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년 전 이태원에 있는 트랜스젠더 클럽에 간 적이 있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한 트랜스젠더가 접대부 역할을 하는 술집이었다. 방송국에서 트랜스젠더 취재를 한 적 있는 PD가 당시로는 이색적인 장소로 안내한다고 기자 몇명을 데려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트랜스젠더라는 말조차도 낯선 시기였다. 기자들은 모두 그 장소가 처음이었고, 트랜스젠더를 실제로 접촉해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미지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체험 삶의 현장’에 출연하는 기분으로 갔던 것 같다. 나는 그 장소의 분위기가 상당히 어색할 것으로 상상했다. 그런데 뜻밖이었다. 그 자리는 ‘장소의 논리’에 매우 재빨리 적응해서 전혀 어색한 기운이 없었다. 우리는 여느 가라오케와 다름없이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잘도 놀았다. 그 낯선 환경과 그렇게 빨리 하나가 된 놀라운 적응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나의 경우는 이랬다. 트랜스젠더는 내 삶의 경계 바깥에 있는 존재, 삶의 현장에서 결코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골치 아픈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기보다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새로운 풍경처럼 느껴졌다. 거기서 본 트랜스젠더는 하나같이 젊고 건강하고 예뻤다. 굳이 호적의 성이 남성이란 점을 상기하지 않으면 아무런 심적 불편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자리가 파하고 그 집 출입문을 나서기 전까지는 그랬다. 트랜스젠더를 구경했다는 새로운 체험에 대한 욕구와 트랜스젠더를 불편없이 대했다는 진보에 대한 허위의식이 공존하는 기묘한 충족감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계산을 마치고 출입문을 나서려 할 때 또 다른 트랜스젠더 월매가 나타났다. 월매는 그 술집의 트랜스젠더를 관리하는 ‘왕언니’의 닉네임이다. 물론 원래는 퇴기인 춘향이 엄마의 기명(妓名)이다. 그 작명의 과정에 일말의 합리성이라도 있다면 월매도 한때 ‘현직 선수’를 거쳐 은퇴한 인물일 터였다. 하지만 월매의 얼굴은 은퇴한 씨름선수 이모씨를 빼다박았다. 게다가 땅딸한 근육질의 30대 후반이었다. 그냥 남자로 잔류하는 게 생업유지에는 훨씬 전략적 선택일 것 같았다. 한마디로 트랜스젠더를 ‘여자보다 더 여자 같은 남자’로 생각하는 세상의 통념을 월매는 온몸으로 반박했다. 하리수만 트랜스젠더냐 월매도 거시기다! 그의 외모는 그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트랜스젠더가 이팔청춘 춘향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 들어 찌그러진 월매로도 존재한다는 것! 나는 트랜스젠더가 세상이 보고 싶은 맞춤한 풍경이 아니라 외면하고 싶은 삶의 문제라는 것을 그를 통해서 처음으로 자각했다. 나이 오십이 다 됐을 지금 월매는 뭘 하며 살고 있을까?
대법원이 성전환자의 성을 인정하기로 했다는 뉴스를 보고 월매 생각을 잠깐 했다. 월매도 최소한 법적으로는 어엿한 여성으로 거리를 활보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 판결의 취지를 가만히 살펴보면 월매는 그냥 여자가 된 게 아니다. 정상적인 인간임을 포기하고 여성의 자리를 확보한 것이다. 대법원의 판결은 성전환자의 성을 인정하는데 몇 가지 단서조항을 붙여놓았다. 그중에는 “성전환증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아도 증세가 호전되지 않으며”, “성전환 수술을 받고”, “성관계나 직업 등도 바뀐 성에 따라 활동하고”, “주위 사람들도 바뀐 성으로 아는 경우에 성전환자로 인정될 수 있다”는 등의 구절이 있다. 이 단서 조항은 성전환 인정에 따른 법적인 문제, 예컨대 의도적인 성전환을 통한 병역기피 등을 예방하기 위한 목적이 있지만,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성전환은 일종의 정신질환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미국 정신과학회는 성전환증을 “자신의 선천적 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불편함과 부적절함을 느끼며 성징을 제거하고 반대성징을 얻으려는 집착에 2년 이상 사로잡혀 있는 상태”로 규정한다고 한다. 나는 왜 성전환자가 정신질환자로 간주되는지 의아하다. 성전환자는 정신질환자처럼 특별한 보호나 격리가 필요한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의 정신이 이상한 게 아니라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한 게 아닐까? 어쨌거나 성전환자의 입장에서 이번 판결은 자신이 원하는 성과 정상적인 인간의 지위 둘 다 없던 데서 하나를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절반의 진보이다. 하지만 성전환자는 여전히 정상의 범주 밖에 ‘그들’로 존재해야 한다. ‘그들’은 ‘보기 싫지만 그냥 내버려두는 존재’의 지위를 부여받았을 뿐이다. 법은 이제 우리와 다른, 싫은 그 무엇의 공존을 허용하기 시작한 듯하다. 그래서 이번 판결은 ‘그들’을 위한 판결이라기보다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진보의식을 위한 판결에 더 가까워 보인다.