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디움에서 본 것과 텔레비전으로 본 것은 다르다
에릭 로메르는 1960년 로마올림픽을 텔레비전으로 본 다음 ‘스포츠의 포토제니’라는 글을 썼다. 거기서 로메르는 스포츠 중계의 핵심은 불가능성에 있다고 설명한다. 스타디움에 가서 경기를 볼 때 인간의 시력으로는 경기의 전체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때 경기의 미세한 디테일을 볼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 망원경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좌석이 문제가 된다. 반면 스포츠 중계는 전체를 포기하고 부분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거기서 단지 플레이의 디테일만을 보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 선수들의 얼굴에 나타난 피로감과 불안, 컨디션을 보게 된다. 그때 여기에 스포츠와는 아무 상관없는 드라마가 개입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좀더 심각한 것은 (로메르는 이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썼다) 딥포커스와 마치 경기장 안에 들어온 것 같은 미디엄 숏의 사용으로 보는 사람과 선수 사이의 거리감을 말살시키고, 제한된 동작을 강조해서 ‘보는 나’의 공간감각을 완전히 왜곡시킨다는 사실이다. 로메르의 생각으로 스타디움에서 본 것과 텔레비전으로 본 것은 ‘시각적 감각의 차원에서’ 완전히 다른 것이다. 카메라는 단지 시청자를 경기장의 맨 앞좌석에 앉히는 것이 아니다. 시청자들은 경기 중에 심판을 제외하고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경기를 보는 내내 이 불가능한 거리를 ‘양해하고’ 본다. 로메르는 스타디움에서 본 경기가 리얼리즘의 시각적 체험이라면 텔레비전으로 본 것은 무성영화를 쳐다보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무성영화와 마찬가지로 텔레비전의 스포츠 중계의 핵심은 액션의 분석과 설명에 있다. 그때 마치 곁에 따라가 있는 것과 같은 스포츠 중계가 신기하게도 선수들의 목소리, 숨결, 몸이 부딪치는 소리에 대해서 완전히 무관심하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중계의 동시성은 절반의 리얼리즘이다. 목소리없는 선수들의 육신만의 가시적 리듬의 세계. 마치 버스터 키튼의 경이적인 액션과도 같은 우주.
말하자면 축구 ‘중계’를 본다는 것은 분석의 미장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가장 먼저 중계의 프레임. 우리는 텔레비전 모니터 화면의 프레임이 온통 정보로 넘쳐난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왼쪽 위에 자리잡은 양쪽 팀. 그 바로 아래 자리잡은 현재 승부의 결과, 그런 다음 왼쪽 아래에는 수시로 화면에 보이는 선수의 이름과 다양한 통계자료가 제시된다. 그리고 정해진 경기 진행시간을 번갈아 제공한다. 이 시간은 종료시간 10분 전이 되면 경기 종료까지 제공된다. 우리는 경기를 보면서 시계를 따로 볼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 정보들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경기에만 몰두하는 것을 방해한다. 아니, 차라리 승부로부터 경기 그 자체의 내용으로 관심을 돌릴까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미 위에 지적한 것처럼) 경기 종료 10분 전과 경기 시작 10분 뒤는 경기 자체로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걸 보는 사람에게 더더구나 그 경기가 마침 응원하는 경기라면 그때부터 경기는 보이지 않고 오직 시간과 승부만이 보일 수밖에 없다. 한국과 토고전에서 공을 돌리고 있는 한국팀의 경기 진행은 얼마나 지루한가. 그런데 그게 한국전이며, 방심하는 순간 순식간에 ‘골을 먹을 수 있을’ 때, 이 시간은 왜 이다지도 더디게 가는가. 이때 이 정보의 프레임은 (예를 들면 <스타워즈>에서) 이제 행성까지 9분 남았습니다, 라고 한 다음 제국의 군대가 행성을 사정거리에 넣기 전에 그 거대한 다크 스타를 격침시켜야 하는 제다이 기사들의 맹렬한 공격을 보는 물리적 시간 9분과 심리적 시간 9분 사이의 일치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시간의 경과를 보여주면서 만들어내는 긴장과 동일한 기능을 한다.
카메라의 고정된 시점 확보가 움직임보다 중요
그런 다음 가시성의 원칙. 축구의 중계는 절대적으로 상상선(imaginary line)의 세계 안에서만 진행된다. 그러므로 24대의 카메라는 경기장 양쪽의 골대를 중심으로 180도 선을 긋고 그런 다음 나머지 절반을 포기해야만 한다. 이건 중계의 절대의 규칙이다. 만일 이 규칙을 포기하게 되면 중계를 보는 우리는 종종 이 선수가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자기편 골문을 향하여 자살골을 차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원칙을 중계방송에 적용한 것은 영국 <BBC>다. <BBC>가 중계방송을 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중심의 상상선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그 상상선을 기준으로 불필요한 것들을 철거하는 것으로 사전준비 프리 프로덕션을 진행했다. 여기서 10대의 카메라는 자기의 자리에 고정되고 움직이는 것은 11번째 카메라부터이다. 이 말뜻은 고정적 시점의 스케일이 확보되는 것이 카메라의 움직임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율동에 넘치는 카메라의 움직임도 공을 놓치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이것은 이후 모든 방송국 중계의 원리가 되었다. 이러한 고전적인 중계방식을 버리기 위한 모든 방송국들의 가장 큰 꿈은 중계방송을 염두에 두고 스타디움을 설계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스카이 캠 촬영이라는 각도를 얻어낼 것이고, 그 말뜻은 상상선을 넘어서 360도 앵글의 화면을 제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경기장이 일종의 스튜디오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되면 결정적으로 관람객 수를 줄여야 한다. 하지만 방송국들은 시청자 수는 관람객 수와 비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FIFA는 경기장이라는 현장 안에 존재하는 고유한 관람석에서의 응원이라는 또 한명의 선수를 포기할 수 있냐고 반문한다.
상상선을 결정한 다음 이 24개의 카메라는 3개의 그룹으로 다시 나뉜다. 축구 중계는 마스터 숏을 기본으로 진행된다. 첫 번째 그룹은 마스터 숏을 보여준다. 이 마스터 숏은 경기장 안의 진행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이 앵글의 부감촬영의 자리에 배치된다. 이때 이 앵글의 기본 높이를 <BBC> 방송국의 원리에 따라 18m 롱숏이라고 부른다(마치 할리우드 투숏의 기본 거리를 2.35m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걸 꼭 지켜서 찍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관용어이다). 이 높이의 카메라는 같은 높이로 센터필드를 중심으로 양쪽에 45라인 상상선을 성립 가능하게 양쪽 골대를 바라보고 서게 된다. 축구는 A와 B라는 두팀이 하는 게임이며, 이 경기의 진행은 아무리 복잡해져도 결국은 A숏과 B숏의 진행이다. 그 다음 두 번째 마스터 숏을 6m 하이 앵글 롱숏이라고 부른다. 그런 다음 남은 두개의 그룹은 줌렌즈로 경기장 안에 들어갈 수 있는 풀숏의 앵글을 중심으로 양쪽에 자리잡는다.
공을 따라갈 것인가, 인물을 따라갈 것인가
여기서 줌렌즈로 경기장 안에 들어온 카메라의 앵글은 마스터 숏과 다른 문제와 마주친다. 상상선을 놓고 공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앵글은 그 공이 선수의 발에 도착하는 순간 다섯 가지 벡터를 놓고 질문한다. 그때 선수는 어디에 있는가, 그의 포지셔닝은 무엇인가, 상대방의 선수는 그의 진로를 어떻게 막고 있는가, 상대 골문은 어느 방향에 있는가, 다음에 이어지는 패스 코스는 어느 쪽이 최선의 방향인가? 사건-숏의 잠재적 능력에 대한 상상력의 역할과 실현의 조건. 이때 스튜디오에 있는 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 패스 코스이다. 그는 그 순간 선수의 전술을 읽어야 한다. 만일 이걸 읽지 못하면 그의 프레임은 공을 놓칠 수밖에 없다. 지단은 자기에게 몰려든 선수들 앞에서 천재적인 판단을 내리고 저 멀리 골문 오른쪽 뒤에 텅 빈 채 서 있는 앙리를 향하여 높이 찬다(프랑스-브라질전). 이때 이 장면이 나를 놀라게 만든 것은 마치 지단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풀숏으로 진행되던 앵글이 지단이 흘낏 보는 바스트 숏을 잡고 바로 멀리 떨어진 롱숏으로 물러난 다음 뒤이어 앙리를 그 뒤에서 골인을 예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포착한 앵글을 선택하는 그 편집의 동시적인 결정이다. 모든 숏은 결국 벡터의 문제라고 한 사람은 에이젠슈테인이다. 그는 숏 안에 이미 다음 방향의 벡터가 결정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때 무엇을 따라갈 것인가가 중요하다. 사건을 따라갈 것인가, 인물을 따라갈 것인가, 주제를 따라갈 것인가? (다섯 가지의 변증법적 몽타주의 카테고리). 축구는 이렇게 묻는다. 공을 따라갈 것인가, 선수를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승부를 따라갈 것인가?
지단이 골문 오른쪽 뒤에 서있는 앙리를 향해 공을 차자, 풀숏으로 진행되던 앵글이 지단을 바스트 숏으로 잡은 뒤 롱숏으로 물러나 앙리를 잡았다. 골을 예상한 것처럼 포착한 앵글을 선택하는 편집의 동시적 결정은 실로 놀랍다.
그런 다음 디테일의 장면들. 축구의 모든 플레이는 룰을 중심으로 개념화되어 있다. 그리고 각 개념의 플레이는 각기 다른 중계의 수사학을 요구한다. 이를테면 코너킥에는 이런 문제가 있다. 코너킥을 찰 때 카메라는 18m 높이에서 전체를 내려다보면서 공이 만들어내는 선을 보여주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코너킥을 찰 때 선수의 뒤편에 서서 선수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옳을까. 물론 이것은 양자 선택이다. 이때 (영국의) <BBC>는 선수를 선택하고 (프랑스의) <카날 플러스>는 공을 선택한다(고 한다). <카날 플러스>는 그때 핵심이 공의 진행 방향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 롱숏은 단지 공의 진행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선수들의 움직임, 골키퍼의 반응. 이 화면은 다양한 정보를 한꺼번에 제시한다. 하지만 <BBC>는 그때 시청자를 선수들과 경기 안에 밀어넣은 다음 공의 방향을 분석하는 것은 그 장면을 다시 반복할 때 보여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전체적 화면으로서의 프레임과 동시적 앵글로서의 프레임. 롱숏과 미디엄 숏은 중계에서 중요한 선택의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때 이 선택은 남의 경기를 볼 때와 자국의 경기를 볼 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샤를 테송은 이 문제를 좀더 개념적으로 요약한다. 축구 중계에는 두 가지 스타일이 있다. 하나는 스페인 원칙이고,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 원칙이다. 스페인 원칙은 기술과 신체, 미학적인 면에서 축구를 집단 안에서 활동하는 개인의 복원에 가치를 두고 그 안에서 볼 플레이의 전체적인 발전을 중계의 토픽으로 다루는 것이다. 반면 이탈리아 원칙은 선수 개인보다도 플레이에 우선권을 부여한 다음 전술적 도식에 따라 선수와 상대방 선수가 서로 접촉하는 방식에 중계의 초점을 두고 공을 따라간다. 나는 여기에 한국 원칙을 더하고 싶다. 원칙은 간단명료하다. 누가 이기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진행은 골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진행된다. (내 생각에) 애절하지만 그래도 질문하고 싶다. 그런데 왜 축구를 야구와 똑같은 방식으로 보고 계십니까? 한국 원칙의 특징은 종목의 차이를 동일한 원리에 의해서 본다는 것이다.
줌렌즈와 HD 카메라가 만들어낸 스펙타클한 영상
그 안에서만 진행되는 중계는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하게 만든다. 하나는 중계라는 것은 그 종목의 룰과 함께 영화의 룰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그 종목과 영화 사이의 유사성이 생겨난다. 결국 축구 중계란 한쪽 팀의 숏과 반대쪽 팀의 상대 숏 사이의 고전적인 영화에서의 대화의 진행이다. 에릭 로메르가 농구를 지켜본 다음 이건 하워드 혹스의 영화다, 라고 말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다소 무리하게 말하자면 축구를 좋아한다는 말은 하워드 혹스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말과 같다. 혹은 심판이 경기장 안에서 갖고 있는 판정의 룰이라는 절대적 존재를 생각한다면 주인공과 상대방, 그리고 그것을 판단내리는 (근대적) 법 사이의 삼항관계로 이루어진 프랭크 카프라의 영화이다. 물론 영화와 달리 축구에서 해피엔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스포츠의 해피엔딩이란 있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편에서 요구한다.
두 번째. 그렇다면 축구 중계에서 금지의 숏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내가 축구 중계에 관한 인터뷰를 읽다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은 FIFA 위원회의 권고사항으로 중계에서 트래블링 숏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경기장 주변에 설치된 카메라 장치들로부터 경기 도중에 발생할 수도 있는 선수들의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공을 쫓아가던 선수가 종종 달려가던 자신의 가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선 바깥으로 나아가 공과 함께 벽에 부딪히는 수많은 장면들. 트래블링을 금지당한 축구 중계는 연속성을 포기해야만 한다. 이를테면 100m 달리기를 단 한번의 롱테이크로 처음부터 끝까지 잡아내는 수평 트래블링의 장면이 확보한 시간적 연속성과 비교해보라. 여기서 그 포기가 요구하는 것은 공과 선수의 분리 사이에서 양자택일의 선택이다. 그때 당연히도 중계는 공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축구가 할리우드영화처럼 스타 시스템에 의지하고 있지만(축구 경기안내 기사들은 영화 소개와 비슷하다. 이번 경기의 주목할 만한 스타들의 소개, 스타들의 특징, 예상되는 드라마 등등. 차이라면 영화는 시사회가 있지만 축구는 관객과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축구라는 시스템을 운동하게 만드는 것은 공이기 때문이다. 공이 멈출 때 축구도 멈춘다. 공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축구도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축구는 선수가 아니라 공을 따라가는 중계이다. 말하자면 선수의 룰이라기보다는 공의 룰이라는 편이 옳다. 이것이 다른 종목의 경기들과 축구 중계의 결정적 차이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100m 달리기나 수영, 스피드스케이팅에서 선수보다 더 빠른 카메라를 볼 수 있다. 이 탁월한 테크놀로지의 힘은 경기 자체보다는 선수(의 경이적인 플레이)에 주목하게 만든다. 하지만 축구에서는 그런 숏이 없다. 달리기나 수영, 스케이팅이 시적으로 보이지만 축구가 드라마로 보이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때 축구 중계에서 카메라는 경기장 안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공을 쫓아갈 수 있는 방법은 모두 한쪽 방향에서 서로 다른 각도로 서 있는 카메라의 앵글로 추적을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선수들은 미리 예정된 콘티에 따라 달리는 것이 아니며, 공은 중력 법칙과 물리적 인과관계에 의해서 움직일 뿐이다. 볼 트래핑을 따라가야 하는 카메라의 앵글과 편집의 앙상블. 구경하는 쪽의 어떤 특수효과, 어떤 의도도 개입할 수 없는 액추얼한 세계. 이때 경기장의 시선을 포획하는 카메라의 영역이 서로 겹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축구 중계의 혁명은 줌렌즈의 위력에 있다. 이것이 HD카메라와 결합하면서 확보하게 된 시야의 딥포커스 공간은 가히 경기장이라는 공간 자체의 스펙터클이라고 할 만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