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gecoach 1939년,
감독 존 포드, 출연 존 웨인, 클레어 트레버
EBS, 2월3일 (토) 밤 9시
“우린 더이상 웨스턴을 만들지 않습니다.” 존 포드가 <세 악인들>(Three Bad Men, 1926) 이후 무려 13년 만에 웨스턴 장르로 복귀하려고 했을 때, 포드의 제의를 들은 폭스사의 책임자는 난색을 표하며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결국 포드는 찰스 왱어라는 인디 제작자를 구슬려 가까스로 제작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웨스턴이라고 하면 주류로부터 밀려난 싸구려 B급영화 정도의 취급을 받고 있을 때였으니, 어쩌면 그건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웨스턴을 보는 당시의 그런 덤덤한 시선은 결국 존 포드에 의해 완전히 전도되고 만다. 30년대 말부터 웨스턴은 사멸해가는 것처럼 보이던 주변부적인 영화 장르에서 오랜 인기를 누리는 메이저 장르로 부활하게 되는데, 그 분기점에 놓인 작품이 바로 포드의 <역마차>였다. 관객과 제작자들에게 공히 웨스턴이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장르라는 사실을 새삼 인지시켜준, 영화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게 이 영화였던 것이다.
영화는 다양한 인물들을 태우고 톤토를 떠나 로즈버그로 향하는 한 역마차의 진로를 따라간다. 그 길이란 그 승객들이 단지 아파치의 위협에 맞서 싸우는 액션을 위한 여정일 수도 있지만 <역마차>는 그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존 포드가 몰고가는 역마차는 그 안에 탄 신분과 성격면에서 상이한 캐릭터들을 매개로 공동체 안의 상충하는 가치들을 따져보는 길로 접어든다. 아마도 그렇게 캐릭터의 깊이와 주제의 미묘함을 획득할 수 있었다는 것이 <역마차>를 이전의 웨스턴영화들이나 혹은 이 영화를 모방한 아류작들보다 탁월한 영화로 만들어준 주요 요인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포드는 외부의 위협에 직면한 이 동일한 운명의 공동체 일원들을 확연히 구분한다. 그가 보기에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약자들이 고상한 사람들보다 우월한 자들이다. 마을에서 버림받은 매춘부 달라스가 요조숙녀처럼 보이는 맬로리보다 실은 더 자상하며 술에 절어 사는 의사 닥이 겉보기에만 신사인 체 하는 햇필드보다 실은 더 쓸모있고 또 의롭다. 그리고 아파치의 습격에 맞서 누구보다 용감하게 싸우는 것은 탈옥한 무법자 링고 키드가 아니던가. <역마차>는 이 “영예로운 쓰레기들”이 ‘문명’을 구축하고 또 구원하는 데 기여했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문명의 축복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그들이 새출발을 하는 모습을 소박한 이상주의를 가득 머금은 눈길로 찬미한다.
물론 <역마차>는 이런 식의 ‘독해’만을 가지고는 절대로 완전한 감상을 누릴 수 없는 영화다(게다가 조금 더 ‘읽으면’ 인종주의의 부담스런 군내도 풍긴다). 이 영화에서 “고전적 완성으로까지 도달한 스타일의 성숙성”(앙드레 바쟁)을 음미하지 못한다면 그건 절대로 온전한 영화 보기가 되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고전주의적 형식미를 완벽하게 구현한 작품, 그건 오슨 웰스가 <역마차>를 영화 만들기의 교재로 쓴 이유이기도 했다. <시민케인>을 만들기 전 <역마차>를 45번 정도나 보면서 연구했다는 그는 <역마차>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포드의 영화는 아니지만 확실한 교과서(textbook)였다고 말한 바 있다. 지금의 관객에게 어쩌면 이 교과서라는 단어만큼 <역마차>를 잘 설명하는 표현도 드물 것 같다. 그건 따분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꼭 보아야 할 영’라는 의미이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antihong@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