사이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그걸 무슨 재주로 알 수 있나?) 그걸 보여주는 중계의 방식이다. 루니가 상대를 밟고 지나갔을 때 카메라는 그냥 멀리서 바라보았다(익스트림 롱숏). 그런 다음 카메라는 루니를 인서트처럼 바스트 숏으로 보여준다. 호나우두가 달려오고 심판에게 ‘무언가’ 이야기한다. 루니가 다시 끼어든다. 다음 숏은 뒤로 물러나서 풀숏으로 항의하는 선수들과 심판을 보여준다. 그때 심판이 레드카드를 꺼내든다. 그러자 재치있게 카메라는 한숨 쉬며 고개를 떨어뜨리는 루니를 잡는다. 그런 다음 즉각적으로 뒤이어 루니가 반칙하는 장면, 그러니까 루니가 상대를 밟고 지나가는 장면이 아까와는 다른 각도에서 가까이 줌인으로 다가가 풀숏 사이즈로 정확하게 포르투갈 선수의 엎어진 몸과 루니의 발을 화면의 중심에 놓고 슬로모션으로 ‘다시’ 보여준다. 이 장면은 카메라 스튜디오에서 이미 루니가 밟고 지나간 것을 보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스튜디오는 주심이 레드카드를 꺼낼 때까지 기다린다(‘중계의 심판 판정 존중주의’라고 부르는 원칙. 이를테면 마찬가지로 스위스전에서 당연히 카메라는 부심이 언제 오프사이드 기를 들었는지 기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주심이 오프사이드가 아니라고 판정하자 중계 스튜디오는 부심의 장면을 화면 자료로 제시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뒤이어 호나우두가 윙크하는 인서트를 넣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윙크인지 아니면 땀을 흘려서 눈을 깜빡인 것인지는 모호하다. 그러나 이 장면은 하이 앵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호나우두를 45도로 왼쪽의 자리에 앉아 있는 루니를 보여준 다음 붙여놓았기 때문에 전형적인 상대 숏의 기능을 하면서 마치 그에게 ‘어떤’ 사인을 보내는 것처럼 되어 있다. 사실상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보는 대신 많은 기사들이 중계를 본 다음 쓰여질 때 자신이 본 것이 중계라는 사실을 생략한다. 그때 경기의 결정적 장면들의 설명은 드라마를 중계하는 것처럼 쓴다. 그러나 스포츠는 드라마가 아니다. 혹은 드라마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순간 우리는 스포츠를 다른 그 어떤 가치의 세계 안으로 처넣는 것이 된다. 중계는 인서트라는 효과로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경기의 흐름과 상관없는 인서트는 중계의 미학이자 사기이다. 사실 어떤 영화에서도 중계가 만들어내는 흐름 안에서의 인서트와 같은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한다. 이를테면 경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경기의 흐름 중에 문득 초조한 얼굴로 경기장을 바라보는 각 팀의 감독들의 표정의 클로즈업을 삽입한다. 이때 이 삽입을 통해서 마치 선수들과 감독들 사이에 텔레파시가 일어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혹은 중계 카메라는 경기장에 와 있는 선수들의 아내의 얼굴을 놓치지 않는다. 대부분 이런 삽입은 그녀의 남편이 소속된 팀의 패배가 거의 확정되었을 때 등장한다. 그때 중계는 일종의 신파 드라마가 된다. 이것이 세르주 다네가 중계의 윤리학에서 경기의 연속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말의 핵심이다.
두 번째는 이 경기의 마무리가 연장전까지 진행된 다음에 잔인하게도 페널티킥으로 승부가 가려질 때의 장면이다. 이 페널티킥 장면은 거의 완전한 하나의 공식처럼 편집이 진행되었다. 먼저 골키퍼와 선수를 6m 롱숏의 마스터 사이즈로 보여준다. 프레임 구도는 예외없이 매번 동일한 자리에서 하이 앵글로 잡았다. 말하자면 매번의 슈팅은 매번의 반복의 구도였다. 여기서 내게 신기한 것은 아홉번의 슈팅에서 단 한번도 이 순간을 골키퍼와 선수 사이의 숏과 상대 숏으로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로 읽힌다. 하나는 연속성-동시성-전체성의 보존이다. 어쩌면 이 장면이야말로 앙드레 바쟁이 말한 금지된 편집의 숏의 현대적인 예일 것이다. 이 장면을 편집하는 순간 골키퍼와 선수 사이의 일대일의 대결이라는 페널티킥의 리얼리티가 손상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다른 하나는 그 사이에서 누구에게도 우선권을 주지 않는다는 편집의 결정이다. 여기에는 중계의 중립성이라는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 이것은 레니 리펜슈탈이 준 역사적 교훈의 산물이다.
페널티킥 장면의 하나의 공식처럼 편집됐다. 프레임 구도는 예외없이 매번 동일한 자리에서 하이 앵글로 잡았다. 매번의 슈팅은 매번의 반복의 구도였다. 골기퍼와 선수사이의 숏과 상대 숏은 아홉번의 슛팅 중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증언들. 24개의 화면을 놓고 개입하는 편집자의 주관적 판단. 여기서 유럽 축구 중계의 테크니컬 디렉터인 장 클로드 주오도는 좀 극단적으로 단언한다. “지금 경기장 안에서 느껴지고 있는 관중의 반응이란 조금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혹은 경기 내용의 흐름과도 상관없습니다. 핵심은 그걸 보고 있는 시청자의 심리의 리듬을 따라가는 거지요. 그걸 어떻게 판단하냐구요? 모든 중계는 주관적입니다. 중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경기의 해설자, 심판, 그리고 결과에 가려서 중계의 주관성은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프랑수아 샤를 비도는 중계 편집을 하는 사람들은 경기가 지닌 성격을 파악해서 작위적으로 경기의 선악을 나눈 다음(착한 편, 나쁜 편 혹은 우리 편, 상대편) 편집을 진행할 때 훨씬 리듬감을 얻는다고 덧붙인다. 정보를 중심으로 중계를 진행할 것인가, 아니면 스펙터클을 중심으로 진행할 것이냐에 따라 중계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정보를 중심으로 할 때 화면은 대부분 경기의 전체적인 운영을 보여주기 위해 마스터 숏으로 진행되는 미장센의 화면이 될 것이며, 만일 스펙터클이 중심이 될 때에는 공을 놓고 벌이는 선수들 사이의 플레이를 따라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줌렌즈와 편집의 리듬을 따라가게 될 것이다. 물론 어느 쪽의 극단을 따르는 중계란 없다. 그러나 여기서 역시 주관적 취향이 문제가 된다. 물론 이것은 객관성을 전제로 한 주관성이다. 말 그대로 객관적 주관성이라는 모순된 용어.
룰은 중계의 문법을 결정한다
그에 따른 소박한 제안. 중계에서 리듬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실제로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본 사람들은 축구가 중계처럼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안다. 그때 이 리듬은 장면을 보는 숏의 사이즈 차이와 연속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중계의 시간은 불연속의 편집으로 만들어지면서 동시에 경기 시간과 정확하게 동일하다. 그렇지만 중계는 그 시간 동안 장면의 반복과 슬로모션을 통한 시간의 확장 혹은 연장을 통해서 거기에 무언가 사라진 시간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의 경험은 정말 없어도 괜찮은 것일까? 세르주 다네는 이것을 중계의 사기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경기가 진행되고 있는 스타디움에서 경험하는 것과 그것을 중계를 통해서 보는 것은 단지 사람들이 모여서 보는가, 혹은 안방에서 보는가의 차이가 아니다. 더더구나 일시적으로 전국에서 600만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거리 응원이 스타디움이 아니라 전광판 앞에 중계되고 있는 ‘개입된’ 화면을 보고 있는 것일 때 나는 이 차이의 정치학, 혹은 중계의 시네마를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야구에 대해서 쓴다면 축구와는 전혀 다른 글을 써야 할 것이다. 혹은 권투나 K1을 쓴다면 말할 것도 없다. 골프는 또 다른 문제이다. 말하자면 스포츠 중계에서 종목의 차이는 영화에서 장르의 차이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룰은 중계의 문법을 결정한다. 만일 그렇다면 이런 반문이 가능해진다. 한국 축구에 관한 조언을 하면서 히딩크, 아드보카트, 차범근은 이구동성으로 K리그의 활성화를 하소연한다. 그런데 아무도 (이를테면) 프랑스 텔레비전 방송국에 축구 중계만을 전문으로 종사하는 150여명의 카메라맨, 50여명의 녹음기사, 이것을 연출하는 10여명의 스튜디오 감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K리그가 재미없는 것은 단지 선수들의 기량 부족과 감독의 전술상의 무료함 때문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어쩌면 호나우지뉴, 베컴, 지단이 한꺼번에 국내 경기장에서 뛴다 할지라도 그들이 서커스를 하는 것이 아닌 다음에는 90분 내내 흥미진진한 플레이를 보여줄 리가 없다. 이를테면 그렇게 지루하게 한국과의 경기를 진행한 ‘아트 사커’ 프랑스의 부진을 생각해보라. 그런데 그들은 브라질에서 마치 다른 팀 같았다. 그때 이 경기의 진행을 보여주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서 아무런 고민도 없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물론 경기의 내용이 압도적인 이유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중계의 스타일, 말 그대로 축구의 미장센이라는 측면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을까? 결국 월드컵에서 응원하는 당신은 축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그걸 부정할 수는 없다. 가장 이상적인 축구 중계의 방식은 무엇일까?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있을 수 있다. 세르주 다네라면 축구 중계를 위해서 한명의 카메라맨이 축구 경기장 안에 들어가 처음부터 마지막 휘슬을 불 때까지 단 하나의 숏으로 찍어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광고라는 점만 잊는다면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미학적인 축구 중계는 나이키 광고이다. 그러나 그것이 윤리적이냐는 질문은 또 다른 문제이다. 반면 지금 한국에서 만들어진 축구 광고들이 예외없이 레니 리펜슈탈의 (독일 제3제국시대의 열렬한 민족주의적 열광의 흥분을 연상케 하면서 상상적 공동체의 환상에 기댄) 스펙터클을 재현하는 것은 단지 우연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처음에 한 말의 반복.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축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